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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미즈테라(凊水寺)와 백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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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7-02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9,7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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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통신> - 13

키요미즈테라(凊水寺)와 백제인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이 글을 읽는 분이 쿄토를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어느곳을 가보고 싶을까?

1200여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도(古都)를 찾아 왔으니 가장 먼저 가 보고 싶은 곳은 역시 유서깊은 절이 아닐런지? 절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많은 절 중에서도 쿄토의 관광명소 키요미즈테라(淸水寺)는 빠질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절도 우리 조상과 관련이 있다고?  나는 오늘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찾아 보고자 한다. 

8세기 말, 사카노우에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라는 유명한 헤이안시대의 장군이 임신한 부인의 안산(安産)을 위해 오토와야마(音羽山)에 올라 사슴을 찾고 있었다. 생 사슴 피가 임신부에게 좋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였다. 산을 헤매고 있는 도중에 수행중인 한 승려(엔찐, 延鎭)와 만났는데 사카노우에의 말을 들은 이 승려는 “살생을 하는 대신 관세음보살에 빌어라” 라고 하였다. 통 성명을 하고 보니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 의기 투합한 두사람은 音羽산 폭포 근처에 금빛 찬란한 본존 십일면천수관음상을 모신 불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淸水寺의 시작이었다. (<淸水寺緣起繪卷>에 기록되어 있음)

헤이안시대 이후 영험있는 관음상으로 소문이 난 이 절은 귀족, 서민들의 두꺼운 신앙심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사계절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쿄토 최대의 명소가 되었다. 매년 12월이 되면 “올해의 한자”를 발표하는 절이기도 하여 우리 신문에 소개될 때 마다 절묘한 글자 선택에 “과연...!” 하고 찬사를 보냈던 행사가 진행되는  곳이다. (아마도 올해 부터는 연래행사가 바뀔런지도 ......)

일본사람들은 “淸水의 무대에서 뛰어 내린다”는 속담을 많이 사용한다.  본당에 설치된 무대가 일본의 전통 건축에서 꼽히는 물건인데 지상에서 12미터가 되는 단애(斷崖)위에 개방된 무대를 만들고 그 무게를  나무에 구멍을 뚫어 종횡(縱橫)으로 고정시켜 지탱케 한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어 쿄토의 절 건물중의 명물로 꼽힌다. 그곳에서 밑을 내려다 보면 아슬 아슬 낭떠러지. 사람들은 새로운 결심을 할때  이 무대위에서 뛰어 내리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의지 표현으로 이 속담을 자주 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633년 작품.  몇 번의 화재로 재건될때마다 조금 씩 커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헤이안 시대에도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이 형태는 있었다.

이곳 관음상 역시 비불이다. 나라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천수관음은 33년 마다  일주일씩 공개되었으나 2000년도에는 9개월동안이나 그 모습을 드러내어 남녀노소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는데 이것이 참 묘한 것이었다. 젊은이는 일생에 몇 번 없는 기회를 잃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나이 든 자는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찾아 온단다. 오히려 이런 방법이 중생을 관세음 보살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공개되지 않을 때는 상상의 모습에 소원을 빌며 언젠가 보이실 때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淸水型 觀音”이라는 단어를 낳은 독특한 비불 앞에서 중생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주는 마에타치(前立) 보살과 친해질 수도 있으니 위안을 받고자 하는 신앙에는 부족함이 없는 듯 하다.

키요미즈테라(淸水寺)에서는 관세음 보살님만이 힘없는 인간을 위로해 주는 게 아니었다. 벚꽃이 필 때 , 단풍이 들 때 , 17세기의 건물과 나무 사이 사이에 눈이 쌓여 있을 때, 그리고 아침 저녁의 변화를 사람들은 놓치지 않으려고 찾아 온다.  동산(東山)중턱에 옛모습 그대로 서있는 30여 건물들이 하나같이 자연 속에 녹아 있어 멀리 한눈에 바라보이는  사바세계의 시름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명품의 자연속에 명품 절이 있으니 어찌 이곳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1994년 이곳은 유네스코 문화 유산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절을 세운 주인공과 만날 차례다.

가야 출신 백제인이라고 알려진 야마토아야(東漢)씨족은  소가(蘇我)씨와 더불어 아스카에서 많은 활약을 하던 도래인들이었다. 8세기,아스카의 이마키(今來)군(후에 高市郡으로 되었다)의 주민 중에 80내지 90%는  아야씨족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일본 학자들이 많이 인용하고 있다. 몇 대에 걸쳐 관직에서 활동하던 그들 중에 드디어 걸출한 인물이 등장한다.아내의 순산을 위해 산으로 사슴 피를 얻으러 갔던 바로 그 분이다. 사카노우에노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일본 최초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칭호를 얻은 인물. 헤이안시대 칸무 천황(桓武天皇) 시절에 동북 정벌을 4번에 걸쳐 수행하여 평정했던 장군, 최고관직 大納言자리까지 올랐던 인물, (그의 딸은 칸무 천황의 후궁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국왕(嵯峨天皇)의 명령으로 죽어서까지도  국가를 지키기 위해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활을 든 자세로 에미시(蝦夷)가 살았던 방향을 지키고 서 있는 자세로 묻혔다던가.....당시 새로운 왕조를 열었던 사람들이 그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에미시는 아이누 족을 말한다. 동북 지방에 살던 그들이 홋카이도로 떠나 가기 시작한  계기가 사카노우에타무라마로의 정벌에 의해서였다니.......사카노우에타무라마로는 용맹있는 장군이었으나 마음이 큰 인정 넘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802년 마지막으로 500여명을 인솔하고 항복해 온 에미시의 수장(首長) 아테르이와 副首長 모레에게 장군은 약속을 했다. 편안한 삶을 살게 해 주겠노라고..  그러나 칸무천황과 귀족들은 그들을 카와치(河內,大阪의 동쪽)에서 무참히 살해했고 타무라마로는 그들이 마지막까지 항쟁했던 岩手縣平泉에 있는 達谷窟에 청수사를 모방한 절(毘沙門堂)을 세워 적장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일본 전통 연극인  能과 狂言의 대부분은 청수사의 관음보살의 음덕으로 인간이 구제 받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그중 “田村” 이라는 작품은 바로 타무라마로가 전쟁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관음보살의  가호였다고 술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 처럼 그의 무용담과 청수사의 불상들에 관한 일화들은 전설이 되어 일본인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그가 한반도에서 건너 온 도래인이라는  사실은 정말 정말 모른다.

