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쿄의 淺草寺와 渡來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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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6-23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9,77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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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통신>-12
토쿄의 센소지(淺草寺)와 도래인(渡來人)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쿄토에 살면서 처음으로 하는 토쿄 나들이었다. 남편의 토쿄강연이 별 탈 없이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찼던 6월 6일이 무사히 지나갔다. 아사히 빌딩 11층에서 일본어로 하는 행사여서 서툴은 외국어가 몹시 걸렸으나 600여명의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 주었다. 큰 숙제를 마치자 마음속으로만 계획했던 센소지(淺草寺)방문을 실천에 옮겼다.
6월 7일 아침 나절 , 전철을 갈아 타고 찾아 간 그곳은 여전히 토쿄관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유명한 명소였다. 사실 이 절은 벌써 세 번째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단지 관광지로 유명한 곳을 찾아 올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렇게 다르구나 ......
칸사이(關西) 지방에서의 도래인의 일본 개척에 빠져 있었던 몇 개월 동안 읽은 책들은 우리 조상들이 칸토(關東)에서도 대단한 활동을 했음을 알려 주었다. 옛날 8세기에 세워 졌던 무사시노구니(武藏國)는 지금의 東京都,埼玉縣, 橫浜까지 아울렀던 곳인데 그곳에는 많은 백제 신라 고구려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고 고려군, 신라군 등이 설치되었었다고 한다. 더욱이 '무사시'(武藏)라는 말이 우리 '모시씨'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일본 학자(鳥居龍藏)의 학설이 있다는 것 등, 많은 것을 읽고 나면 일본의 수도 토쿄 역시 그 시작은 우리 조상들과 깊은 관련, 아니 조상들에 의해 개척된 신천지였음을 알게 된다. 토쿄는 일찍이 고구려인들이 건너 와 살았음을 알려 주는 유적이 많이 있다. 2차대전 후까지 고려군 고려촌이 있었고 (지금은 지역 합병에 의해 入間郡 日高町으로 되어 있다) 고려 신사 고려 역,고구려를 뜻하는 코마 신사 등 고구려와 관계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려 신사에는 지금도 고려라는 姓을 가진 宮司가 대대로 신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칸토 지방은 고대에는 변방에 불과 했다. 당시의 변방까지도 장악했던 조상들은 고구려인들 만은 아니었다. 백제인 신라인들도 이 지역의 주인공들이었다.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센소지(淺草寺)는 고대 칸사이 지방을 개척한 조상들이 칸토지방까지도 밀고 올라가 새로운 문화의 터전을 일구어낸 상징물의 하나다. 토쿄에서 관광안내 책자를 찾아 보면 반나절 관광도, 하루 관광도 센소지가 빠진 안내는 없다. 일본 수도에서 가장 오래된 절, 많은 참배객들로 언제나 붐비는 곳, 유명한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곳, 에도의 주인 토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집안에서 그들의 소원을 빌었던 절, 에도 문화의 중심지, 절 경내의 상점가 나카미세(仲見世)가 일본의 명품거리가 된 곳 등 수식어가 참 많은 곳이다.
토쿄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센소지가 세워 진 것은 645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아스카절이 건축되기 시작한 것이 588년이었으니 약 50여년 뒤인 셈이다. 다음은 센소지 연기(緣起)에 기록된 내용이다.
628년 3월 18일 이른 아침, 토쿄의 대표적인 강인 스미다가와(隅田川)에서 히노쿠마노하마나리(檜前浜成)와 타케나리(竹成)형제가 어망으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고기는 안 잡히고 이상한 인형이 올라왔다. 그 인형을 강에 버리고 다시 어망을 던졌으나 몇 번이고 다시 걸려 나오는 건 그 인형이었다. 신기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동네의 학식 있는 인물인 하지노나카토모(土師中知 )에게 가져갔더니 그것이 성관세음보살상(聖觀世音菩薩像)이라고 하였다. 하지노나카토모는 그 이후 출가하여 자기집에 관음상을 모셨고 이것이 센소지의 시작이다.
