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카 진쟈(八坂神社)가 펼치는 세계인들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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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7-05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9,570회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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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통신>-14
야사카 진쟈(八坂神社)가 펼치는 세계인들의 축제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7월 1일 , 오늘은 기온마쓰리(祇園祭り)가 시작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산보길에 만난 중국인 학자는 축제의 시작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버스를 타러 바삐 나간다고 했다. 그녀는 기온마쓰리를 연구하러 온 외국인이다. 한달간 계속된다는 이 축제는 이 처럼 세계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본 3대 축제의 하나다. 그 축제를 주관하는 곳이 야사카진쟈(八坂神社)다.
淸水寺를 찾아 가면서 우리는 절에서 걸어 갈 수 있는 야사카진쟈를 하루 일정에 넣었다. 내가 쿄토에서 찾아 나서는 곳은 우리 조상과 관련이 있는 곳들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쿄토의 무더위속에서 무려 한달간 계속되는 이 대표적인 마쓰리의 주인은 또 우리 조상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금까지 소개한 13개의 글들은 주로 신라와 백제에서 건너 온 조상들의 얘기였다. 이번에는 고구려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고구려인들이 세운 신사가 야사카진쟈이고 그곳의 축제가 일본이 자랑하는 祇園祭다.
이 신사가 세워 진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八坂神社由緖略記”에 의하면 656년 고구려 사신 伊利之使主가 신라 牛頭山에 있는 스사노오노미코토(素잔명尊, 혹은 牛頭天王)를 八坂鄕에 모시고 八坂造(야사카노미야코)라는 성을 하사 받은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그가 신사를 세운 八坂鄕은 이미 5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대곡(大谷), 마루야마(圓山), 기온(祇園), 五條淸水 주변을 아울렀던 지역이다.
학자들은 八坂鄕의 고구려 마을에 정착한 사신이 호족으로 성공하여 지역의 이름에 걸맞게 八坂造라는 성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氏神을 모셨다고 보고 있다. 八坂라는 지명은 東山 언저리인 이곳에 많은 비탈길이 있어 비탈길 동네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祇園祭다園坂, 淸水坂, 三年坂 등 여덟 개의 坂이름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神佛 分離 정책 이전에는 절과 신사가 공존해 있었다 이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八坂造의 氏寺인 祇園寺가 있었고 그 절의 天神堂이 八坂神社(혹은 感神院)가 되었는데 그 이후 절은 쇠퇴하고 신사는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八坂神社의 由緖에 기록되어 있다.
淸水寺에서 八坂神社로 내려 가는 길 오른쪽 언덕에 5층탑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야사카탑”이라고 불리우는 이것은 원래 法觀寺 혹은 八坂寺라는 절 경내에 세워졌던 탑이었다. 15세기에 재건된 탑이긴 하나 탑의 위치는 옛날 그 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八坂造일족의 氏寺로 알려진 절은 없어지고 탑만이 남아서 고구려인들의 영화를 온몸으로 증언해 주고 있었다. “東山에 八坂塔보다 더 높은 건물은 바라지 않는다”는 글을 남긴 일본화가도 있으니.....
고구려 인들은 남산성 일대(京都府相樂郡山城町上狛)에도 커다란 흔적을 남겨 놓았다. 지금은 초석만이 남아 있으나 1938년 발굴조사를 실시해 본 결과 아스카시대의 절이었으리라고 짐작되는 고려사가 그것이다. 하타씨가 쿄토에 자리 잡아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 그들 고구려인들도 선진문화를 가진 도래인 집단으로서 쿄토에서 대 활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일부가 八坂지역으로 옮겨 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자, 이제 마쓰리에 대한 얘기를 조금만 하자.
헤이안시대 초기에 쿄토에 전염병이 돌았다. 그 시대에는 무서운 전염병은 정치적으로 실각하여 죽임을 당한 자의 저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한 신에게 빌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었다. 그리하여 전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牛頭天王)를 모시는 야사카신사에서 御靈會를 지냈고 그것이 祇園祭의 시작이었다(869년).
원래 인도의 祇園精舍의 수호신이라는 우두천왕이 스사노오노미코토와 동일시된 것은 스사노오신이 한반도 신라의 스시모리(曾?茂利)에 머물러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유래한다. 스시모리는 신라 고어로 소모리, 즉 소머리(牛頭)가 되며 아직도 한국에는 우두라는 지명이나 산 이름이 남아 있다. 고구려 도래인이 八坂鄕에 자리 잡고 살면서 그곳에 씨신을 모신 것이 그 시작이 되었던 八坂神社는 이런 연유로 후대에 일본 신화에서 가장 강한 신격을 가진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모시는 신사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세분이다. 그들을 조금만 더 깊이 들어 가면 도교와도 관계깊은 얘기가 나온다. 따라서 기온마쓰리는 일본 고유의 신 , 고구려, 신라의 신, 인도, 중국까지 아우르는 국제적인 성격의 축제임을 알 수 있다.
