코소보 독립 선언의 배경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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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원 작성일작성일 08-02-20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5,59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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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독립 선언의 배경과 의미
2008년 2월 17일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현재 온 세계의 시선이 코소보에 쏠리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코소보 지역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코소보 지역 자체는 경상남도보다 조금 큰 정도의 면적과 200만 정도의 적은 인구를 가진데다가 -수도인 ‘프리스티나’도 인구가 17만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력도 매우 뒤떨어지는, 좀 심하게 말하면 별 볼일 없는 지역이다.
이렇게 작은 지역이지만, 코소보는 비단 이번 며칠 사이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세계의 주목을 끌어왔다. 그 이유는 유럽에 위치한 이 지역의 분쟁이 서유럽으로의 대규모 난민 유입을 가져올 가능성,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대립 등이 맞물려 있는 지역이라는 점도 있지만,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동방 정교와 이슬람교라는 인종적, 종교적 충돌이 가장 극명하게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코소보 지역의 민족구성
코소보 지역 자체의 인종, 문화는 대등한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기보다는 한쪽 세력이 일방적인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2005년의 코소보 통계국의 조사에 따르면, 코소보의 인구는 190만에서 220만 사이인데, 이 중 알바니아인이 92%를 차지하고, 세르비아인이 4%, 보스니아인 및 고란인(Gorans) 계통이 2%, 로마(Roma)인이 1%, 투르크인이 1% 정도라고 한다. 알바니아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다. 고란인은 남슬라브계통의 민족으로 과거 동방정교회를 믿다가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민족이고, 로마인은 과거 집시라고 불리며 유랑하던 민족이다. 또한, 알바니아인, 보스니아인, 고란인, 투르크인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세르비아인은 코소보 지역에서 10만에서 12만 정도의 인구이며, 대부분이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이다. 한편, 알바니아계 중에서도 3% 정도는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코소보 인구 중 1% 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다.
코소보 지역이 가지는 의미
코소보 지역에서 세르비아의 세력이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는 코소보 지역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는 코소보지역이 영토통합의 중요성은 물론, 역사, 종교적으로 세르비아인들에게 성지나 다름없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코소보 지역이 알바니아인과 이슬람교의 지배지역이지만, 중세시기의 코소보는 세르비아 왕국과 세르비아 정교의 중심지였다. 13세기 초에 과거 불가리아 및 비잔틴 제국의 세력을 몰아내고 코소보 지역을 장악한 세르비아인들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르비아 왕국을 세웠다. 코소보 지역에 세르비아 정교의 첫 번째 교구가 설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역이 세르비아 왕국에 있어 종교적, 정치적으로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있어 민족정기의 상징 같은 곳이다. 1389년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세르비아군 및 그 연합군은 프리스티나 부근에서 적을 맞았다.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비잔틴 제국을 훨씬 상회하는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결국 세르비아군은 국왕까지 전사할 정도로 대패하였지만, 항복하지 않고 용감히 싸워서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었다. 이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이슬람의 침공에 맞서 기독교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는 종교적 자부심과, 강대한 적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워 조국을 지켜냈다는 민족적 자부심을 주었다. 이 코소보 전투가 가지는 의미로 인해,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의 민족적 성지가 된 것이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의 관계
또한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과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관계라서, 자신의 영토에 알바니아인들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악몽 같은 일이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의 악연은 15세기 중반 세르비아가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정교회를 믿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은 비무슬림에게 무겁게 부과되는 세금 등의 요인으로 인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세르비아인들은 동방 정교를 고수하였다. 오스만제국은 알바니아인을 이용해 발칸반도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의 박해를 받았으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는 코소보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알바니아인들의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박해가 너무 심하여 19세기 말엽에는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은 오스만제국의 군대가 알바니아 무장 세력을 소탕했을 정도였다. 알바니아인들이 주도권을 계속가지는 가운데, 19세기 말부터는 세르비아 민족의 중심이던 코소보 지역이 세르비아인 대신 알바니아인들이 지배하는 지역이 되었다.
발칸반도의 민족들의 독립전쟁인 발칸전쟁 때, 오스만제국은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민족들에게 패배하면서 이들의 독립을 승인해 주었다. 그 결과 1912년에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전과 달리 세르비아인들이 주도권을 회복한 코소보 지역에는 다시 세르비아인들이 이주해 와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의 비율이 엇비슷해졌다. 열강들은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의 주권을 공인하였고,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것의 보복을 알바니아인 및 투르크인들에게 행하여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추방하며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세계대전은 양 민족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의 적인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편을 들었고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 무장 세력의 공격에 많은 병력을 희생하였다. 그리하여 종전 후 코소보 지역을 다시 지배권에 넣게 된 세르비아는 알바니아인들에게 보복을 자행하였다. 이는 2차 대전 때도 마찬가지로 추축국 측에 선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을 죽이고 거주지에서 추방하였다. 이러한 세계대전들의 결과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 지역을 떠났고, 코소보 지역은 오늘날과 같은 알바니아인들의 지역이 되어 버렸다.
