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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무텐노(桓武天皇)와 도래인(渡來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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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7-10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6,0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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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통신> - 18

칸무텐노(桓武天皇)와 도래인(渡來人)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인 이노우에미쓰오(井上滿郞)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칸무천황이 없었다면  헤이안(平安) 시대도, 헤이안경(平安京)도, 아니 그후의 일본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상 그의 역할은 대단하다.”

그는 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 그가 태어 났을 당시는 누구도 그가 왕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그는 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光仁천황에 의해 다시 天智系가  부활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 황후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음에도 역사는 후비 서열의 어머니에게서 태어 난 그를 왕으로 택하게 된다. 일본의 왕위 계승은 신화의 시대가 지난 후에도 대단히  복잡하여 이곳에서는 그냥 지나치고자

그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몇 번이나 썼으나 오늘은 백제 왕손의 피를 받은 그가 그후 도래인들을 얼마나 중히 등용하며 새 시대를 열어 갔는가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그는 왕이 된 후 10여년간 정변과 자연 재해, 가족들의 죽음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 난 동생의 모반사건으로 신뢰했던 인물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가 反 칸무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해 나가면서 드디어  헤이안으로 수도를 옮기는데 이것이 두 번째의 수도 이전으로 원한으로 사무쳐 있는 나가오카경(長岡京)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 이유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때 그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도와 준 인물들이 도래인들이고 그는 고구려계 신라계 , 백제계를 포함한 도래인들을 새로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활용하면서 난국을 헤쳐 나갔다. 그가 헤이안으로 천도한 후 살았던 御所의 大內裏는 하타노카와카쓰(秦河勝)의 사저였다. 10세기 중엽에 살았던 일본 국왕(村上天皇)의 일기인 “村上天皇記”에 나오는 것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왕이 살 집을 제공한 이 일기로 보아 칸무천황과 하타씨족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였는가 짐작이 될 뿐 아니라 헤이안경의 토지 자체가 하타씨 소유였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 광륭사가 현재의 터로 이전한 것도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자료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즉위 10여년간 두 번의 천도를 감행하려면 경제적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 그걸 山城國 호족이었던 부자 하타씨등이 부담했다는 것이다. 헤이안경으로 천도할 것을 진언한 인물도 백제계 인물 (和氣淸麻呂)이고 그 책임을 맡은 인물도 하타씨를 어머니로,혹은 아내로  한 인물 들이다. 칸무천황이 가장 신뢰했던 한 사람으로 헤이안경의 설계단계에서부터 깊이 관여했던  스가노노마미치(菅野眞道)도 백제계도래인이다. (續日本紀의 편찬자의 한사람)

그 뿐인가?  왕 즉위이후 동북지방의 에미시(蝦夷)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카노우에카리타마로(坂上찰田麻呂)와 그의 아들로 처음으로 장군의 칭호를 받은 사카노우에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도 백제계 도래인. 그들은 모두 議政官(帝相)이 되었었으니, 칸무 천황시대 이후에는 다시 오지 않았던 도래인 세상의 시대였다. 그의 어머니 타카노니이가사의 고향 땅과 가까운 헤이안경 위치도 도래인이 많이 살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는 일본 귀족의 결혼 습관으로 보아 어머니 집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으리라고 보며 그 터전에 수도를 정했으리라는 설은 설득력이 있다.

또 하나 헤이안경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배치가 아주 잘 된 풍수 지리상 아주 좋은 수도지로 알려져 있고 이 땅으로 천도하는데 많은 조언을 한 승려가 바로 백제계 아야씨족인 賢璟이다. 이렇게 되면 그를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정신적으로 보필했던 사람들은 거의 도래인들이 된다. 그는 도래계의 피가 자기몸에 흐른 다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면서 도래인들에 의지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간 것이다.
학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은 그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어머니가 죽은 후 百濟王氏 일족을 승진시키며  “백제왕 등은 짐이 외척이 됨으로.. 작위를 준다” 는 내용이다 . 그의 몸안에 흐르는 피는 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칸무 천황이후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천황의 부인은 무려 27명, 그중에 도래인 부인이 6명이었다. 이것도 전무 후무한 일이라고 한다. 백제왕씨 , 백제씨, 坂上氏, 河上氏등의 딸들이다 . 그 중 동북지방 정벌의 공로자인 사카노우에씨는 父子 모두, 딸을 왕의 후비로 보냈고 그 후비 중 又子의 딸은 嵯峨天皇의 妃가 된다. 왕조시대에는 다 그러했듯이 단순한 남녀관계가 아닌 왕 주변의 정치세력과의 연결이라고 보면 역시 칸무 주변의 인물들이 어떠한 가계였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어머니 타카노니이가사(高野新笠)는 도래인 후손으로 아들 칸무에게 정신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엄청 난 영향을 주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녀 또한 격동의 정치현실 속에서 불행한 여인이었다. 둘째 아들이 칸무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었으나 모반의 혐의로 형에게  죽임(斷食自殺)을 당한  것이다.  시체마져도 당시 流刑의 땅인 淡路에 보내졌었다는데.... 지금도 그곳에는 이미 무덤은 이장했으나 비극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니 두 아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지켜 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녀는 아들이 죽은지 4년만에 눈을 감는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무서운것이거늘...

그녀 집안의 본거지였던 곳은 지금도 독특한 지명으로 남아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끈다. 物集女라는 이름이다. 처음 이 지명을 보며 참 이상한 이름도 있구나 싶었는데 여기서는 설명하기 복잡하여 생략하나 사실 이름뒤에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이곳에는 칸무 천황의 셋째 아들인 淳和천황의 무덤이 있다. 그는 유언으로 죽으면 귀신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기위해 뼈를 부셔 산속에 뿌려 달라고 하였고 그것이 지켜져 남아 있는 건 火葬塚이라던가.....

칸무천황은 나이 70세에 눈을 감는다. 40대에 왕의 자리에 올라 파란만장의 세월을 보낸 그의 주변에는 끝까지 도래인이 남는다. 왕의 최측근이었던 管野眞道와 대장군 坂上田村麻呂였다. 그들은 왕의 사후 장례절차까지 챙기며 왕을 지켰으리라.

내가 지금 일본 경도에서 살고 있는 桂坂 언덕에 京都大學 工學部 켐퍼스가 있다. 언제나 조용한 이교정의 식당에는 총장 카레도 팔고 있어 가끔 저녁을 먹기도 한 곳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니자에몽이라는 온천이 있다. 온천의 선전을 위해 써 놓은 문장에 “..古老에 의하면  이곳은 칸무천황의 제 2부인인 藤原吉子妃의 저택이 있었던 곳으로 미인이었다고 소문이 난 왕비의 집에서 온천이 나온것은.....”이라고 나온다.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살았던 고향이 있고 또한 어머니의 무덤이 있으며 사랑하던 부인의 집까지 있었다면 칸무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이지역을 지나 다녔을 것이다.

쿄토에서 1년을 살며 마지막으로 정리한 인물이 칸무천황이고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지역에 내가 살고 있는 것도 도래인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나에게 조상들이 내리신 큰 선물이 아니던가 !!!                                                             

                                                                                        <2009년7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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