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묵화의 산실 쇼쿄쿠지(相國寺)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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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5-01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9,587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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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통신>-7
일본 수묵화의 산실 쇼쿄쿠지(相國寺)를 찾아서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4월 22일 수요일 오전 11시경 , 나는 쇼쿄쿠지 죠우텐카쿠(相國寺 承天閣)미술관에 있었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잘 가꾸어진 정원의 한 가운데에 쌍 사자 석등이 있어 사진을 찍었다. 어! 여기에도 쌍사자 석등이 있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의 사자 조각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부족했으나 그러나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바치고 있는 모습은 똑 같았다.
<국보제5호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석등>
<일본 쿄토 쇼쿄쿠지(相國寺)에 있는 쌍사자석두>
이 절은 일본 수묵화의 대가, 셋슈(雪舟)가 오래 동안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렸던 곳이다. 내가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수묵 산수화가 셋슈의 활동 무대였다는 것만으로도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출신 화가들이 활동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다.
마침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 차도의 완성자라던가... 센노리큐(千利休)의 차 도구도 많이 진열되어 있었고 고려 청자의 향합, 그리고 조선의 막사발인 이도 자완(井戶茶碗)도 있었고 셋슈, 슈분의 그림 등도 나와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들이 굉장한 애정을 갖고 흠모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고대에 조상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난 에너지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주었다는 걸 우리는 안다. 나라시대는 물론, 가장 일본적인 문화가 싹텄다는 헤이안(平安)시대까지도 조상들은 스승이었고 권력자였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문화와 일본과의 관련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겨우 왜구와 임진왜란 정도가 아닐까... 그러면서 우리는 고려 불화가 일본에 왜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15세기의 일본에 갑자기 수준 높은 수묵화가 어떤 배경으로 나타났는지... ? 등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 한다. 바로 이 의문을 풀어 볼 수 있는 실마리, 이절은 그 중 하나의 열쇠다.
쇼쿄쿠지는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에 무로마찌막부(室町幕府)의 제 3대 장군인 아시카가요시미쓰(足利義滿)가 세웠으며 임제종 상국사파의 대 본산이라고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쿄토를 방문하면 어김없이 찾아 가는 금각사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40세에 장군 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키타야마(北山)산장을 지어 그곳에서 11년간 살면서 그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삼았던 곳인데 그의 유언에 의하여 쇼쿄쿠지(相國寺)파(派) 선찰(禪刹)로 만들어 이름을 鹿苑寺라 하였으나 지금은 사리전(舍利殿)이었던 금각만을 복원하여 金閣寺로 불리운다. 이 금각사에 조선의 사신들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세계문화 유산을 바라보는 눈이 아닌 또 다른 시선이 그 절을 따라 가게 된다.
역시 요시미쓰의 손자에 의해 지어 진 銀閣寺도 이 쇼쿄쿠지(相國寺)파의 절이다. 쇼쿄쿠지를 찾아 가던 날 나는 먼저 은각사 옆 ‘철학의 길’(哲學의 道)을 걸어 봤다. 봄 냄새 물씬한 이 길은 신록과 온갖 꽃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길 오른쪽으로 흐르는 냇가에 한가롭게 놀고 있는 커다란 잉어. 양 옆으로 줄 지어 늘어 선 주택들. 일본인들은 참 대단하다. 어쩌면 이 길을 이렇게 잘 보존하고 있는지... 차도 다닐 수 없는 이 동네를 이렇게 잘 유지하고 있다니... 그것이 부럽다.
무로마찌 시대, 조선과의 사신 왕래가 대단히 활발하여 일본에서 조선에 60회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하며 조선에서도 사신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그 때 쇼쿄쿠지는 외교부 역할을 하였다. 그 절에 셋슈의 스승인 슈분(周文)이 있었고 슈분의 스승인 조세쓰(如拙)도 있었다 는데 셋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존 카터 코벨은 조세쓰를 조선인이라고 주장한다.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다’(일본의 妙心寺에 소장되어 있다)라는 묵화 한 장으로 유명하다는 조세쓰를 崇儒抑佛策의 조선에서 건너온 승려 화가로 단정하면서 그를 일본 수묵화의 대가들인 슈분과 셋슈의 스승이며 시조로 본다. 그 그림에는 31명의 승려들이 찬을 달았는데 하나같이 '새로운 형식'의 그림이라고 했고 그 그림에서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는 어부는 한국의 도롱이를 걸치고 있다는데...