전염병 퇴치의 신이 사는 신사를 찾아 오는 일본인들의 강한 신앙 덕택으로 그 세력이 점점 커진 八坂神社는 무로마찌 시대( 조선시대 초기)에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성대한 축제로 발전하였다. 그때 만들어 진 미코시가 일본 마쓰리의 형식에 많은 영향을 주어 전국에서 행해지는 마쓰리에 거의 미코시를 사용하기도 한다. 기온마쓰리에 쓰이는 미코시는 두 개로 나누인다.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주를 모신 가마를 야마(山)라고 하고 신의 신령이 깃들인 우뚝 솟은 신목(神木)을 모신 것을 호코라고 하는데, 모두 20개가 넘는 야마와 호코가 지역 사람들에 의해 어깨에 매달려 져 시내를 행진한다 . 이 행진이 마쓰리의 하이라이트로 7월 17일이다. 그리고도 7월 말일까지 신을 향한 경건한 행사가 계속된다.
쿄토를 더욱 뜨겁게 달구는 이행사가 끝나고 8월16일의 오산오쿠리(五山送리화)가 지나가면 여름이 끝난다던가.......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축제 첫날 오후의 八坂神社는 한가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붉게 단장한 서루문(西樓門)을 나서 우리 부부는 기온의 골목 골목을 기웃거렸다. 일본 남성들, 아니 남자라면 한번 쯤 가 보고 싶은 고급 술집이 즐비해 있는 곳. 얼굴에 하얀 칠을 하고 화려한 기모노로 단장한 마이코(舞子)들이 굽이 높은 목신을 신고 간드러지게 걸어 가는 모습이 보일만도 한데 안 보인다. 조금 전 淸水寺에서는 만났었는데.....
쿄토답게 꾸며 진 술집들의 겉모습에 눈을 주면서 나는 멀리 멀리 과거로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어느 곳인가! 옛날 옛날 그 옛날 고구려 인들이 살았던 곳, 八坂鄕.
미로처럼 생긴 어는 골목에서 조상들이 불쑥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착각속에서의 순간들이었다.
9세기가 되면 이근처에 백제인 타무라마로가 淸水寺를 세웠고 또 이웃에는 또 신라계인 하타씨와 관련이 있는 金剛寺도 있다.
이쯤되면 가장 일본적인 전통을 지켜 왔다는 쿄토의 원 주인의 후예들은 아픈 가슴을 쓸어 내릴 수 밖에 없다. 신이 되어 쿄토를 지키고 계시는 조상님들이여! 부디 영원하소서.
<2009년7월1일>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51976553
야사카 진쟈(八坂神社)가 펼치는 세계인들의 축제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7월 1일 , 오늘은 기온마쓰리(祇園祭り)가 시작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산보길에 만난 중국인 학자는 축제의 시작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버스를 타러 바삐 나간다고 했다. 그녀는 기온마쓰리를 연구하러 온 외국인이다. 한달간 계속된다는 이 축제는 이 처럼 세계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본 3대 축제의 하나다. 그 축제를 주관하는 곳이 야사카진쟈(八坂神社)다.
淸水寺를 찾아 가면서 우리는 절에서 걸어 갈 수 있는 야사카진쟈를 하루 일정에 넣었다. 내가 쿄토에서 찾아 나서는 곳은 우리 조상과 관련이 있는 곳들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쿄토의 무더위속에서 무려 한달간 계속되는 이 대표적인 마쓰리의 주인은 또 우리 조상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금까지 소개한 13개의 글들은 주로 신라와 백제에서 건너 온 조상들의 얘기였다. 이번에는 고구려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고구려인들이 세운 신사가 야사카진쟈이고 그곳의 축제가 일본이 자랑하는 祇園祭다.
이 신사가 세워 진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八坂神社由緖略記”에 의하면 656년 고구려 사신 伊利之使主가 신라 牛頭山에 있는 스사노오노미코토(素잔명尊, 혹은 牛頭天王)를 八坂鄕에 모시고 八坂造(야사카노미야코)라는 성을 하사 받은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그가 신사를 세운 八坂鄕은 이미 5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대곡(大谷), 마루야마(圓山), 기온(祇園), 五條淸水 주변을 아울렀던 지역이다.
학자들은 八坂鄕의 고구려 마을에 정착한 사신이 호족으로 성공하여 지역의 이름에 걸맞게 八坂造라는 성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氏神을 모셨다고 보고 있다. 八坂라는 지명은 東山 언저리인 이곳에 많은 비탈길이 있어 비탈길 동네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祇園祭다園坂, 淸水坂, 三年坂 등 여덟 개의 坂이름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神佛 分離 정책 이전에는 절과 신사가 공존해 있었다 이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八坂造의 氏寺인 祇園寺가 있었고 그 절의 天神堂이 八坂神社(혹은 感神院)가 되었는데 그 이후 절은 쇠퇴하고 신사는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八坂神社의 由緖에 기록되어 있다.