그 후 쇼카이쇼닌(勝海上人)이 이곳에 와서 본당을 지은 것이 645년, 현몽(現夢)에 의해 본당에 안치된 성관음상은 비불(秘佛)이 되었고 그 이후 이 전법(傳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857년 “입당구법순례행기”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 진 자각대사 엔닌(元仁)이 다시 증축하고 비불 대신 마에타치(前立)본존을 만들어 안치했다는데, 지금도 관음당이라는 이름의 본당 안의 중앙에 화려한 장식의 2단으로 되어 있는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두 비불이 안치되어 있다. 이곳에 참배할 때는 “관세음 보살”을 정성껏 부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절에 종사하는 사람도 7세기의 비불을 본적이 없다니 현세의 누가 강가에서 건져 낸 관음상을 봤을까? 단지 약 5센티의 크기라는 전승 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엔닌이 만든 관음상은 33년만에 한번씩 공개한다고 한다. 33이라는 숫자는 관음보살과 관계 깊은 수로 3.1운동 당시의 민족 대표 33인도 여기에서 유래했으며 새해가 열리는 순간 울리는 보신각 종소리 33번도 관세음보살 신앙에서 나온 것. 모든 곳 모든 사람의 의미로 사용하는 숫자이기도 한데, 33년만에 한번씩 공개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이 삼라만상 어느 곳에도 나타나 관세음보살을 찾는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고 했으니 지상의 힘든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절은 많은 위안을 주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바로 스미다 강가에서 관음상을 건져 올린 두 어부와 그것을 집안에 모신 인물 때문이었다. 나라(奈良)의 타케치군(高市郡)에는 히노쿠마(檜隈)라는 곳이 있다 . 이곳은 도래인 역사의 출발이기도 한 곳이다. 옛 일본 이름이나 지명에 쓰이는 한자는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후대에 편의상 적당히 부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민의 80내지 90퍼센트가 같은 씨족인 이들은 백제에 병합된 가야의 하나였던 아야(安倻)계 도래인들이었다.(東漢, 야마토아야) 그들이 살았던 곳을 처음에는 이마키군이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풀면 재미 있다. 이마(今)키(來)다 . “지금 왔다”. 어디서 왔을까? 상상해 보기 바란다. 학자들은 지금 왔다면 그 전에 온 사람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들이 오기 전에 한반도에서 건너 온 사람들의 대표적인 씨족을 하타(秦)씨라고 한다.
히노쿠마씨, 즉 아야씨들은 아스카절을 세웠던 소가씨와 더불어 고대 일본에서 대활약을 했던 사람들로 일본 역사에서 종종 그이름들이 나온다. 그런데........센소지의 관음상을 건져 올린 인물이 바로 히노쿠마라는 성을 가진 형제들이었다.
그 형제가 건져 올린 인형을 관세음 보살이라고 밝힌 인물의 이름은 하지노나카토모이다. 이 성을 가진 인물들은 야마토아야(東漢)씨족과는 대립되는 호칭이기도 하여 카와치(西, 河內), 아야(漢)라고 불리웠던 백제계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5,6세기, 나라를 일본 역사의 고향으로 만들어 놓고 언제 칸토지방까지 진출했을까? 우리는 이 절의 설립 얘기를 들으며 불교의 관세음보살 신앙이 우리 백제계 조상들에 의해 칸토지역에 전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토쿄만의 조그만 어촌이었던 아사쿠사는 강가에서 건져 올려진 관음상 덕으로 매일 수만인의 참배객으로 붐비는 , 새해 첫3일 동안 참배 인구가 무려 200만 가까이 된다는, 그 뿐인가.. 전국적으로 많은 계층의 믿음의 대상이 되어 연간 3000만명이 찾아 오는 토쿄의 명소가 되었다. 이 절을 우리 조상들이 세운 것이다!
