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이(鳥居)의 만리장성- 伏見稻荷大社 (후시미이나리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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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5-01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9,35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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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통신>-6
일본을 교토를 개척한 하타(秦)씨
네번째 이야기 : 토리이(鳥居)의 만리장성
伏見稻荷大社 (후시미이나리 대사)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코류지(광륭사)와 마쓰오 대사(松尾 大社), 그리고 누에신을 모신 코노시마니이마스아마테루미타마 (木嶋 坐天照御魂)신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하타씨의 역사를 끝내려고 했다.그런데 4월 29일 후시미이나리 대사(伏見稻荷大社)를 다녀 와서 마음이 달라졌다. 역시 일문(一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었다. 후시미이나리대사는 일본 전국에 3만여개나 있는 이나리신사의 총 본산 답게 어마어마 했다. 오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뻔 했구나.
아주 아주 오랜 옛날 후시미이나리산 일대에 살고 있던 하타씨의 얘기가 <일본서기>에 다음과같이 실려 있다고 한다.
'킨메이(欽明)왕이(510~570) 어느 날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하타의 오오쓰지(大津父)라는 인물을 등용하면 반드시 천하를 훌륭히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듣고 잠을 깬 후 그런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았더니 후카쿠사(深草)에 살고 있었다. 왕이 그를 불러 대장성의 일을 맡겼더니 정치가 아주 잘 이루어졌다.'
이 얘기는 6세기에 이미 이나리 산 근처(후카쿠사는 바로 그 일대의 지명)가 하타씨의 무대였음을 알려 주는데 그 이후 200년 쯤 지나 나타나는 하타노이로코(秦伊呂巨)라는 인물에 관해서도 <風土記>(후도기)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고 한다.
‘유복한 호족인 하타씨의 동량(棟梁)인 이로코(伊呂巨)가 떡을 걸어 놓고 활을 쏘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떡에 화살이 맞는 순간 떡은 흰 새로 변해 산위로 날아갔다. 이로코(伊呂巨)가 새가 날아 간 곳을 따라 가니 그곳에 벼가 자라 이삭이 맺혀 있었다. 이로코는 신의 가르침으로 믿고 그곳에 신사를 세웠다.’
바로 그 신사가 후시미이나리 신사이고 이로코가 그 창시자이며 때는 711년이었다.
하타씨는 이미 그 이전부터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603년 하타노카와카쓰(秦河勝)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모시고 코류지(廣隆寺)를 세웠으며 701년에는 하타노토리(秦都里)가 마쓰오대사를, 10년후에는 하타노이로코(秦伊呂巨)가 후시미이나리대사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일본 역사에서는 하타노이로코를 하타노토리의 동생으로 본다.
헤이안시대 초기(814)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나오는 하타씨의 내력을 간단히 얘기하는 것이 하타씨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당시 킨키(近畿)지방에 살고 있었던 도래인(渡來人)중에 삼분의 일이 하타씨였고 그들은 여러 선진 문물을 일본에 가르쳐 주며 부를 축적했는데 그들이 일본왕(仁德王)에게 비단을 헌상하자 피부에 닿은 감촉이 따뜻하고 부드러운것에 감탄한 왕이 하타공(波多公)이라는 성(姓)을 주었고(하다=피부) 그후 웅략왕(雄略王)때에는 하타씨들이 비단을 우즈타카쿠(산처럼 많이) 헌상하여 우즈마사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일본말로 ‘우즈타카이’라는 단어는 ‘산처럼 많이’라는 뜻이다) 하타씨 세 번째 이야기에서 잠깐 소개한 우즈마사라는 지명의 유래는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이쯤되면 하타씨 세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있지 않은가.
형님은 아라시야마 근처에 마쓰오대사를 세워 왕실을 수호하도록 했고 동생은 후카쿠사에 후시미이나리대사를 세워 농사의 신을 모셨다니...
