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침공의 근원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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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22-02-28 수정일수정일 22-02-28 조회2,33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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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침공의 근원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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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정 남
(한민연 원장)
푸틴 러시아대통령에 의한 우크라이나 공격은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멀쩡한 독립국가를 특별한 명분도 없이 일방적으로 무력 침공하는 일은 탈냉전의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폭거다. 왜 이렇게 푸틴은 전 세계를 상대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가. 다른 나라도 아닌 자기들의 형제국이기도 했던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하고 나선 이유가 명확치 않아 더욱 궁금증이 더해진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가장 가까운 이웃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나 민족적으로도 뿌리를 같이하고 있어 흔히들 ‘작은 러시아’이라고까지 불려져 왔던 가장 가까운 형제국가에 폭격을 가하고 침공한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인가. 많은 이들은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려 하고, 만약 그러한 일이 현실화되면 러시아는 바로 그들의 안방으로 서구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극도로 이를 경계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입장들이 대다수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와는 불가분의 관계로 뿌리를 깊게 같이하고 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최초의 국가였던 키예프 러시아(AD9-12)의 서남지역에서 오늘날의 대러시아인(Great Russian)들과 분리되면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 키예프시대 이후 이들 지역은 여러 개의 공국으로 나눠져 외부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1569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영토의 거의 전부가 폴란드에 의해 통일 된 후로는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여러 영역에서 폴란드의 영향권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1648년 우크라이나인들은 자민족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예속정책에 반발하여 민족적 폭동을 일으켜 폴란드에 커다란 타격을 주면서 독자적인 민족의식을 강화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1667년 우크라이나는 결국 폴란드의 분열과 러시아의 남하 정책으로 그후 Galicia를 제외한 거의 전 영토가 러시아의 도움으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이때부터 실질적인 러시아의 지배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에 있어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에 있어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그 발생 과정에서부터 뿌리를 같이한 同根異花와 같은 존재이기에 더더욱 그러한 관계를 결정적으로 단절시킬 수도 있는 우크라이나의 NATO권 편입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만으로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설명할수 없는 한계가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아직도 최종적인 성사 여부를 예단하기 어려운 장래의 일이며, 그것이 현실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반드시 러시아의 동의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지금의 NATO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과거 냉전기의 그가 가져왔던 내용과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까지를 감안 하면 러시아로서는 우크라이나의 NATO가입이 꼭 자국에 불리하게만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 확실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보다 근원적인 동인을 찾아 나서야 될 것 같다.
우선, 이번 사태는 푸틴의 ‘거대한 계획’의 한 국면이라는 점이다. 장기집권이 이어져 오면서 푸틴은 오래전부터 구 소련(USSR,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복원을 은밀하게 계획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집권을 계속해 오면서 거의 제정기의 짜르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푸틴의 보다 큰 꿈은 해체되어 없어진 소련과 같은 연방체 국가를 다시 러시아를 중심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5개 구성공화국(지금은 모두 개별적인 독립국가로 존재)들을 다시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연방적인 연계를 만들어 내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체된 소련을 다시 그와 유사한 형태의 연방 내지는 ‘준 연방’의 형태로 복원하려는 것이 푸틴의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야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이 현재의 러시아의 위상을 명실상부하게 구 소련권 전영역에서 확립할 수 있을뿐 아니라, 이러한 복원을 통하여 푸틴 자신의 리더십을 더욱 확고히 하면서 그의 장기 집권 플랜도 수월케 하려 한다. 