淸水寺에서 八坂神社로 내려 가는 길 오른쪽 언덕에 5층탑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야사카탑”이라고 불리우는 이것은 원래 法觀寺 혹은 八坂寺라는 절 경내에 세워졌던 탑이었다. 15세기에 재건된 탑이긴 하나 탑의 위치는 옛날 그 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八坂造일족의 氏寺로 알려진 절은 없어지고 탑만이 남아서 고구려인들의 영화를 온몸으로 증언해 주고 있었다. “東山에 八坂塔보다 더 높은 건물은 바라지 않는다”는 글을 남긴 일본화가도 있으니.....
고구려 인들은 남산성 일대(京都府相樂郡山城町上狛)에도 커다란 흔적을 남겨 놓았다. 지금은 초석만이 남아 있으나 1938년 발굴조사를 실시해 본 결과 아스카시대의 절이었으리라고 짐작되는 고려사가 그것이다. 하타씨가 쿄토에 자리 잡아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 그들 고구려인들도 선진문화를 가진 도래인 집단으로서 쿄토에서 대 활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일부가 八坂지역으로 옮겨 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자, 이제 마쓰리에 대한 얘기를 조금만 하자.
헤이안시대 초기에 쿄토에 전염병이 돌았다. 그 시대에는 무서운 전염병은 정치적으로 실각하여 죽임을 당한 자의 저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한 신에게 빌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었다. 그리하여 전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牛頭天王)를 모시는 야사카신사에서 御靈會를 지냈고 그것이 祇園祭의 시작이었다(869년).
원래 인도의 祇園精舍의 수호신이라는 우두천왕이 스사노오노미코토와 동일시된 것은 스사노오신이 한반도 신라의 스시모리(曾?茂利)에 머물러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유래한다. 스시모리는 신라 고어로 소모리, 즉 소머리(牛頭)가 되며 아직도 한국에는 우두라는 지명이나 산 이름이 남아 있다. 고구려 도래인이 八坂鄕에 자리 잡고 살면서 그곳에 씨신을 모신 것이 그 시작이 되었던 八坂神社는 이런 연유로 후대에 일본 신화에서 가장 강한 신격을 가진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모시는 신사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세분이다. 그들을 조금만 더 깊이 들어 가면 도교와도 관계깊은 얘기가 나온다. 따라서 기온마쓰리는 일본 고유의 신 , 고구려, 신라의 신, 인도, 중국까지 아우르는 국제적인 성격의 축제임을 알 수 있다.
전염병 퇴치의 신이 사는 신사를 찾아 오는 일본인들의 강한 신앙 덕택으로 그 세력이 점점 커진 八坂神社는 무로마찌 시대( 조선시대 초기)에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성대한 축제로 발전하였다. 그때 만들어 진 미코시가 일본 마쓰리의 형식에 많은 영향을 주어 전국에서 행해지는 마쓰리에 거의 미코시를 사용하기도 한다. 기온마쓰리에 쓰이는 미코시는 두 개로 나누인다.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주를 모신 가마를 야마(山)라고 하고 신의 신령이 깃들인 우뚝 솟은 신목(神木)을 모신 것을 호코라고 하는데, 모두 20개가 넘는 야마와 호코가 지역 사람들에 의해 어깨에 매달려 져 시내를 행진한다 . 이 행진이 마쓰리의 하이라이트로 7월 17일이다. 그리고도 7월 말일까지 신을 향한 경건한 행사가 계속된다.
쿄토를 더욱 뜨겁게 달구는 이행사가 끝나고 8월16일의 오산오쿠리(五山送리화)가 지나가면 여름이 끝난다던가.......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축제 첫날 오후의 八坂神社는 한가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붉게 단장한 서루문(西樓門)을 나서 우리 부부는 기온의 골목 골목을 기웃거렸다. 일본 남성들, 아니 남자라면 한번 쯤 가 보고 싶은 고급 술집이 즐비해 있는 곳. 얼굴에 하얀 칠을 하고 화려한 기모노로 단장한 마이코(舞子)들이 굽이 높은 목신을 신고 간드러지게 걸어 가는 모습이 보일만도 한데 안 보인다. 조금 전 淸水寺에서는 만났었는데.....
쿄토답게 꾸며 진 술집들의 겉모습에 눈을 주면서 나는 멀리 멀리 과거로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어느 곳인가! 옛날 옛날 그 옛날 고구려 인들이 살았던 곳, 八坂鄕.
미로처럼 생긴 어는 골목에서 조상들이 불쑥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착각속에서의 순간들이었다.
9세기가 되면 이근처에 백제인 타무라마로가 淸水寺를 세웠고 또 이웃에는 또 신라계인 하타씨와 관련이 있는 金剛寺도 있다.
이쯤되면 가장 일본적인 전통을 지켜 왔다는 쿄토의 원 주인의 후예들은 아픈 가슴을 쓸어 내릴 수 밖에 없다. 신이 되어 쿄토를 지키고 계시는 조상님들이여! 부디 영원하소서.
<2009년7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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