신록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4월 마지막 주일의 후시미이나리대사는 새싹과 함께 활기가 넘쳐 있었다. 그 많은 신사 중에서도 일본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신사라는 이곳은 지금은 상업번창, 사업 번성, 가내 안전, 교통안전, 예능 활동을 위한 소원을 들어 주는 신이 계신곳이 되었지만 그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시작은 농업 신이 계신 곳이었다. 기우제나 ,5곡풍성, 국가안정을 기원하는 농업 관계의 일을 주관하다가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좋은 인연이 맺어 지기를 비는 신이 추가 되고 토요토미히데요시는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의 쾌유를 이곳에서 빌었다고 하니 위력이 대단한 신사의 위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직도 4월, 6월, 10월에는 묘판 만들기, 모내기 , 벼 수확 행사가 진행되고 있기는 하나, 근래에는 인생사의 모든 것을 발원하는 만능신사로 변신에 성공한 신이 되어 여전히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 곳.
그런데, 내가 이 신사를 찾아 와 입을 딱 벌려 버린 장관은 토리이(신사 입구에 세워진 기둥문)로 이루어짅 터널이었다. 왕복 2시간 이상이 걸리는 산정상은 233미터. 그곳까지 여러갈래로 올라 가는 토리이 행렬. 봄 햇살에 빨간 색으로 빛나는 크고 작은 토리이들은 모두 다 봉납奉納)된 것이었다. 무려 1만여개, 개인이 ,혹은 회사가 , 단체가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혹은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답례로 바친 토리이들, 헤이세이(平成)21년 올해 세운 것도 눈에 띌 아니라 대부분이 쇼와(昭和)와 헤이세이 때 세워진 최근의 것들이다. 도리이를 바치는 것은 에도시대부터 내려 온 습관이라는데 아마도 오래되면 철거하는 기간이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도대체 일본인들은 가슴 속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일까? 정말로 이나리산에 모셔진 농업신의 후예들이 자기들을 지켜 준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지금도 그들은 자연 신 앞에 경건하다. 원숭이 한 마리 너구리 한 마리도 신사에 모셔지면 그 앞에 두손을 모은다. 이 부분이 지금 우리와는 너무 다르다. 정말로 조상들이 우리의 신을 다 가지고 와서 그런 것인지........허허허. 어쨌든 후시미이나리신사에서만 본 토리이 터널이었다. 다른 신사에서는 이렇게 많은 토리이를 본 일이 없다. 아마도 후시미이나리신사의 특별한 장관이 아닌 가 싶었다.
후시미이나리 대사에는 또 여우가 대접을 받고 있다.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신사 앞에 여우 두 마리가 양쪽에서 버티고 있다. 이 신사의 신사(神使)라던가... 그 여우가 기름에 튀긴 음식을 좋아한다 하여 이나리즈시가 만들어 졌다는데, 이렇게 하여 이나리즈시는 에도시대부터 가장 대중적인 일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 진 유부초밥이다. 또 유부를 넣어 만든 우동을 키쓰네(여우)우동이라고 하는 것도 이 신사에서 나온 말이다.
토리이를 따라 가며 정상으로 가는 길, 힘들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음식과 음료수를 파는 휴게소가 있어서 참배객들은 땀을 닦는다 . 이나리즈시랑 키쓰네 우동을 파는 가게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이나리신사에서 먹어 보는 이나리즈시, 엄청나게 짜고 달다. 그 주인의 하는 말“ 한국 밥 너무 맛 있었어요” 그러면 그 맛을 좀 내 보실 일이지........
도래인 집단 중 가장 먼저 일본 땅에 들어 왔으리라고 짐작되는 하타씨들은 나라에서도 대 활약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는 쿄토의 옛 이름인 야마시로국(山城國)의 호족으로 엄청 난 힘을 구사하여 드디어 쿄토를 개척해 일본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 주었는데...그런데 , 그 후예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일본에 녹아 있는 것일까?
후시미이나리신사가 거느리는 전국의 3만개가 넘는 이나리신사가 일본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 주고 있는 것처럼 하타씨들도 첨단 문화를 가지고 일본을 교화시킨 조상들의 후예 답게 현대 일본의 문화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있으리라.