요시미쓰 장군은 조세쓰에게 쇼쿄쿠지의 탑을 세우는 일을 맡겼다고 하여 나는 그 탑이 혹시 남아 있는 가 해서 이절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탑은 없었다. 전시관의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그전에 아주 훌륭한 7층 목탑이 있었으나 불타 버홱鳴?한다. 아쉬워라...
그러나 전혀 생각지 않았던 수확이 있었다. 전시관과 전시관의 사이, 크지 않은 대나무로 단아하게 꾸며진 중정에 고려 석등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細竹들은 혹시라도 고려에서 온 진귀한 석등을 가릴세라 겸손하게 몸을 사리고 있었다.
475년간 고려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일구었던 승려들의 후예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그 시대 최고의 지식인들인 승려들이 조선에서 살아 날 수 없을 때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4세기에서 7세기, 한반도가 전운에 감돌아 있던 시기에 많은 조상들은 일본으로 건너 와 그들의 살 길을 찾아냈었다. 고려 말의 지식인들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코벨은 일본 수묵화 시대를 연 15세기의 화가 중에서 많은 사람을 조선인으로 구분한다.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다’를 그린 한국 발음으로 여졸인 조세쓰, 일본에 남아 있는 묵죽 화첩의 주인공 이수문 , 유마거사도의 문청 등 등.
이 분들 말고도 쇼쿄쿠지를 중심으로 한 선 사찰에서 후원을 받아 활동한 승려 화가들의 그림과 15세기 조선의 그림들이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데 우리는 이것을 증명해 낼 수 없단 말인가? 억불정책의 현실 앞에서 조국을 떠나 간 승려 화가들이 진정으로 15세기 일본의 예술을 살찌운 인물들이라면 우리는 그분들의 국적을 찾아 주어야 하지 않을 까?
쇼쿄쿠지는 무로마찌 시대를 정착시킨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일본 왕의 궁전인 고쇼(御所)근처의 144만평땅에 세운 임제종 대 본산으로 당시의 위력은 정치적으로도 대단했다고 하나 지금은 4만평의 부지를 유지하고 있는 절이다. 쿄토의 사립대학인 동지사대학의 터도 이절이 주인이었다고 하는데 담을 같이 하고 있는 대학 켐퍼스에서 찍은 윤동주의 시비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기로 한다.
쇼코쿠지가 쿄토의 다른 절에 비해 덜 알려 진 이유를 전문가들은 두가지로 보고 있었다. 하나는 기록이 없다는 것, 또 하나는 문화재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러면서 그들은 수없는 전란에 휩싸여 몇 번이나 불타 버린 역사를 되 짚곤 한다. 이절은 일곱 번이나 불이 난 역사가 있다.
그런데,정치적 비호를 받으며 번영과 영광을 누렸던 쇼코쿠지가 정적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조선 초기 일본의 외교부 역할을 담당했고, 또 조선에서 건너 온 승려 화가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는 이곳이 화난을 피할 수 있었다면 ?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수묵화속에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고려 말 승려들의 고국을 떠난 슬프고도 슬픈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고려를 죽인 승자(勝者), 조선의 역사에서 우리들은 고려의 지식계급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일본에 와서 살아 남은 우리의 문화재들속에서 그 편린이나마 찾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쇼코쿠지가 불 타 버린 것이 더할 수 없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실증할 수 없는 역사는 전설이 되어 우리의 상상을 키운다. 누가 이 것을 소설로라도 쓰지 않겠는가?
조선의 시작과 더불어 활발한 교류를 했던 일본의 무로마찌 시대의 상징, 쇼코쿠지, 금각사 은각사를 둘러 보며 나는 475년간 찬란한 불교문화의 주인공 고려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최근 고대 일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외국인이나 일본인이거나를 막론하고 한국의 문화에 관심이 깊다. 교토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일본의 문화를 연구하는 외국인들이 한국 어 공부, 한국 예술등, 대단히 넓은 폭으로 우리 문화를 공부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깊이 있는 일본문화를 알고자 할수록 한국과의 관련을 모르고서는 넘어 설 수 없는 다리가 있다는 걸 깨달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009/04/22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46513417
일본 수묵화의 산실 쇼쿄쿠지(相國寺)를 찾아서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4월 22일 수요일 오전 11시경 , 나는 쇼쿄쿠지 죠우텐카쿠(相國寺 承天閣)미술관에 있었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잘 가꾸어진 정원의 한 가운데에 쌍 사자 석등이 있어 사진을 찍었다. 어! 여기에도 쌍사자 석등이 있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의 사자 조각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부족했으나 그러나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바치고 있는 모습은 똑 같았다.