공산화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양 민족 간의 갈등이 일단 봉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수반이었던 티토는 세르비아의 세력을 누르는 것이 연방의 유지에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여 세르비아의 세력을 통제하였으며, 코소보는 자치주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원한을 꼭 누를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입장에 서있던 알바니아인들에게 있어서는 공산국가가 방패 구실을 해준 것이다.
공산국가의 붕괴는 세르비아인에게는 걸림돌의 제거, 알바니아인에게는 방패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공산당 지배하에 흘렀던 수십 년의 세월은 양 민족 사이의 원한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1989년 코소보는 자치주의 지위를 박탈당하여 세르비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에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로부터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1997년에는 코소보해방군(KLA)을 결성하고 무장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과 99년 사이에 있었던 신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의 밀로셰비치 정권이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에게 가한 ‘인종청소’는, 1998년 KLA이 4명의 세르비아 경찰을 사살할 것에 대한 보복이자, 과거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인들에게 당했던 것의 보복이었다.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1999년에 미국 등의 나토군이 세르비아를 공습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저지한 것, 또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자신들의 영토인 코소보에 주둔하게 된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과거 조상들이 그토록 핍박당하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는데, 오늘날에서야 잃었던 토지를 되찾으려고 하자 인디언과 유태인을 학살했던 자들이 세르비아인들을 악마처럼 묘사하며 자신들의 영토주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세르비아인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체포당한 후 전범 재판 중 감옥에서 숨진 밀로셰비치를 추도하기 위해, 2006년 3월에 5만 명이 넘는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이 참석한 것만 봐도 세르비아인들의 억하심정을 알 수 있다.
코소보 독립 선언 이후의 민족문제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하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코소보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세르비아, 러시아 중국 등은 이에 반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국 내 소수민족 분리 독립 움직임이 있는 국가는 코소보의 독립 선언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EU 내에서도 자국 내 바스크족 및 카탈루냐 지방에서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우려하는 스페인, 세르비아와 유사한 소수민족 문제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 플랑드르 지방의 분리주의를 우려하는 벨기에 등이 코소보 독립에 반대하여 EU는 코소보 독립에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이에 대한 대응을 개별국가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중국은 코소보의 독립이 대만, 티베트 자치구, 신장위구르 자치구 등의 분립독립 운동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우려하여 강력히 반대하고 있고, 이슬람이 절대다수인 인도네시아도 자국 내 사정을 고려하여 이슬람 국가인 코소보의 탄생을 반기지 않고 있다.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중앙아시아의 국가들도 코소보의 독립을 규탄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은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코소보의 분리 독립이 체첸을 비롯한 자국 내 자치공화국의 분리 움직임에 탄력을 실어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한편, 같은 슬라브족이자 정교문화권인 세르비아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태세이다. 러시아로서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나토와 EU로 기울려고 하는 세르비아를 자신의 확고한 우방으로 묶어둘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독립을 좌시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세르비아의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자국의 영토를 상실하는 것은 물론, 코소보 지역에 살고 있는 10만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인들에게 차별 및 박해를 당하는 것을 앉아서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또한 국제적 환경도 최소한 1999년보다는 세르비아에게 유리하다. 1999년의 ‘인종청소’라는 명분과는 달리 ‘코소보 독립’은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정당성이 약하다. 코소보 사태 이후 유엔 안정보장 이사회가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영토라고 규정했었다는 사실에서, 코소보 독립에 따른 분쟁에서는 오히려 세르비아 측에 명분이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는 국가들은 자신들이 결정했던 유엔 안보리 결의를 스스로 뒤집는다는 비판에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자국 내 소수민족의 독립을 꺼려하는 여러 국가들이 세르비아의 편을 들 수 있다는 점도 세르비아에게 유리한 점이다. 특히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지는 적극적이다. ‘인종청소’ 때와는 달리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지에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더 적극성을 띨 수 있다. 러시아 외에도 중국의 지지, 비슷한 소수민족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인접한 마케도니아의 지지도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이 이를 승인하였지만 이것만으로 독립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고 세르비아 및 열강의 선택에 따라 사태의 반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한 정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2월 17일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현재 온 세계의 시선이 코소보에 쏠리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코소보 지역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코소보 지역 자체는 경상남도보다 조금 큰 정도의 면적과 200만 정도의 적은 인구를 가진데다가 -수도인 ‘프리스티나’도 인구가 17만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력도 매우 뒤떨어지는, 좀 심하게 말하면 별 볼일 없는 지역이다.