2009/04/29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46513417
일본을 교토를 개척한 하타(秦)씨
네번째 이야기 : 토리이(鳥居)의 만리장성
伏見稻荷大社 (후시미이나리 대사)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코류지(광륭사)와 마쓰오 대사(松尾 大社), 그리고 누에신을 모신 코노시마니이마스아마테루미타마 (木嶋 坐天照御魂)신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하타씨의 역사를 끝내려고 했다.그런데 4월 29일 후시미이나리 대사(伏見稻荷大社)를 다녀 와서 마음이 달라졌다. 역시 일문(一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었다. 후시미이나리대사는 일본 전국에 3만여개나 있는 이나리신사의 총 본산 답게 어마어마 했다. 오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뻔 했구나.
아주 아주 오랜 옛날 후시미이나리산 일대에 살고 있던 하타씨의 얘기가 <일본서기>에 다음과같이 실려 있다고 한다.
'킨메이(欽明)왕이(510~570) 어느 날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하타의 오오쓰지(大津父)라는 인물을 등용하면 반드시 천하를 훌륭히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듣고 잠을 깬 후 그런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았더니 후카쿠사(深草)에 살고 있었다. 왕이 그를 불러 대장성의 일을 맡겼더니 정치가 아주 잘 이루어졌다.'
이 얘기는 6세기에 이미 이나리 산 근처(후카쿠사는 바로 그 일대의 지명)가 하타씨의 무대였음을 알려 주는데 그 이후 200년 쯤 지나 나타나는 하타노이로코(秦伊呂巨)라는 인물에 관해서도 <風土記>(후도기)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고 한다.
‘유복한 호족인 하타씨의 동량(棟梁)인 이로코(伊呂巨)가 떡을 걸어 놓고 활을 쏘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떡에 화살이 맞는 순간 떡은 흰 새로 변해 산위로 날아갔다. 이로코(伊呂巨)가 새가 날아 간 곳을 따라 가니 그곳에 벼가 자라 이삭이 맺혀 있었다. 이로코는 신의 가르침으로 믿고 그곳에 신사를 세웠다.’
바로 그 신사가 후시미이나리 신사이고 이로코가 그 창시자이며 때는 711년이었다.
하타씨는 이미 그 이전부터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603년 하타노카와카쓰(秦河勝)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모시고 코류지(廣隆寺)를 세웠으며 701년에는 하타노토리(秦都里)가 마쓰오대사를, 10년후에는 하타노이로코(秦伊呂巨)가 후시미이나리대사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일본 역사에서는 하타노이로코를 하타노토리의 동생으로 본다.
헤이안시대 초기(814)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나오는 하타씨의 내력을 간단히 얘기하는 것이 하타씨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당시 킨키(近畿)지방에 살고 있었던 도래인(渡來人)중에 삼분의 일이 하타씨였고 그들은 여러 선진 문물을 일본에 가르쳐 주며 부를 축적했는데 그들이 일본왕(仁德王)에게 비단을 헌상하자 피부에 닿은 감촉이 따뜻하고 부드러운것에 감탄한 왕이 하타공(波多公)이라는 성(姓)을 주었고(하다=피부) 그후 웅략왕(雄略王)때에는 하타씨들이 비단을 우즈타카쿠(산처럼 많이) 헌상하여 우즈마사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일본말로 ‘우즈타카이’라는 단어는 ‘산처럼 많이’라는 뜻이다) 하타씨 세 번째 이야기에서 잠깐 소개한 우즈마사라는 지명의 유래는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이쯤되면 하타씨 세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있지 않은가.
형님은 아라시야마 근처에 마쓰오대사를 세워 왕실을 수호하도록 했고 동생은 후카쿠사에 후시미이나리대사를 세워 농사의 신을 모셨다니...
