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칸무천황의 어머님이 잠들어 계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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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2-23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9,88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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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사단법인 한국민족연구원>의 연구원인 최영호(崔英鎬)라고 합니다.
남편을 따라 일본 쿄오토에 온지 어느새 6개월이 되어 갑니다. 쿄오토는 일본의 1200여 년 간의 수도답게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화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가는 곳마다 역사의 냄새가 넘치는 이곳에 살면서 그전부터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스카 시대나 나라시대는, 우리나라에서 당시의 첨단문화를 가지고 건너 온 조상들이 일본의 스승노릇을 하며 고대시대를 열어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만 과연 일본의 특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헤이안 시대 문화의 중심지는 어땠을 까 ?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한반도와 관련있는 그 무엇인가가 이곳 쿄오토에는 어떤 모습으로 녹아 있을까? 하는 것이었죠.
참 많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헤이안 시대에도 일본인에게는 너무 너무 큰 스승이었습니다. 이제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그것들을 찾아 볼 까 합니다. 학문적이거나 이론적인 접근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저는 직접 찾아 다니며 장한 조상들의 숨결을 느껴 보며 사진도 찍고 현재의 모습을 적기도 하며 감상을 적어 볼까 합니다.
중고등학교 현장에서 35년간 역사교사로 근무하면서 고대 문화부분을 가르칠 때는 긍지와 함께 가슴 저린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근대를 가르칠 때는 학생들과 함께 참 많이 분개하며 눈물을 머금기도 했었습니다. 이제, 그 때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들, 시간이 많지 않아 충분히 설명 하지 못했던 부분들, 알지 못해 전달하지 못했던 것들을 여기서나마 풀어 볼까 합니다.
일본 문화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 관서 지방을 여행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보람이겠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곳부터 찾아 볼까 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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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무천황의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서
최영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오늘 아침 산보 길에 공원에 피어 있는 진분홍 매화꽃이 하도 예뻐서 꽃 잎 세 개를 따다가 유리컵 속에 넣어 놨다. 컵을 들면 코 속으로 매화 향이 가득하다.
칸무 천황의 어머니 묘를 찾아 갔다 돌아오던 날 , “동해 자연 보도”에서 매화꽃을 처음 봤었는데.........
아, 이곳에는 2월에 이 귀한 손님이 찾아오시는 구나.
여기는 일본 쿄오토,
서울보다 한달도 더 빨리 춥고 추웠던 겨울 속에서 빠져 나왔다.
일본 오자 마자 벼르던 백제 여인 타카노니이가사(高野新笠)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2월 8일 일요일, 오후 3시경 어디에도 그 약도가 나와 있지 않아서 무덤이 가까이 있다는 버스 정류장 이름만 찾아서 떠났다.
그러나 오오에쿠쓰카케(大枝沓掛)라는 곳에 무덤이 있다는 정보만을 가지고 나갔으니 쉬울 리가 없다.
다행이도 버스를 타고 다닐 때 들어 보던 정류장 이름이 기억나서 나서기는 했으나 못 찾으면 다시 시도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떠난 일요일 오후의 외출이었다.
칸무 천황, 그는 누구인가?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일본천황의 계보로 50번째 왕.
그에 의해 헤이안(平安) 시대가 열렸으니 일본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숭상하며 존경하는 가를 알만하지 않는가?
8세기말부터 12세기 말까지 400년간 가장 일본적인 문화를 낳은 시대가 헤이안 시대, 현대 일본인의 문화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후예들인 쿄오토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래서 더 대단하다.
그런데.... 그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인이다. 그것도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다.
어떻게 무령왕의 후손이 여기 일본에 살고 계셨을까?
무령왕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로 들을 기회가 더러 있었지만,
지난 여름 쿄오토에 와서 칸무 천황의 어머니 무덤이 이근처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 나름, 충격이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길, 해를 넘겨 2월 8일이니 너무 늦었지 않은가?
집에서 약 30분 정도 걸어 정류장까지 갔으나 너무 막연하여 네거리에서 휘휘 둘러 보기만...... 어찌한다?
관광약도에도, 쿄오토 소개 책자에도 없는 무덤이다.
다시 한참을 되돌아 걸어서 파출소를 찾아 갔다. ‘大枝 交番’.
交番은 우리나라의 파출소 같은 곳이다.
정답이었다. 경찰은 알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로 벽에 붙어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친절하게 가르쳐준 그 곳은 약 15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곳이었다.
한적한 주택가를 걸어가며 눈으로 찾아 찾아 가다 발견한 돌 팻말, 약 160여개의 돌층계를 구불구불 걸어 숨이 차도록 올라가서야 뵐 수 있는 분.