이렇게 작은 지역이지만, 코소보는 비단 이번 며칠 사이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세계의 주목을 끌어왔다. 그 이유는 유럽에 위치한 이 지역의 분쟁이 서유럽으로의 대규모 난민 유입을 가져올 가능성,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대립 등이 맞물려 있는 지역이라는 점도 있지만,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동방 정교와 이슬람교라는 인종적, 종교적 충돌이 가장 극명하게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코소보 지역의 민족구성
코소보 지역 자체의 인종, 문화는 대등한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기보다는 한쪽 세력이 일방적인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2005년의 코소보 통계국의 조사에 따르면, 코소보의 인구는 190만에서 220만 사이인데, 이 중 알바니아인이 92%를 차지하고, 세르비아인이 4%, 보스니아인 및 고란인(Gorans) 계통이 2%, 로마(Roma)인이 1%, 투르크인이 1% 정도라고 한다. 알바니아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다. 고란인은 남슬라브계통의 민족으로 과거 동방정교회를 믿다가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민족이고, 로마인은 과거 집시라고 불리며 유랑하던 민족이다. 또한, 알바니아인, 보스니아인, 고란인, 투르크인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세르비아인은 코소보 지역에서 10만에서 12만 정도의 인구이며, 대부분이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이다. 한편, 알바니아계 중에서도 3% 정도는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코소보 인구 중 1% 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다.
코소보 지역이 가지는 의미
코소보 지역에서 세르비아의 세력이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는 코소보 지역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는 코소보지역이 영토통합의 중요성은 물론, 역사, 종교적으로 세르비아인들에게 성지나 다름없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코소보 지역이 알바니아인과 이슬람교의 지배지역이지만, 중세시기의 코소보는 세르비아 왕국과 세르비아 정교의 중심지였다. 13세기 초에 과거 불가리아 및 비잔틴 제국의 세력을 몰아내고 코소보 지역을 장악한 세르비아인들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르비아 왕국을 세웠다. 코소보 지역에 세르비아 정교의 첫 번째 교구가 설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역이 세르비아 왕국에 있어 종교적, 정치적으로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있어 민족정기의 상징 같은 곳이다. 1389년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세르비아군 및 그 연합군은 프리스티나 부근에서 적을 맞았다.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비잔틴 제국을 훨씬 상회하는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결국 세르비아군은 국왕까지 전사할 정도로 대패하였지만, 항복하지 않고 용감히 싸워서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었다. 이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이슬람의 침공에 맞서 기독교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는 종교적 자부심과, 강대한 적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워 조국을 지켜냈다는 민족적 자부심을 주었다. 이 코소보 전투가 가지는 의미로 인해,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의 민족적 성지가 된 것이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의 관계
또한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과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관계라서, 자신의 영토에 알바니아인들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악몽 같은 일이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의 악연은 15세기 중반 세르비아가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정교회를 믿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은 비무슬림에게 무겁게 부과되는 세금 등의 요인으로 인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세르비아인들은 동방 정교를 고수하였다. 오스만제국은 알바니아인을 이용해 발칸반도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의 박해를 받았으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는 코소보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알바니아인들의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박해가 너무 심하여 19세기 말엽에는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은 오스만제국의 군대가 알바니아 무장 세력을 소탕했을 정도였다. 알바니아인들이 주도권을 계속가지는 가운데, 19세기 말부터는 세르비아 민족의 중심이던 코소보 지역이 세르비아인 대신 알바니아인들이 지배하는 지역이 되었다.
발칸반도의 민족들의 독립전쟁인 발칸전쟁 때, 오스만제국은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민족들에게 패배하면서 이들의 독립을 승인해 주었다. 그 결과 1912년에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전과 달리 세르비아인들이 주도권을 회복한 코소보 지역에는 다시 세르비아인들이 이주해 와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의 비율이 엇비슷해졌다. 열강들은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의 주권을 공인하였고,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것의 보복을 알바니아인 및 투르크인들에게 행하여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추방하며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세계대전은 양 민족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의 적인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편을 들었고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 무장 세력의 공격에 많은 병력을 희생하였다. 그리하여 종전 후 코소보 지역을 다시 지배권에 넣게 된 세르비아는 알바니아인들에게 보복을 자행하였다. 이는 2차 대전 때도 마찬가지로 추축국 측에 선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을 죽이고 거주지에서 추방하였다. 이러한 세계대전들의 결과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 지역을 떠났고, 코소보 지역은 오늘날과 같은 알바니아인들의 지역이 되어 버렸다.