신록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4월 마지막 주일의 후시미이나리대사는 새싹과 함께 활기가 넘쳐 있었다. 그 많은 신사 중에서도 일본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신사라는 이곳은 지금은 상업번창, 사업 번성, 가내 안전, 교통안전, 예능 활동을 위한 소원을 들어 주는 신이 계신곳이 되었지만 그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시작은 농업 신이 계신 곳이었다. 기우제나 ,5곡풍성, 국가안정을 기원하는 농업 관계의 일을 주관하다가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좋은 인연이 맺어 지기를 비는 신이 추가 되고 토요토미히데요시는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의 쾌유를 이곳에서 빌었다고 하니 위력이 대단한 신사의 위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직도 4월, 6월, 10월에는 묘판 만들기, 모내기 , 벼 수확 행사가 진행되고 있기는 하나, 근래에는 인생사의 모든 것을 발원하는 만능신사로 변신에 성공한 신이 되어 여전히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 곳.
그런데, 내가 이 신사를 찾아 와 입을 딱 벌려 버린 장관은 토리이(신사 입구에 세워진 기둥문)로 이루어짅 터널이었다. 왕복 2시간 이상이 걸리는 산정상은 233미터. 그곳까지 여러갈래로 올라 가는 토리이 행렬. 봄 햇살에 빨간 색으로 빛나는 크고 작은 토리이들은 모두 다 봉납奉納)된 것이었다. 무려 1만여개, 개인이 ,혹은 회사가 , 단체가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혹은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답례로 바친 토리이들, 헤이세이(平成)21년 올해 세운 것도 눈에 띌 아니라 대부분이 쇼와(昭和)와 헤이세이 때 세워진 최근의 것들이다. 도리이를 바치는 것은 에도시대부터 내려 온 습관이라는데 아마도 오래되면 철거하는 기간이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도대체 일본인들은 가슴 속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일까? 정말로 이나리산에 모셔진 농업신의 후예들이 자기들을 지켜 준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지금도 그들은 자연 신 앞에 경건하다. 원숭이 한 마리 너구리 한 마리도 신사에 모셔지면 그 앞에 두손을 모은다. 이 부분이 지금 우리와는 너무 다르다. 정말로 조상들이 우리의 신을 다 가지고 와서 그런 것인지........허허허. 어쨌든 후시미이나리신사에서만 본 토리이 터널이었다. 다른 신사에서는 이렇게 많은 토리이를 본 일이 없다. 아마도 후시미이나리신사의 특별한 장관이 아닌 가 싶었다.
후시미이나리 대사에는 또 여우가 대접을 받고 있다.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신사 앞에 여우 두 마리가 양쪽에서 버티고 있다. 이 신사의 신사(神使)라던가... 그 여우가 기름에 튀긴 음식을 좋아한다 하여 이나리즈시가 만들어 졌다는데, 이렇게 하여 이나리즈시는 에도시대부터 가장 대중적인 일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 진 유부초밥이다. 또 유부를 넣어 만든 우동을 키쓰네(여우)우동이라고 하는 것도 이 신사에서 나온 말이다.
토리이를 따라 가며 정상으로 가는 길, 힘들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음식과 음료수를 파는 휴게소가 있어서 참배객들은 땀을 닦는다 . 이나리즈시랑 키쓰네 우동을 파는 가게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이나리신사에서 먹어 보는 이나리즈시, 엄청나게 짜고 달다. 그 주인의 하는 말“ 한국 밥 너무 맛 있었어요” 그러면 그 맛을 좀 내 보실 일이지........
도래인 집단 중 가장 먼저 일본 땅에 들어 왔으리라고 짐작되는 하타씨들은 나라에서도 대 활약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는 쿄토의 옛 이름인 야마시로국(山城國)의 호족으로 엄청 난 힘을 구사하여 드디어 쿄토를 개척해 일본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 주었는데...그런데 , 그 후예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일본에 녹아 있는 것일까?
후시미이나리신사가 거느리는 전국의 3만개가 넘는 이나리신사가 일본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 주고 있는 것처럼 하타씨들도 첨단 문화를 가지고 일본을 교화시킨 조상들의 후예 답게 현대 일본의 문화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있으리라.
2009/04/29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46513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