그분이 키요미즈테라(청수사)를 세운 것이다.  같은 타케치 출신 도래인 승려 엔찐(延鎭)과 함께....그가 첫 번째 정벌에 성공하고 2차 정벌을 위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된 이듬 해인 798년, 부인을 위한 정성과 함께 동북 정벌의 성공을 관음보살의 공덕으로 돌려 절을 세웠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였다. 본당 앞의 開山堂(田村堂이라고도 한다)에는 사카노우에타무라마로 부부와 승려 엔찐을 모셔 놓았다.

그리고 천도 1200년이 되던 해인 1994년에는  칸사이 지방에서 활동하는 동북지방인들이  경내에 “호쿠텐노유(北天之雄)”라는 아테르이(阿弖流爲)와 모레(母禮)를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청수사의 언덕을 오른 7월의 여름날, 나는 오히려 開山堂과 아테르이와 모레의 비 앞에서 마음의 시간을 더 오래 보냈다.  헤이안 시대 초창기, 비록 조국은 아니었으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매진했던 조상의 환영이 보이는 듯해서였다.

이곳에는 불상들 못지 않게 참배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년중 사람들의 줄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오토와의 타키(音羽의 滝)”라고 불리우는 폭포수 앞이다.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며 이물을 받아 마신다. 세갈래로 갈라져 떨어지는 이물에는 갈래마다 비는 소원이 다르다. 폭포수 앞에서 컵을 팔고 있는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갈래마다 비는 내용이 정해져 있나요?”

“자기 마음 속으로 원하는 걸 빌면 됩니다.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워낙은 불교의 3寶(佛, 法, 僧)혹은 인간의 행동, 말, 마음의 3業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는데 관광객들은 건강, 장수, 학업 성취 혹은 좋은 만남을 빌며 마신다. 

“淸水”라는 절 이름은 이 폭포(옛날에는 폭포였겠으나 현재에는 산에서 흐르는 물을 셋으로 나누어 머리위에서 떨어지게 만들어 놓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청수사에서 내려 오는 길, 인왕문을 나서면 쿄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어 관광객들의 발을 멈추게 한다. 에도시대,메이지 시대부터 있었다는 옛 전통 건축들은 일본의 유명한 인물들이 머물렀다는 역사를 내 세우며 음식과 토산품들을 팔고 있다.

二年坂,혹은 三年坂 등 듣기만 해도 전설이 깃들어 있는 듯한 이름을 가진 골목 골목의 고풍어린 집들은 세월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에도막부 말기에 활약한 사카모토료마(坂本龍馬)가 머물렀다는 明保野亭은  차, 두부 요리와 토산물을 파는 가게였는데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머금고 있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도자기 시장.

키요미즈야키 (淸水燒)는 바로 이곳을 발상지로 하고 있다.  적당한 언덕이 있어 가마를 만드는 최적지로 활용되었던 곳이 현재는 도자기를 파는 가게들로 변모했다. 196-70년대 이후 대기오염姸嗤?위해  가마의 불이 꺼졌기 때문이다. 매년 8월 7일에서 10일까지 五條坂에서는  전국의 도자기 상들이 모여 들어 노점을 펼친다. 이날들은 淸水寺의 관세음보살의 대공덕일인 8월 9일 10일과 겹쳐 그야 말로 대 성황을 이룬다는데  올해는 유감스럽게도 기회가 없구나.......7월 ,8월은 쿄토 관광이 최정점을 이루는 때이다. 7월 중순의 기온(祗園)마쓰리, 8월에 행해지는 淸水寺의 “千日 詣り”, 8월 16일의 五山 오쿠리(五山送り)는 전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일본문화 연구가들이 몰려 드는 시기. 습기 가득 머금은 30도 이상의 폭염을 견디며 관광하는 사람들 또한 쿄토의 명물이 된다. 

하루의 淸水寺 참배로 1000일의 공덕이 쌓이는 관음보살의 음덕을  받아 한껏 행복해 진 사람들이 도자기 노점들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8월 9,10,14, 15, 16일이 해당일) 그리고 이 절을 찾을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고 1870년에 창업했다는 키요미즈야키(淸水燒) 전문점인 “朝日堂”을 찾아 보라. 이곳에서 조상들에게 전수 받은 도자기 기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구어 지고 있는 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1655년경 창업하여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七味屋本舖. 직접 밭에서 경작하여 팔고 있다니 그것 또한 이미 떠나 간 옛쿄토인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기념으로 산초 가루를 하나 샀다. 350엔이던가.......

17세기에 지어 진 절 건물들,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를 간직한 고색 창연한 주변의 골목과 상점들. 도래인들이 창건한 문화는 쿄토를 이렇게 살 찌우며 키우고 있는데,

우리는 ,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고 있는가? 야사카 진쟈( 八坂神社)를 찾아 가는 발걸음은 비가 내리는 속에서도  청수사 언덕을 뒤돌아 보고 싶어 빨라 질 수가 없었다.

                                    <2009/07/01>

                                                        <2009년 7일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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