이 아사쿠사 관음상을 감득하고 모신 위의 세 분은 센소지 옆에 있는 아사쿠사(淺草)신사에 모셔져 지금도 일본인을 다스리고 있다. 현재 5월 17일과 18일 근처의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린다는 “三社祭”라는 마쓰리는 에도의 3대 마쓰리의 하나이며 아사쿠사 일대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다는데.... 바로 이 三社는 위의 세분을 일컬음이다. 혹시 여러분이 7월 9일과 10일 센소지를 방문한다면 아주 아주 재미있는 현장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4만 6천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날에 관음상에 참배하면 4만 6천일( 126년분)동안 참배한 걸로 된다는 것이다. 하루 참배로 126년분의 공덕이 쌓인다니 기회가 있으면 꼭 이날을 이용하기 바란다.
나는 이날, 전혀 공개되지 않는 비불을 모신 건물 앞에 앉아서 하나의 관음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커다란 물방울 속에서 “인자와 자비의 극치가 바로 이런 모습”임을 알려 주는 아름다운 관세음 보살의 그림. 아마도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충실했던 학생이라면 센소지라는 절 이름을 듣고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고려 승려 혜허가 그렸다는 양류관음도. 이 그림이 언제 이 절의 소장품이 되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비록 우리나라에 있지 않아서 아쉽기는 하나, 일본에서나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 내리는 고려의 불화다. 사진으로도 알려지지 않는 비불은 오히려 상상속의 관세음보살과 만나게 한다. 그리고 그 상상은 고려 불화로 구체화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오는 “나무아미관세음보살” 그것은 고려 불화에게 바치는 기도였다.
관음전을 나와 나카미세(仲見世)길을 걸어 본다. 300여미터에 걸쳐 150여개의 점포가 즐비해 있다. 그 중에는 에도시대부터의 가게도 남아 있다. 18세기에 만들어 진 약 500여점의 문양을 가진 수건 가게, 19세기 초에 시작한 요리 집 등... 종류도 다양한 이 가게들은 센소지의 총문인 뇌문(雷門)안에 있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볼거리였다. 절 경내에 가게들이 즐비해 있다니! 아사쿠사는 센소지의 또 하나의 이름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센소지의 특색이 현대인들에게 더욱 더 이절을 찾아 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이렇게 신앙마져도 상품으로 특화 시켜 성공하고 있었다.
아사쿠사 관세음 보살님은 지금도 이렇게 중생들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구나.........
<2009/06/20>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51147945
토쿄의 센소지(淺草寺)와 도래인(渡來人)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쿄토에 살면서 처음으로 하는 토쿄 나들이었다. 남편의 토쿄강연이 별 탈 없이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찼던 6월 6일이 무사히 지나갔다. 아사히 빌딩 11층에서 일본어로 하는 행사여서 서툴은 외국어가 몹시 걸렸으나 600여명의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 주었다. 큰 숙제를 마치자 마음속으로만 계획했던 센소지(淺草寺)방문을 실천에 옮겼다.
6월 7일 아침 나절 , 전철을 갈아 타고 찾아 간 그곳은 여전히 토쿄관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유명한 명소였다. 사실 이 절은 벌써 세 번째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단지 관광지로 유명한 곳을 찾아 올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렇게 다르구나 ......
칸사이(關西) 지방에서의 도래인의 일본 개척에 빠져 있었던 몇 개월 동안 읽은 책들은 우리 조상들이 칸토(關東)에서도 대단한 활동을 했음을 알려 주었다. 옛날 8세기에 세워 졌던 무사시노구니(武藏國)는 지금의 東京都,埼玉縣, 橫浜까지 아울렀던 곳인데 그곳에는 많은 백제 신라 고구려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고 고려군, 신라군 등이 설치되었었다고 한다. 더욱이 '무사시'(武藏)라는 말이 우리 '모시씨'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일본 학자(鳥居龍藏)의 학설이 있다는 것 등, 많은 것을 읽고 나면 일본의 수도 토쿄 역시 그 시작은 우리 조상들과 깊은 관련, 아니 조상들에 의해 개척된 신천지였음을 알게 된다. 토쿄는 일찍이 고구려인들이 건너 와 살았음을 알려 주는 유적이 많이 있다. 2차대전 후까지 고려군 고려촌이 있었고 (지금은 지역 합병에 의해 入間郡 日高町으로 되어 있다) 고려 신사 고려 역,고구려를 뜻하는 코마 신사 등 고구려와 관계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려 신사에는 지금도 고려라는 姓을 가진 宮司가 대대로 신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칸토 지방은 고대에는 변방에 불과 했다. 당시의 변방까지도 장악했던 조상들은 고구려인들 만은 아니었다. 백제인 신라인들도 이 지역의 주인공들이었다.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센소지(淺草寺)는 고대 칸사이 지방을 개척한 조상들이 칸토지방까지도 밀고 올라가 새로운 문화의 터전을 일구어낸 상징물의 하나다. 토쿄에서 관광안내 책자를 찾아 보면 반나절 관광도, 하루 관광도 센소지가 빠진 안내는 없다. 일본 수도에서 가장 오래된 절, 많은 참배객들로 언제나 붐비는 곳, 유명한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곳, 에도의 주인 토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집안에서 그들의 소원을 빌었던 절, 에도 문화의 중심지, 절 경내의 상점가 나카미세(仲見世)가 일본의 명품거리가 된 곳 등 수식어가 참 많은 곳이다.
