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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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25-02-05 수정일수정일 25-02-05 조회8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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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무게
조 정 남 (한민연 대표)
우리 사회는 총체적인 혼돈속에 휘말려 들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으로 야기된 혼란은 이제 사회 전 영역에 걸쳐 나날이 확대 심화 되면서 우리 체제를 지탱해 나갈 최소한의 엔진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 작동을 멈춘 듯하다. 현직 대통령이 구속된 체 형사소추와 탄핵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은 역사상 전에 없던 일 일뿐아니라, 이러한 희대의 혼란 상태는 시간의 경과나 재판의 결과만으로도 완전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기도 하다. 지금의 혼란상은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둘러싼 국회와 사법부와 연관된 정치권의 문제에서 출발 되긴 하였으나, 이는 어느새 그러한 특정 영역을 크게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영역으로 파고가 흘러넘쳐 이제는 이미 국경을 넘어선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비화 되면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의 대상으로까지 떠올라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사법적인 판단도 설득력을 가질 수 없고, 그 어떤 국회나 정당의 결정이나 주장 또한 메아리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어떤 언설도 그것이 가지는 설득력은 고사하고 찬성과 반대의 아수라장에서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기조차 어렵다. 그것이 법원이든, 국회든, 행정부든, 언론계든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객관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활동하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파당성에 갇혀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안타까운 호소인(?)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법은 있어도 그것은 설득력을 가질수 없고, 재판은 있어도 그 결정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니, 더 이상 우리 사회는 법치가 통하는 사회도, 법에 의한 지배도 멀리 물 건너간 허허한 무중력 상태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누가 진정한 피고이고 누가 진정한 원고인지조차 구획해내기 어려운 안개 자욱한 어둠 속의 방황만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누가 죄인이고 누가 판관인지도, 누가 피고이고 누가 원고인지조차도 분명히 구획해 낼 수 없는 아수라이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가. 그리고 무엇이 이런 상황을 단기간에 더 넓고 깊게 전방위로 확산시키면서 극도의 카오스적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그것은 현재까지 일어난 비상계엄 사태의 진화 추이의 분석만으로는 그 해답을 찾기 어렵다. 그것의 파장이 너무 심층적이고 파고가 높고 무겁기에 그러한 혼란을 만들어 내는 원인은 보다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지점에서부터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곳으로부터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돌려야 할 부분은 우리 사회를 만들어 내 떠받들고 있는 뿌리에 대한 관심 일수 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만들고 지탱해 온 가장 원초적인 부분, 즉 우리 사회의 뿌리가 작동하지 않고서는 오늘날 같은 엄청난 동요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말이다. 우리 사회를 만들고 지탱하고 있는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 서로간에 쌓여있는 ‘권위’라는 믿음의 체계일 수밖에 없다. 권위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사회도, 사회적 질서도, 정치도 정치적 기구도, 법률도 법률적인 기구도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우리 사회의 뿌리에 해당하는 신뢰 관계인 권위가 붕괴 되거나 약화 되는 상태가 되면 그동안 그것을 바탕으로 존재하고 발전해온 온갖 인위적인 명분이나 제도나 질서는 당연히 그 기능을 발휘할 수도 또 더 이상 존재할 가치 조차 없다. 우리 사회에서 무너진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영역에서 유지되어온 기존 질서라는 것 모두는 하나같이 그것의 뿌리를 이뤄온 신뢰를 바탕으로 한 ‘권위’의 작동으로부터 그 합리성과 정당성을 보장받아 왔다. 그러던 것이 그러한 바탕을 이뤄오던 권위가 물러난 자리에서도 여전히 과거와 같이 기능을 이어가면서 사회를 유지발전 시켜나갈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은 착각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이러한 혼돈을 치유할 방법은 그것을 만들어 내는 권위의 회복에서부터 시작하지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권위의 회복’이라는 이 절박한 요청은 단순한 염원으로만 이뤄질 수 없음에 안타까움이 함께한다. 무엇이 그렇게 혼란을 치유할 수단마저 찾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가. 그것은 단순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만들어진 혼란을 정리하고 그것을 다시 원상회복 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할 ‘권위의 회복’에 대한 처방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영역, 모든 기관에 존재해야 할 권위가 외면되고 사라진 자리에서 그 어떤 지배와 피지배,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며, 당연히 이러한 사회에서는 질서가 살아 있을 수도 없고, 질서가 배제된 상태는 더 이상의 펑화로운 존속이 불가함은 분명하다. 결국 권위의 존재 여부는 특정한 조직이나 사회의 명운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며, 조직이나 사회의 정상적인 존속을 담보하는 유일의 토대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권위의 실추가 가지는 엄청난 파급력을 다시 한번 되색 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권위가 없어진 현장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은 바로 입법, 사법, 행정이라고 하는 삼권의 중심부다. 