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기와로 만든 절 아스카테라(飛鳥寺)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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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5-24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10,50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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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통신>-11
일본 최초의 기와로 만든 절 아스카테라(飛鳥寺)를 찾아서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5월 21, 고대 일본의 문을 활짝 연 나라현 아스카촌(奈良縣 明日香村)의 날씨는 구름은 끼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쿄토를 출발하여 한 시간 20분 만에 도착한 아스카 카시하라신궁역에서 곳곳의 유적을 볼 수 있도록 준비된 버스 승차권을 3000엥 주고 샀다. 유명한 유적지에서 내리면 한시간 후에 버스를 타고 다음 유적지에 갈 수 있도록 기획한 특별 행사 기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걸어서 보고 싶은 곳을 찾아 다녔다, 자전거를 탈 수 있으면 온 동네가 너무나 유명한 역사 이야기로 가득찬 골목 골목을 좀더 알차게 볼 수 있을 텐데 아직도 나는 자전거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 20여년 전 남편과 아들 자전거 뒤꽁무니에 올라타고 달렸던 거리들, 그 때 자전거를 배워서 꼭 이 길을 다시 오겠다고 했었던 기억이 부끄럽다.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 싸인 조그마한 이 동네는 6세기부터 7세기중반까지 일본 역사의 중심지, 그것도 불교문화의 탄생지였다는 사실이 믿어 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이곳은 너무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아 하루 일정으로 온 우리에게는 선택의 고민을 하게 한다.
우선 아마카시노오카(甘樫丘)부터.
1989년 아스카에서 새로 발견된 유적이다.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씨의 저택 유적과 석조 수로를 발견했다고 신문에 대서 특필된 곳이다. 세계가 알아 주는 일본정원은 그 종류도 가지가지일 뿐 아니라 일본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자랑이고도 하다. 고대 문화의 연구를 하면 할수록 한국과의 관련을 부인할 수 없게 되어 한반도라는 대신 대륙이라는 단어로 얼버무리는 그들에게 정원만은 예외다. 물론 ‘신라 못’ ‘백제 못’이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남아 있는 곳이 없으니 증거가 없었다. ‘정원은 우리가 만든 독창적인 문화다’ 라는 자존심. 그런데 그 원류가 나왔다.
일본 정원의 역사가( 모리 오사무)가 새로 발견된 정원을 보고 “네모로 굽은 연못은 한국에서 직수입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천을 모방한 방법은 독자적인 것이다...” 라고 했으니 이것을 책에서 읽은 나는 가 보고 싶을 수 밖에....
해발 148미터의 전망대는 몇백년 수령의 고목들이 줄 지어 있고 긴 시간의 흔적을 말 해 주는 석조물들은 놓여 있었으나 아무런 설명문도 쓰여 있지 않아서 큰 기대를 하고 올라 온 우리에게 참 답답한 곳이었다 . 어디가 연못 자리이고 어느쪽에 저택이 있었단 말인가?
일본 답지 않게 표지판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은 역사의 공간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산을 내려와 구멍가게의 아저씨에게 물어서 겨우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발굴이 진행중이라니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러나 산을 내려 오며 돌로 만든 수로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니 작으나마 위안이 된다. 그리고 산 기슭에서 따 먹은 산 딸기들...
이제부터 이 시대의 주인공 소가씨(蘇我氏) 얘기를 풀어 가야 한다.
하타씨가 헤이안 시대의 쿄토를 개척한 인물이라면 그들은 일본 고대를 연 인물이고 아스카는 그 중심지이다.
일본의 한시대를 좌지우지 했던 인물 蘇我氏는 백제계라고 알려져 있다.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 들여 에니미즘의 일본을 부처님 신앙으로 뭉치게 한 주인공인 그들은 국왕도 마음데로 세운 실력자들이었다. 유명한 쇼토쿠태자도 그들의 자손이다. 쇼토쿠태자의 할머니도 蘇我氏이고 어머니도 蘇我氏이다. 당시의 국왕, 스이코천황은 쇼토쿠태자의 친 고모.