그 계단은 폭이 1미터 이상 되는 다듬어 지지 않은, 흙속에 묻혀 있는 계단들이었는데 오히려 1400여년전의 시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누구도 잘 찾아오지 않는 듯, 가는 길이 초라한 이곳에 그분이 계시구나....
‘속일본기’라는 일본의 역사책에 일본조정이 이곳에 누워 계신 백제 여인 타카노니이카사에게 극존의 시호, ‘天高知日之子姬尊’를 바치며 아래의 글도 같이 실었다고 한다.
백제의 옛 조상인 도모왕( 동명왕)은 하백의 따님이 태양의 정을 받아 태어났다. 황태후는 그 후손이다’
어? 이거 고구려 건국신화인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의 아들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여기서 나는, 현재의 아키히토 왕이 2001년 12월 기자회견 석상에서 발표한 내용을 기억해 내지 않을 수가 없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칸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으로 속 일본기에 쓰여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일본왕실과 백제와의 혈연적 관계를 밝혔다 해서 우리나라에선 대단한 화제가 되었었던 그 담화이다.
바로 그 백제 왕족,칸무천황의 생모의 무덤이 이렇게 잊혀 진듯 한적한 주택가에 지나쳐도 무리가 아닌 돌 팻말 하나로 표시되어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 북쪽의 섬인 가카라시마에는 무령왕이 태어 났다는 동굴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공주의 무령왕 능에서 나온 지석에는 일본과의 관계를 부인 할 수 없는 증거가 씌어 있기도 하다. 사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서기에도 나오는 이름이다.
일본서기의, 무령왕 출생에 관한 내용을 조금만 더 간추려 보면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와 경쟁하던 5세기에 일본에 동생 곤지왕을 보냈다고 한다. 그때 같이 일본에 오던 개로왕의 부인이 임신하고 있었는데 배안에서 산기를 느껴 급히 가카라시마에 내려 해산을 했는데 이분이 무령왕이라는 것이다. 해산후 곧 본국으로 갔다는 데 그후 백제왕으로 등극 하기 전까지 무령왕에 대한 기록은 한국의 어느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무령왕이 40년간 어디에서 무엇읗 했는가는 아직도 밝혀 지지 않고 있는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가 밝혀 지면 고대 우리나라와 일본 왕실과의 관계가 좀더 분명해 지고 일본 왕은 다시 성명을 발표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무령왕 후손 따님을 찾아 가는 길.
동네 주차장 한가운데 서 있는 표지석을 따라 숨을 몰아 쉬며, 세월을 느끼게 하는 돌층계를 올라가니, 규모는 작으나 단정하게 다듬어 진 무덤이 있었다.
잘 가꾸어 진 1미터 높이의 생나무 울타리와 흰 페인트 칠을 한 나무 울타리로 2중 담이 둘러져 있었다.
현재 일본인에게는 잊혀져 있는 듯하나 관리는 잘 되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길에는 御陵前이라는 정류장이 있고 또 御陵町이라는 동네이름이 이근처인걸 보면 1300여년전의 이곳은 대단한 성지였으리라.
그런데 무덤에 봉이 없다. 평지 무덤인가, 그 위에 도리이(鳥居)가 서 있다.
저 도리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갈이 깔려 있는 저곳에 그분이 계시는가? !!
그러나 뭔가 마음이 안 차,
조그만 석등 그 뒤쪽에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왕능이라도 있는듯하여 금지팻말을 무시하고 올라 가 봤으나 고목만 우거져 있다.
궁내청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는, 무덤 주인공이 적혀 있는 나무 표지판이 서 있으니 이곳이 틀림없다.
가득 차 오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옆에는 남편이 같이 두손을 모으더니,
사진을 찍는다.
칸무 천황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 어머니!
그리하여 히라노 신사에도 모셔져 있는 이 백제의 여인은 이 영원의 세계에서
어느 곳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을까?
아버지와 아들의 후손들이여, !
다 같이 번영하라! 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 들른 ‘ 大枝神社’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신사였으나 平成 7년이던가.. 입구에 커다란 비석을 세워 놓은 걸 보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인 듯 하다. 그것도 코오토에 있는 유명한 국제일본문화연구 센터의 창설자 梅原선생이 글씨를 썼네.
또한, 무덤과 연결되어 있는 산, 대나무로 둘러싸인 언덕에 있는 이 신사의 이름에 나오는 大枝는 이곳의 지명이기도 하지만 高野新笠의 어머니 이름이기도 하다. 뭔가 시사 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알 길이 없다.
이 일대가 그 옛날 , 백제인의 터전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길이 안떨어 진다.
날씨는 점점 어두워지는데 내려가야지...... 200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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