<국보제5호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석등>
<일본 쿄토 쇼쿄쿠지(相國寺)에 있는 쌍사자석두>
이 절은 일본 수묵화의 대가, 셋슈(雪舟)가 오래 동안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렸던 곳이다. 내가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수묵 산수화가 셋슈의 활동 무대였다는 것만으로도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출신 화가들이 활동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다.
마침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 차도의 완성자라던가... 센노리큐(千利休)의 차 도구도 많이 진열되어 있었고 고려 청자의 향합, 그리고 조선의 막사발인 이도 자완(井戶茶碗)도 있었고 셋슈, 슈분의 그림 등도 나와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들이 굉장한 애정을 갖고 흠모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고대에 조상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난 에너지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주었다는 걸 우리는 안다. 나라시대는 물론, 가장 일본적인 문화가 싹텄다는 헤이안(平安)시대까지도 조상들은 스승이었고 권력자였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문화와 일본과의 관련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겨우 왜구와 임진왜란 정도가 아닐까... 그러면서 우리는 고려 불화가 일본에 왜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15세기의 일본에 갑자기 수준 높은 수묵화가 어떤 배경으로 나타났는지... ? 등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 한다. 바로 이 의문을 풀어 볼 수 있는 실마리, 이절은 그 중 하나의 열쇠다.
쇼쿄쿠지는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에 무로마찌막부(室町幕府)의 제 3대 장군인 아시카가요시미쓰(足利義滿)가 세웠으며 임제종 상국사파의 대 본산이라고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쿄토를 방문하면 어김없이 찾아 가는 금각사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40세에 장군 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키타야마(北山)산장을 지어 그곳에서 11년간 살면서 그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삼았던 곳인데 그의 유언에 의하여 쇼쿄쿠지(相國寺)파(派) 선찰(禪刹)로 만들어 이름을 鹿苑寺라 하였으나 지금은 사리전(舍利殿)이었던 금각만을 복원하여 金閣寺로 불리운다. 이 금각사에 조선의 사신들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세계문화 유산을 바라보는 눈이 아닌 또 다른 시선이 그 절을 따라 가게 된다.
역시 요시미쓰의 손자에 의해 지어 진 銀閣寺도 이 쇼쿄쿠지(相國寺)파의 절이다. 쇼쿄쿠지를 찾아 가던 날 나는 먼저 은각사 옆 ‘철학의 길’(哲學의 道)을 걸어 봤다. 봄 냄새 물씬한 이 길은 신록과 온갖 꽃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길 오른쪽으로 흐르는 냇가에 한가롭게 놀고 있는 커다란 잉어. 양 옆으로 줄 지어 늘어 선 주택들. 일본인들은 참 대단하다. 어쩌면 이 길을 이렇게 잘 보존하고 있는지... 차도 다닐 수 없는 이 동네를 이렇게 잘 유지하고 있다니... 그것이 부럽다.
무로마찌 시대, 조선과의 사신 왕래가 대단히 활발하여 일본에서 조선에 60회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하며 조선에서도 사신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그 때 쇼쿄쿠지는 외교부 역할을 하였다. 그 절에 셋슈의 스승인 슈분(周文)이 있었고 슈분의 스승인 조세쓰(如拙)도 있었다 는데 셋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존 카터 코벨은 조세쓰를 조선인이라고 주장한다.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다’(일본의 妙心寺에 소장되어 있다)라는 묵화 한 장으로 유명하다는 조세쓰를 崇儒抑佛策의 조선에서 건너온 승려 화가로 단정하면서 그를 일본 수묵화의 대가들인 슈분과 셋슈의 스승이며 시조로 본다. 그 그림에는 31명의 승려들이 찬을 달았는데 하나같이 '새로운 형식'의 그림이라고 했고 그 그림에서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는 어부는 한국의 도롱이를 걸치고 있다는데...