그들의 정체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어떤 학자는 선진문화를 가지고 온 도래인을 장악하여 실력을 키웠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백제계임이 분명한 여러 증거앞에 손을 들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다른 도래인 호족들과 달리 그들은 한반도를 건너 왔다는 뚜렷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이 전사하고 공주로 피난갔던 5세기 후반에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고급관료였던 목만치(木滿致, 혹은 智)의 후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소가이나메(蘇我稻目)를 시작으로 , 소가우마코(蘇我馬子), 소가에미시(蘇我蝦夷), 소가이루카(蘇我入鹿,鞍作)4대에 걸친 시기에 일본이 고대체제를 정비해 나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들의 유적이 집중되어 남아 있는 곳 , 두 번째에 찾 아 간 곳은 아스카테라(飛鳥寺).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불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아스카 대불(飛鳥大佛)이라는 비가 조그만 암자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옛날의 영화가 그리워서 였으리라. 이절이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 일본 최초의 절이다. 그 당시 백제에서 와박사 노반박사 건축 기사등 모든 분야의 기술자들이 건너 와 이절을 건축했다는데 1950년대에 발굴해 보니 무려 호류지의 20배가 넘었다던가...
마침 우리가 갔을 때 주지스님이 나와서 설명을 해주셨다.
이절을 세운 인물이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 들였다고 알려진 소가우마코이며 국왕 스이코와 쇼토쿠태자의 발원으로 20년간에 걸쳐 세웠다는 열정적인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그가 하지 않는 많은 얘기들을 불상앞에서 기억해 내고 있었다.
이절에 탑을 세울 때 국왕인 스이코천황도 참석했고 우마코를 비롯한 100여명의 실력자들이 모두 백제옷을 입고 있었으며 백제로부터 가지고 온 사리를 넣었다는 것,
이절의 터도 백제 귀화인이 살았던 곳이고 이곳에 모신 본존도 백제 불상이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등 ......
현재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모든 풍상에도 굳건히 견디며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앉아 계셨을 대불이다. 몇차례의 화재로 불 타버린 이 절을 지킨 유일한 유적인 이 대불은 중금당(中金堂)에 모셔졌던 좌불인데 수난을 몇차례 겪은 흔적이 얼굴등 이곳 저곳에 남아 있으나 옛날 그 자리 그반석위에 의연하게 앉아 계셨다. 6세기말에서 7세기에 걸친 시기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무게를 느낀 탓인지 그의 얼굴 표정은 어둡고 무섭다. 호류지의 금당에 모셔져 있는 금동 석가삼존불을 만든 인물로 알려진 도리불사 , 즉 쿠라쯔쿠리노토리(鞍作 鳥)라는 백제인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이 불상앞에서 주지는 백제인의 이름이 새겨 진 나무팻말 하나를 들어 보여 주기도 했다.사람들이 불상앞에서 두손을 모은다.....
불상앞을 떠나 옆방으로 가보니 조그만 전시실이 있었다.
어허! 여기에 놓여 있는 백제 기와.
절을 발굴할 때 나왔다고 한다. 처음으로 기와를 구워서 절을 만드는 기술앞에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백제의 선진 문화에 감탄했을까?
약 반세기에 걸쳐 이 절이 고구려 청암리 폐사의 건축 형식과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 달라졌다 . 고구려 승려 혜자가 이절의 실질적인 주지이기도 했고 고구려에서 금300량을 기부했다는 기록도 있고 해서 고구려와의 관계가 깊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부여 왕흥사 발굴의 결과 그동안 알려 지지 않았던 새로운 절 배치 방식(1탑 3금당)이 아스카 절과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학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고 한다.