토쿄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센소지가 세워 진 것은 645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아스카절이 건축되기 시작한 것이 588년이었으니 약 50여년 뒤인 셈이다. 다음은 센소지 연기(緣起)에 기록된 내용이다.
628년 3월 18일 이른 아침, 토쿄의 대표적인 강인 스미다가와(隅田川)에서 히노쿠마노하마나리(檜前浜成)와 타케나리(竹成)형제가 어망으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고기는 안 잡히고 이상한 인형이 올라왔다. 그 인형을 강에 버리고 다시 어망을 던졌으나 몇 번이고 다시 걸려 나오는 건 그 인형이었다. 신기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동네의 학식 있는 인물인 하지노나카토모(土師中知 )에게 가져갔더니 그것이 성관세음보살상(聖觀世音菩薩像)이라고 하였다. 하지노나카토모는 그 이후 출가하여 자기집에 관음상을 모셨고 이것이 센소지의 시작이다.
그 후 쇼카이쇼닌(勝海上人)이 이곳에 와서 본당을 지은 것이 645년, 현몽(現夢)에 의해 본당에 안치된 성관음상은 비불(秘佛)이 되었고 그 이후 이 전법(傳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857년 “입당구법순례행기”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 진 자각대사 엔닌(元仁)이 다시 증축하고 비불 대신 마에타치(前立)본존을 만들어 안치했다는데, 지금도 관음당이라는 이름의 본당 안의 중앙에 화려한 장식의 2단으로 되어 있는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두 비불이 안치되어 있다. 이곳에 참배할 때는 “관세음 보살”을 정성껏 부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절에 종사하는 사람도 7세기의 비불을 본적이 없다니 현세의 누가 강가에서 건져 낸 관음상을 봤을까? 단지 약 5센티의 크기라는 전승 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엔닌이 만든 관음상은 33년만에 한번씩 공개한다고 한다. 33이라는 숫자는 관음보살과 관계 깊은 수로 3.1운동 당시의 민족 대표 33인도 여기에서 유래했으며 새해가 열리는 순간 울리는 보신각 종소리 33번도 관세음보살 신앙에서 나온 것. 모든 곳 모든 사람의 의미로 사용하는 숫자이기도 한데, 33년만에 한번씩 공개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이 삼라만상 어느 곳에도 나타나 관세음보살을 찾는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고 했으니 지상의 힘든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절은 많은 위안을 주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바로 스미다 강가에서 관음상을 건져 올린 두 어부와 그것을 집안에 모신 인물 때문이었다. 나라(奈良)의 타케치군(高市郡)에는 히노쿠마(檜隈)라는 곳이 있다 . 이곳은 도래인 역사의 출발이기도 한 곳이다. 옛 일본 이름이나 지명에 쓰이는 한자는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후대에 편의상 적당히 부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민의 80내지 90퍼센트가 같은 씨족인 이들은 백제에 병합된 가야의 하나였던 아야(安倻)계 도래인들이었다.(東漢, 야마토아야) 그들이 살았던 곳을 처음에는 이마키군이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풀면 재미 있다. 이마(今)키(來)다 . “지금 왔다”. 어디서 왔을까? 상상해 보기 바란다. 학자들은 지금 왔다면 그 전에 온 사람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들이 오기 전에 한반도에서 건너 온 사람들의 대표적인 씨족을 하타(秦)씨라고 한다.