요시미쓰 장군은 조세쓰에게 쇼쿄쿠지의 탑을 세우는 일을 맡겼다고 하여 나는 그 탑이 혹시 남아 있는 가 해서 이절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탑은 없었다. 전시관의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그전에 아주 훌륭한 7층 목탑이 있었으나 불타 버홱鳴?한다. 아쉬워라...
그러나 전혀 생각지 않았던 수확이 있었다. 전시관과 전시관의 사이, 크지 않은 대나무로 단아하게 꾸며진 중정에 고려 석등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細竹들은 혹시라도 고려에서 온 진귀한 석등을 가릴세라 겸손하게 몸을 사리고 있었다.
475년간 고려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일구었던 승려들의 후예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그 시대 최고의 지식인들인 승려들이 조선에서 살아 날 수 없을 때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4세기에서 7세기, 한반도가 전운에 감돌아 있던 시기에 많은 조상들은 일본으로 건너 와 그들의 살 길을 찾아냈었다. 고려 말의 지식인들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코벨은 일본 수묵화 시대를 연 15세기의 화가 중에서 많은 사람을 조선인으로 구분한다.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다’를 그린 한국 발음으로 여졸인 조세쓰, 일본에 남아 있는 묵죽 화첩의 주인공 이수문 , 유마거사도의 문청 등 등.
이 분들 말고도 쇼쿄쿠지를 중심으로 한 선 사찰에서 후원을 받아 활동한 승려 화가들의 그림과 15세기 조선의 그림들이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데 우리는 이것을 증명해 낼 수 없단 말인가? 억불정책의 현실 앞에서 조국을 떠나 간 승려 화가들이 진정으로 15세기 일본의 예술을 살찌운 인물들이라면 우리는 그분들의 국적을 찾아 주어야 하지 않을 까?
쇼쿄쿠지는 무로마찌 시대를 정착시킨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일본 왕의 궁전인 고쇼(御所)근처의 144만평땅에 세운 임제종 대 본산으로 당시의 위력은 정치적으로도 대단했다고 하나 지금은 4만평의 부지를 유지하고 있는 절이다. 쿄토의 사립대학인 동지사대학의 터도 이절이 주인이었다고 하는데 담을 같이 하고 있는 대학 켐퍼스에서 찍은 윤동주의 시비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기로 한다.
쇼코쿠지가 쿄토의 다른 절에 비해 덜 알려 진 이유를 전문가들은 두가지로 보고 있었다. 하나는 기록이 없다는 것, 또 하나는 문화재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러면서 그들은 수없는 전란에 휩싸여 몇 번이나 불타 버린 역사를 되 짚곤 한다. 이절은 일곱 번이나 불이 난 역사가 있다.
그런데,정치적 비호를 받으며 번영과 영광을 누렸던 쇼코쿠지가 정적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조선 초기 일본의 외교부 역할을 담당했고, 또 조선에서 건너 온 승려 화가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는 이곳이 화난을 피할 수 있었다면 ?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수묵화속에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고려 말 승려들의 고국을 떠난 슬프고도 슬픈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고려를 죽인 승자(勝者), 조선의 역사에서 우리들은 고려의 지식계급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일본에 와서 살아 남은 우리의 문화재들속에서 그 편린이나마 찾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쇼코쿠지가 불 타 버린 것이 더할 수 없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실증할 수 없는 역사는 전설이 되어 우리의 상상을 키운다. 누가 이 것을 소설로라도 쓰지 않겠는가?
조선의 시작과 더불어 활발한 교류를 했던 일본의 무로마찌 시대의 상징, 쇼코쿠지, 금각사 은각사를 둘러 보며 나는 475년간 찬란한 불교문화의 주인공 고려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최근 고대 일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외국인이나 일본인이거나를 막론하고 한국의 문화에 관심이 깊다. 교토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일본의 문화를 연구하는 외국인들이 한국 어 공부, 한국 예술등, 대단히 넓은 폭으로 우리 문화를 공부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깊이 있는 일본문화를 알고자 할수록 한국과의 관련을 모르고서는 넘어 설 수 없는 다리가 있다는 걸 깨달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009/04/22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46513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