절을 나오니 마당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스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절 뒷문을 나와 소가이루카의 무덤을 찾았다. 무덤이 있는 곳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그의 머리를 이곳에 묻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추모의 꽃이 놓여 있었다. 645년, 소가 이나메로 시작된 4대에 걸친 백제인의 집권은 끝난다. 타이카개신이라는 정변이 그것이다. 그뒤부터 소가 집안은 천황위에 권력을 휘두른 흉악한 악당으로 묘사되어 왔으나 요즘은 그 시각을 벗어났다. 그들이 몰락한 것은 한반도의 격동기, 다시 말하면 삼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싸우던 시기에 외교노선의 차이였다는 연구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720년에 만들어 진 일본서기는 승자의 역사서가 아닌가......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었다. 가야 할 곳은 많은데 마음이 급해진다 서둘러 찾아 간 곳은 특별전시의 키토라 고분 벽화, 이번 처음으로 전시되는 벽화는 청룡도다. 아스카 자료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는 학생 단체 관람객이 많다. 일본이 어린 학생들에게 전시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전 공개하여 대대적인 선전을 한 탓일 것이다. 일본의 문화재 의식은 이렇게 철저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와 중국의 사신도를 비교 전시해 놓은 전시 방법 또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데 일조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보다 평양에서 관측한 별자리가 발견되었다고 우리나라에서 한참 화제가 되었던 그 무덤의 벽화여서 더 마음이 갔다. 그러나 전시된 벽화들은 너무 작았고 잘 보이지 않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학예사들은 고구려보다 중국의 벽화에 더 가깝다는 설명을 만화로 그리기도 하고 신문에 내기도 하면서 학생들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오는 길,타카마쓰 고분의 극채색의 벽화가 그려 진 모형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수리중이라 갈 수 없는 그곳의 여인도를 마음에 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야 할 곳 , 이시부타이(石舞臺).
이름만 보면 전혀 무덤과 관계없는 듯 하나 소가우마코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역사의 오랜 시간속에서 돌위의 봉토는 다 무너져 내리고 어마어마하게 큰 돌 들만 남아 있었으니 여러 얘기가 생겼으리라. 그곳에서 얻은 두가지 전설 , 하나는 여우가 여자로 변하여 그 돌위에서 춤추고 있었다는 데서 돌 무대라고 했다고 하고 또 하나는 어떤 예능인이 무대로 사용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1930년대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해 본 결과 이것은 횡혈식 석실고분이었다. 30여개의 아주 큰돌들을 사용하여 석실을 만들었는데 그중 천정을 덮고 있는 두 개의 돌 무게는 무려 64톤과 77톤이란다. 도대체 이돌들을 어떻게 이동했을까?
이돌을 움직이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까? 그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석실의 규모가 이렇다면 그 무덤의 겉 모습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확실하게 주인공이 밝혀 진 것은 아니나 6세기 후반의 이 지역의 실력자인 소가우마코가 아니면 이런 무덤을 만들 수 없었다는 판단이 정확하다고 한다. 쇼토쿠태자와 함께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며 백제로부터 온 갖 기술자를 불러와 최초의 기와 절인 아스카테라를 지을 수 있었던 권력과 부의 소유자, 아스카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 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의 손자대에 집안이 몰락했으나 아무리 승자라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적 흔적들을 다 지을 수는 없었으리라. 그 이후 후지와라(藤原),소가 집안을 뒤 엎어 놓은 일본의 실력자는 아스카를 떠나 새로운 수도를 정한다. 소가 집안의 역습이 무서웠으리라.
20여년전, 자전거로 달려 왔을 때와는 주변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넓은 들판에 돌 무덤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던 기억은 잘 정비되어 있는 무덤앞에서 오히려 더 귀한 추억으로 살아 나왔다. 무덤 주변을 뛰어 다니며 돌 틈새로 무덤속을 기웃거리던 아들들의 어렸던 모습이 5월의 오후, 건너 편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와 함께 내 눈앞에 어른 거린다.
그리운 시절의 빛 바랜 사진 한 장 처럼...