즉 그는 30여 년 전에 일어난 소련의 몰락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원상회복 시키는 것이 러시아와 러시안인들을 위한 최대의 과업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러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해체된 연방체제와 비슷한 또 다른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연방적인 결속체를 만들어 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의 일들을 꾸준히 진행하여 왔고, 오래 전에 단행한 크림반도의 병합도 그러한 노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연장선상에서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 가장 큰 관건의 하나가 구 소련권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가장 핵심적인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우선 러시아와 예속적인 관계로 복원할 필요가 절박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푸틴 러시아의 예속적인 관계로 복원되기만 하면 구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다른 공화국들과의 예속적인 관계의 수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을 만큼 구소련 구성 공화국들 중에서 우크라이나 차지하는 위상이나 그 상징성이 우뚝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푸틴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눈을 떨 수 없는 것은 그들 간에 역사적으로 공유해온 민족적 연계에서도 찾을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러시아인, 벨라루스인들과 더불어 구 소련연방에 존재하고 있었던 이른바 ‘슬라브 3총사’들이다. 구 소련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120여 민족집단들 중에서 75-89%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던 슬라브들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등 3개의 세부민족으로 나눠지고 있기는 하나, 이들 세 민족집단은 보다 큰 슬라브라는 민족공동체에 민족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동일민족집단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공유하고 있는 형제민족, 내지는 동혈집단이다. 이들 중 우크라이나 민족에 국한해 볼 때, 구 소련연방 전역에 살고 있던 우크라이나인 총 수는 소련 전체인구의 16.2%인 43,347,000명(1979년 통계)로 이는 소련 전체 민족 중에서 러시아민족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민족인구를 가진 집단으로 그 민족적 지위와 비중은 막강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는 46,609,000명으로 소련 인구의 약 19%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인구의 민족분포는 우크라이나인이 전체의 73.6%, 그 다음이 러시아인들이 21.6%, 유대인 1.3%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소련의 개별 공화국 중에서 러시아공화국을 제외한 전체 공화국 중에서 러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또한 우크라이나 일 만큼 두 나라 사이의 민족적인 공유비율이 높기도 하다. 이런 민족적 관계에서 보듯 자연스럽게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주인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인들에 있어서도 선호의 대상지이던 곳이며, 또 계획적으로 러시아화를 위해 노력 해온 지역이기도 했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서 살기도 하고, 우크라이나의 각종 정부기관이나 조직에 더 많은 러시아인들을 파견, 그들의 민족적 자율성 신장을 저해가고 그들 민족을 러시아화하려는 노력이 치열하게 펼쳐진 지역이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제반 민족적 상황을 종합하면 러시아로서는 그들의 바라는 새로운 연방적인 결속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이 우선적으로 ‘슬라브 3형제’의 결속으로 시작되어야 함은 당연할 수 있으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민족적인 형제국가인 우크라이나의 탈러시아화를 막고 이들을 그들 러시아와의 슬라브적인 결속을 회복시켜 나가는 작업에 대한 요청이 크지 않을 수 없었을 듯하다.
또 한가지,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서방으로의 이탈을 극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가졌던 ‘제2의 러시아’로서의 그동안의 국제사회에서의 역할과도 연관되어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과거의 역사가 루마니아, 헝가리, 첵코, 폴란드 등 동구와 접경 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그들 이웃들과의 역사적인 관계 때문에 소련의 여러 공화국들 중에서도 가장 동구권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시켜 왔다.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은 제2차대전 이전까지 여러 차례 이들 국가들의 지배 하에 있었던 과거가 있다. 구체적으로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Krakow, Rzeszow와 우크라이나 영토인 Lvov, Ivano-Frankovsk, Ternopol지방은 한때는 모두 폴란드 영으로, 그 다음은 오스트리아영으로, 다시 폴란드영으로 근 6세기에 걸친 기간을 서로 주인을 바꿔간 역사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서로 국경을 달리하고 있다 해도 이들 지방에서의 상호이해나 교류는 퍽 자연스러운 것으며 지금도 라디오를 같이 청취하고 신문을 같이 보면서 소식을 공유해 오기도 했다. 또 우크라이나의 Transcarpathia지방은 1939-1944년 사이 헝기리에 속해 있었으며, 1919-1930년 사이는 첵코에 속하기도 했기에 그 지방에 생활하고 있는 헝가리인들은 아직도 거기서 그들의 학교와 주간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도 Chernovtsky는 1919-1940, 1940-1941년 사이 루마니아에 속해 있기도 하는 등 우크라이나 서부지방은 동구권과 역사적인 경험을 같이 한 동구의 축소판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가진 소연방내에서의 중심적인 위치와 그에 더한 인접 동구세계와의 강력한 역사적 연계성은 자연스럽게 소련연방시절에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공화국과 함께 소련을 대표하는 두 개의 공화국으로서의 역할을 행해왔다. 구체적으로 우크라이나는 과거 러시아와 함께 UN의 정회원국으로 활동해 왔으며, 이밖에도 UNESCO, ILO등을 비롯한 유수한 국제기구의 독립된 회원이기에 폴란드, 첵코, 동독, 항가리, 루마리아, 유고 등 7개국이 키예프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있었는가 하면 쿠바, 인도, 이집트 등은 오뎃샤에 영사관을 개설, 실질적으로 우크라이나, 특히 키예프는 소련과 모스크바의 또 하나의 대외 창구 역할을 해온 명실상부한 ‘제2의 러시아’였다. 따라서 우크라이나가 가진 이러한 국제적인 위상, 즉 ‘제2의 러시아’로서의 정체성은 소련연방의 해체와 탈 냉전기를 맞이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서구로의 이탈이나 탈러시아화를 푸틴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2022/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