공산화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양 민족 간의 갈등이 일단 봉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수반이었던 티토는 세르비아의 세력을 누르는 것이 연방의 유지에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여 세르비아의 세력을 통제하였으며, 코소보는 자치주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원한을 꼭 누를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입장에 서있던 알바니아인들에게 있어서는 공산국가가 방패 구실을 해준 것이다.
공산국가의 붕괴는 세르비아인에게는 걸림돌의 제거, 알바니아인에게는 방패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공산당 지배하에 흘렀던 수십 년의 세월은 양 민족 사이의 원한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1989년 코소보는 자치주의 지위를 박탈당하여 세르비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에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로부터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1997년에는 코소보해방군(KLA)을 결성하고 무장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과 99년 사이에 있었던 신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의 밀로셰비치 정권이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에게 가한 ‘인종청소’는, 1998년 KLA이 4명의 세르비아 경찰을 사살할 것에 대한 보복이자, 과거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인들에게 당했던 것의 보복이었다.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1999년에 미국 등의 나토군이 세르비아를 공습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저지한 것, 또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자신들의 영토인 코소보에 주둔하게 된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과거 조상들이 그토록 핍박당하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는데, 오늘날에서야 잃었던 토지를 되찾으려고 하자 인디언과 유태인을 학살했던 자들이 세르비아인들을 악마처럼 묘사하며 자신들의 영토주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세르비아인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체포당한 후 전범 재판 중 감옥에서 숨진 밀로셰비치를 추도하기 위해, 2006년 3월에 5만 명이 넘는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이 참석한 것만 봐도 세르비아인들의 억하심정을 알 수 있다.
코소보 독립 선언 이후의 민족문제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하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코소보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세르비아, 러시아 중국 등은 이에 반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국 내 소수민족 분리 독립 움직임이 있는 국가는 코소보의 독립 선언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EU 내에서도 자국 내 바스크족 및 카탈루냐 지방에서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우려하는 스페인, 세르비아와 유사한 소수민족 문제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 플랑드르 지방의 분리주의를 우려하는 벨기에 등이 코소보 독립에 반대하여 EU는 코소보 독립에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이에 대한 대응을 개별국가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중국은 코소보의 독립이 대만, 티베트 자치구, 신장위구르 자치구 등의 분립독립 운동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우려하여 강력히 반대하고 있고, 이슬람이 절대다수인 인도네시아도 자국 내 사정을 고려하여 이슬람 국가인 코소보의 탄생을 반기지 않고 있다.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중앙아시아의 국가들도 코소보의 독립을 규탄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은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코소보의 분리 독립이 체첸을 비롯한 자국 내 자치공화국의 분리 움직임에 탄력을 실어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한편, 같은 슬라브족이자 정교문화권인 세르비아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태세이다. 러시아로서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나토와 EU로 기울려고 하는 세르비아를 자신의 확고한 우방으로 묶어둘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독립을 좌시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세르비아의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자국의 영토를 상실하는 것은 물론, 코소보 지역에 살고 있는 10만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인들에게 차별 및 박해를 당하는 것을 앉아서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또한 국제적 환경도 최소한 1999년보다는 세르비아에게 유리하다. 1999년의 ‘인종청소’라는 명분과는 달리 ‘코소보 독립’은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정당성이 약하다. 코소보 사태 이후 유엔 안정보장 이사회가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영토라고 규정했었다는 사실에서, 코소보 독립에 따른 분쟁에서는 오히려 세르비아 측에 명분이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는 국가들은 자신들이 결정했던 유엔 안보리 결의를 스스로 뒤집는다는 비판에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자국 내 소수민족의 독립을 꺼려하는 여러 국가들이 세르비아의 편을 들 수 있다는 점도 세르비아에게 유리한 점이다. 특히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지는 적극적이다. ‘인종청소’ 때와는 달리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지에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더 적극성을 띨 수 있다. 러시아 외에도 중국의 지지, 비슷한 소수민족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인접한 마케도니아의 지지도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이 이를 승인하였지만 이것만으로 독립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고 세르비아 및 열강의 선택에 따라 사태의 반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한 정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