히노쿠마씨, 즉 아야씨들은 아스카절을 세웠던 소가씨와 더불어 고대 일본에서 대활약을 했던 사람들로 일본 역사에서 종종 그이름들이 나온다. 그런데........센소지의 관음상을 건져 올린 인물이 바로 히노쿠마라는 성을 가진 형제들이었다.
그 형제가 건져 올린 인형을 관세음 보살이라고 밝힌 인물의 이름은 하지노나카토모이다. 이 성을 가진 인물들은 야마토아야(東漢)씨족과는 대립되는 호칭이기도 하여 카와치(西, 河內), 아야(漢)라고 불리웠던 백제계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5,6세기, 나라를 일본 역사의 고향으로 만들어 놓고 언제 칸토지방까지 진출했을까? 우리는 이 절의 설립 얘기를 들으며 불교의 관세음보살 신앙이 우리 백제계 조상들에 의해 칸토지역에 전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토쿄만의 조그만 어촌이었던 아사쿠사는 강가에서 건져 올려진 관음상 덕으로 매일 수만인의 참배객으로 붐비는 , 새해 첫3일 동안 참배 인구가 무려 200만 가까이 된다는, 그 뿐인가.. 전국적으로 많은 계층의 믿음의 대상이 되어 연간 3000만명이 찾아 오는 토쿄의 명소가 되었다. 이 절을 우리 조상들이 세운 것이다!
이 아사쿠사 관음상을 감득하고 모신 위의 세 분은 센소지 옆에 있는 아사쿠사(淺草)신사에 모셔져 지금도 일본인을 다스리고 있다. 현재 5월 17일과 18일 근처의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린다는 “三社祭”라는 마쓰리는 에도의 3대 마쓰리의 하나이며 아사쿠사 일대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다는데.... 바로 이 三社는 위의 세분을 일컬음이다. 혹시 여러분이 7월 9일과 10일 센소지를 방문한다면 아주 아주 재미있는 현장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4만 6천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날에 관음상에 참배하면 4만 6천일( 126년분)동안 참배한 걸로 된다는 것이다. 하루 참배로 126년분의 공덕이 쌓인다니 기회가 있으면 꼭 이날을 이용하기 바란다.
나는 이날, 전혀 공개되지 않는 비불을 모신 건물 앞에 앉아서 하나의 관음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커다란 물방울 속에서 “인자와 자비의 극치가 바로 이런 모습”임을 알려 주는 아름다운 관세음 보살의 그림. 아마도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충실했던 학생이라면 센소지라는 절 이름을 듣고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고려 승려 혜허가 그렸다는 양류관음도. 이 그림이 언제 이 절의 소장품이 되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비록 우리나라에 있지 않아서 아쉽기는 하나, 일본에서나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 내리는 고려의 불화다. 사진으로도 알려지지 않는 비불은 오히려 상상속의 관세음보살과 만나게 한다. 그리고 그 상상은 고려 불화로 구체화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오는 “나무아미관세음보살” 그것은 고려 불화에게 바치는 기도였다.
관음전을 나와 나카미세(仲見世)길을 걸어 본다. 300여미터에 걸쳐 150여개의 점포가 즐비해 있다. 그 중에는 에도시대부터의 가게도 남아 있다. 18세기에 만들어 진 약 500여점의 문양을 가진 수건 가게, 19세기 초에 시작한 요리 집 등... 종류도 다양한 이 가게들은 센소지의 총문인 뇌문(雷門)안에 있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볼거리였다. 절 경내에 가게들이 즐비해 있다니! 아사쿠사는 센소지의 또 하나의 이름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센소지의 특색이 현대인들에게 더욱 더 이절을 찾아 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이렇게 신앙마져도 상품으로 특화 시켜 성공하고 있었다.
아사쿠사 관세음 보살님은 지금도 이렇게 중생들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구나.........
<2009/06/20>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51147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