2009/05/21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47775373
일본 최초의 기와로 만든 절 아스카테라(飛鳥寺)를 찾아서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5월 21, 고대 일본의 문을 활짝 연 나라현 아스카촌(奈良縣 明日香村)의 날씨는 구름은 끼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쿄토를 출발하여 한 시간 20분 만에 도착한 아스카 카시하라신궁역에서 곳곳의 유적을 볼 수 있도록 준비된 버스 승차권을 3000엥 주고 샀다. 유명한 유적지에서 내리면 한시간 후에 버스를 타고 다음 유적지에 갈 수 있도록 기획한 특별 행사 기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걸어서 보고 싶은 곳을 찾아 다녔다, 자전거를 탈 수 있으면 온 동네가 너무나 유명한 역사 이야기로 가득찬 골목 골목을 좀더 알차게 볼 수 있을 텐데 아직도 나는 자전거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 20여년 전 남편과 아들 자전거 뒤꽁무니에 올라타고 달렸던 거리들, 그 때 자전거를 배워서 꼭 이 길을 다시 오겠다고 했었던 기억이 부끄럽다.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 싸인 조그마한 이 동네는 6세기부터 7세기중반까지 일본 역사의 중심지, 그것도 불교문화의 탄생지였다는 사실이 믿어 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이곳은 너무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아 하루 일정으로 온 우리에게는 선택의 고민을 하게 한다.
우선 아마카시노오카(甘樫丘)부터.
1989년 아스카에서 새로 발견된 유적이다.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씨의 저택 유적과 석조 수로를 발견했다고 신문에 대서 특필된 곳이다. 세계가 알아 주는 일본정원은 그 종류도 가지가지일 뿐 아니라 일본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자랑이고도 하다. 고대 문화의 연구를 하면 할수록 한국과의 관련을 부인할 수 없게 되어 한반도라는 대신 대륙이라는 단어로 얼버무리는 그들에게 정원만은 예외다. 물론 ‘신라 못’ ‘백제 못’이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남아 있는 곳이 없으니 증거가 없었다. ‘정원은 우리가 만든 독창적인 문화다’ 라는 자존심. 그런데 그 원류가 나왔다.
일본 정원의 역사가( 모리 오사무)가 새로 발견된 정원을 보고 “네모로 굽은 연못은 한국에서 직수입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천을 모방한 방법은 독자적인 것이다...” 라고 했으니 이것을 책에서 읽은 나는 가 보고 싶을 수 밖에....
해발 148미터의 전망대는 몇백년 수령의 고목들이 줄 지어 있고 긴 시간의 흔적을 말 해 주는 석조물들은 놓여 있었으나 아무런 설명문도 쓰여 있지 않아서 큰 기대를 하고 올라 온 우리에게 참 답답한 곳이었다 . 어디가 연못 자리이고 어느쪽에 저택이 있었단 말인가?
일본 답지 않게 표지판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은 역사의 공간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산을 내려와 구멍가게의 아저씨에게 물어서 겨우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발굴이 진행중이라니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러나 산을 내려 오며 돌로 만든 수로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니 작으나마 위안이 된다. 그리고 산 기슭에서 따 먹은 산 딸기들...
이제부터 이 시대의 주인공 소가씨(蘇我氏) 얘기를 풀어 가야 한다.
하타씨가 헤이안 시대의 쿄토를 개척한 인물이라면 그들은 일본 고대를 연 인물이고 아스카는 그 중심지이다.
일본의 한시대를 좌지우지 했던 인물 蘇我氏는 백제계라고 알려져 있다.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 들여 에니미즘의 일본을 부처님 신앙으로 뭉치게 한 주인공인 그들은 국왕도 마음데로 세운 실력자들이었다. 유명한 쇼토쿠태자도 그들의 자손이다. 쇼토쿠태자의 할머니도 蘇我氏이고 어머니도 蘇我氏이다. 당시의 국왕, 스이코천황은 쇼토쿠태자의 친 고모.