국회는 그곳이 민의의 전당이라는 명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민의가 아닌 ‘정파의 이익’, ‘파당의 이익’만이 난무하고, 민의를 대변하는 공적 영역은 사라진 지 오래다. 모든 정쟁의 판단 기준은 오직 특정 정파, 특정 인물의 생존과 그들의 선거 승리뿐이며, 여기에는 어떤 공익도, 어떤 민의도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국회가 어떤 결정을 해도, 그것이 비록 법안 성립을 위한 선거라고 해도, 그 결과는 하나같이 여지없이 무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임에는 이편저편이 따로 없다. 그러한 결정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국회의 권위가 이미 존재하지 않기에, 이러한 현상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한 현상은 그러한 국회의 결정을 옹호하지 유지 시키는데 필요한 ‘국회의 권위’의 부재가 자초한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우뚝하게 솟은 국회의사당 건물도 있고, 그 안에 모여있는 배지를 단 국회의원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회’를 만들어 내는 기구도 인적 구성체도 아니게 되었다. 거기에는 하나같이 그것이 마땅히 가져야 할 ‘국회의 권위’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가 없는 기구나 제도는 이미 생명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국회 또한 이미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민의의 대표기관’의 자리에서 ‘’민의의 배반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사법부는 어떤가. 마찬가지로 거기에도 사법부는 존재하나 사법부가 가져야 할 권위는 언제부터인가 불구의 몸이 되어 버렸다. 사법부에 권위가 존재하지 않기에 사법부는 그들의 결정이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고, 그들이 내린 결정이 비안양의 대상으로 타락된 것이다. 여기서 더이상 우리의 사법부는 그들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복종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결정에 얼마든지 시비를 걸고 대항할 수 있는 싸움의 대상으로서 그들의 지위가 급격히 강등되어 버렸다. 그 모두가 그곳에 있어야 할 사법부의 권위가 없어짐으로써 자초 된 결과물들이다. 이미 만들어진 성문법을 가지고 지켜왔던 ‘사법부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서는 그 어떤 사법적인 판단도 그것이 가지는 실질적인 구속성은 완전히 제로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떤 판결도, 그 어떤 법 해석도 그것이 가지는 구속력이나 영향력은 비웃음의 대상 이상이 아니다.
행정부는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렇게 중시해오던 권위가 없어진 틈으로 이제 그들은 한낱 정권의 시녀 이상의 존재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더더욱 최근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줄줄이 국회에 의한 탄핵의 몸서리를 온몸에 덮어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상황에서 삼권분립 아래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행정부의 모습은 이제 오래 전 교과서에서나 찾아내야 되는 형편이다. 행정부에서의 권위의 상실은 이미 오래된 것이기도, 전반적인 수준의 것이기도 해서 다시 이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듯하다. 상명하복이라는 특유의 공무원사회가 가져왔던 위계질서 속에 어느 정도 책임 행정이 기대되었으나 이제는 그들에 대한 이러한 기대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입법, 사법, 행정에서 보이는 이러한 파행적인 몰골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된 것인가. 그것은 명확하다. 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권위’가 부지불식 간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중심축인 입법, 사법, 행정 영역에서의 이러한 권위의 실추 현상은 그 밖의 다른 영역으로도 광범위하게 확산돼 가면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기능 마비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교육이며, 언론이며, 문화며, 노동이며 모든 사회영역에서의 권위의 실추 정도 또한 중앙 권력 기구들의 그것들에 비해 결코 덜 하지 않다, 당연히 자율성의 정도가 중앙의 권력 기구에 비해 훨씬 더 커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그러한 단체나 조직의 윤활유 노릇을 해야 할 권위의 존재가 악화된 결과는 중앙의 권력 기구에 못지않은 기능 마비와 업무의 비효율화가 만연되고 있다.
권위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 보다 훨씬 더 사회와 조직을 살아움직이는 촉매제이다. 그러한 촉매제인 권위가 없어진 조직이나 사회는 그것이 가진 기능이나 힘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음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사회나 조직의 존재성마저 의심케 하는 최악의 상태를 결과시키기도 한다. 한국 사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커다란 장애가 바로 이 같은 개별 기관들이 맞이하고 있는 권위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내재적인 장애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바로 각 영역에서 사라져버린 권위의 회복보다 중요한 우리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상화시킬 수 있는 명약은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치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건전성 회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각 부문에서의 ‘권위의 회복’은 외부로부터 그 처방전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오직 개별 조직 개개의 구성원 개개인 스스로가 투철한 자기 성찰과 이에 대한 각성의 길 이외에는 다른 그 어떤 방법도 있을수 없다고 사실이며, 여기서 우리 사회의 지금의 비정상을 정상화시킬수 있는 손이 너에게서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고 하는 하는 사실을 다시한번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