그들의 정체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어떤 학자는 선진문화를 가지고 온 도래인을 장악하여 실력을 키웠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백제계임이 분명한 여러 증거앞에 손을 들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다른 도래인 호족들과 달리 그들은 한반도를 건너 왔다는 뚜렷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이 전사하고 공주로 피난갔던 5세기 후반에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고급관료였던 목만치(木滿致, 혹은 智)의 후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소가이나메(蘇我稻目)를 시작으로 , 소가우마코(蘇我馬子), 소가에미시(蘇我蝦夷), 소가이루카(蘇我入鹿,鞍作)4대에 걸친 시기에 일본이 고대체제를 정비해 나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들의 유적이 집중되어 남아 있는 곳 , 두 번째에 찾 아 간 곳은 아스카테라(飛鳥寺).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불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아스카 대불(飛鳥大佛)이라는 비가 조그만 암자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옛날의 영화가 그리워서 였으리라. 이절이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 일본 최초의 절이다. 그 당시 백제에서 와박사 노반박사 건축 기사등 모든 분야의 기술자들이 건너 와 이절을 건축했다는데 1950년대에 발굴해 보니 무려 호류지의 20배가 넘었다던가...
마침 우리가 갔을 때 주지스님이 나와서 설명을 해주셨다.
이절을 세운 인물이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 들였다고 알려진 소가우마코이며 국왕 스이코와 쇼토쿠태자의 발원으로 20년간에 걸쳐 세웠다는 열정적인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그가 하지 않는 많은 얘기들을 불상앞에서 기억해 내고 있었다.
이절에 탑을 세울 때 국왕인 스이코천황도 참석했고 우마코를 비롯한 100여명의 실력자들이 모두 백제옷을 입고 있었으며 백제로부터 가지고 온 사리를 넣었다는 것,
이절의 터도 백제 귀화인이 살았던 곳이고 이곳에 모신 본존도 백제 불상이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등 ......
현재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모든 풍상에도 굳건히 견디며 천오백년 세월을 그대로 앉아 계셨을 대불이다. 몇차례의 화재로 불 타버린 이 절을 지킨 유일한 유적인 이 대불은 중금당(中金堂)에 모셔졌던 좌불인데 수난을 몇차례 겪은 흔적이 얼굴등 이곳 저곳에 남아 있으나 옛날 그 자리 그반석위에 의연하게 앉아 계셨다. 6세기말에서 7세기에 걸친 시기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무게를 느낀 탓인지 그의 얼굴 표정은 어둡고 무섭다. 호류지의 금당에 모셔져 있는 금동 석가삼존불을 만든 인물로 알려진 도리불사 , 즉 쿠라쯔쿠리노토리(鞍作 鳥)라는 백제인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이 불상앞에서 주지는 백제인의 이름이 새겨 진 나무팻말 하나를 들어 보여 주기도 했다.사람들이 불상앞에서 두손을 모은다.....
불상앞을 떠나 옆방으로 가보니 조그만 전시실이 있었다.
어허! 여기에 놓여 있는 백제 기와.
절을 발굴할 때 나왔다고 한다. 처음으로 기와를 구워서 절을 만드는 기술앞에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백제의 선진 문화에 감탄했을까?
약 반세기에 걸쳐 이 절이 고구려 청암리 폐사의 건축 형식과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 달라졌다 . 고구려 승려 혜자가 이절의 실질적인 주지이기도 했고 고구려에서 금300량을 기부했다는 기록도 있고 해서 고구려와의 관계가 깊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부여 왕흥사 발굴의 결과 그동안 알려 지지 않았던 새로운 절 배치 방식(1탑 3금당)이 아스카 절과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학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고 한다.
절을 나오니 마당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스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절 뒷문을 나와 소가이루카의 무덤을 찾았다. 무덤이 있는 곳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그의 머리를 이곳에 묻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추모의 꽃이 놓여 있었다. 645년, 소가 이나메로 시작된 4대에 걸친 백제인의 집권은 끝난다. 타이카개신이라는 정변이 그것이다. 그뒤부터 소가 집안은 천황위에 권력을 휘두른 흉악한 악당으로 묘사되어 왔으나 요즘은 그 시각을 벗어났다. 그들이 몰락한 것은 한반도의 격동기, 다시 말하면 삼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싸우던 시기에 외교노선의 차이였다는 연구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720년에 만들어 진 일본서기는 승자의 역사서가 아닌가......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었다. 가야 할 곳은 많은데 마음이 급해진다 서둘러 찾아 간 곳은 특별전시의 키토라 고분 벽화, 이번 처음으로 전시되는 벽화는 청룡도다. 아스카 자료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는 학생 단체 관람객이 많다. 일본이 어린 학생들에게 전시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전 공개하여 대대적인 선전을 한 탓일 것이다. 일본의 문화재 의식은 이렇게 철저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와 중국의 사신도를 비교 전시해 놓은 전시 방법 또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데 일조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보다 평양에서 관측한 별자리가 발견되었다고 우리나라에서 한참 화제가 되었던 그 무덤의 벽화여서 더 마음이 갔다. 그러나 전시된 벽화들은 너무 작았고 잘 보이지 않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학예사들은 고구려보다 중국의 벽화에 더 가깝다는 설명을 만화로 그리기도 하고 신문에 내기도 하면서 학생들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오는 길,타카마쓰 고분의 극채색의 벽화가 그려 진 모형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수리중이라 갈 수 없는 그곳의 여인도를 마음에 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야 할 곳 , 이시부타이(石舞臺).
이름만 보면 전혀 무덤과 관계없는 듯 하나 소가우마코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역사의 오랜 시간속에서 돌위의 봉토는 다 무너져 내리고 어마어마하게 큰 돌 들만 남아 있었으니 여러 얘기가 생겼으리라. 그곳에서 얻은 두가지 전설 , 하나는 여우가 여자로 변하여 그 돌위에서 춤추고 있었다는 데서 돌 무대라고 했다고 하고 또 하나는 어떤 예능인이 무대로 사용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1930년대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해 본 결과 이것은 횡혈식 석실고분이었다. 30여개의 아주 큰돌들을 사용하여 석실을 만들었는데 그중 천정을 덮고 있는 두 개의 돌 무게는 무려 64톤과 77톤이란다. 도대체 이돌들을 어떻게 이동했을까?
이돌을 움직이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까? 그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석실의 규모가 이렇다면 그 무덤의 겉 모습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확실하게 주인공이 밝혀 진 것은 아니나 6세기 후반의 이 지역의 실력자인 소가우마코가 아니면 이런 무덤을 만들 수 없었다는 판단이 정확하다고 한다. 쇼토쿠태자와 함께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며 백제로부터 온 갖 기술자를 불러와 최초의 기와 절인 아스카테라를 지을 수 있었던 권력과 부의 소유자, 아스카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 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의 손자대에 집안이 몰락했으나 아무리 승자라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적 흔적들을 다 지을 수는 없었으리라. 그 이후 후지와라(藤原),소가 집안을 뒤 엎어 놓은 일본의 실력자는 아스카를 떠나 새로운 수도를 정한다. 소가 집안의 역습이 무서웠으리라.
20여년전, 자전거로 달려 왔을 때와는 주변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넓은 들판에 돌 무덤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던 기억은 잘 정비되어 있는 무덤앞에서 오히려 더 귀한 추억으로 살아 나왔다. 무덤 주변을 뛰어 다니며 돌 틈새로 무덤속을 기웃거리던 아들들의 어렸던 모습이 5월의 오후, 건너 편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와 함께 내 눈앞에 어른 거린다.
그리운 시절의 빛 바랜 사진 한 장 처럼...
200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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