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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재외동포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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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정남 작성일작성일 09-01-11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28,9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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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재외동포 정책 

김용찬(한국민족연구원 연구원)


한민족공동체 건설이 제기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민족공동체 건설이라는 목표의 시비를 떠나 과거 남북한의 재외동포 정책과 각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현실이 심도 있게 분석되지 못한 것이 중요한 원인의 하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민족의 현황과 남북한의 재외동포 정책을 분석하는 것을 토대로 과제를 제출하고자 한다. 논문에서는 재외동포의 형성과 현재의 현황을 살펴보고 남북한의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 및 입장을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남북한의 재외동포에 대한 정책의 실제는 비교를 통해 서술할 것이며, 국적법에 대해서도 설명하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북한 재외동포 정책의 의미와 전망에 대해 밝히고 남한의 대응정책과 구체적인 방안을 제기했다.


1. 해외이주의 경과
 

재일동포 원형의 형성은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인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체류를 허용했고 해방 이후에도 잔류한 조선인들이 재일동포 1세대를 형성했다. 반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에 의해 형성된 재러동포들은 조선 내부의 정치·경제적인 요인에 의한 자발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재미동포는 분단 이후 남한에서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해간 한국인들이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다. 

1) 재일동포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은 '한일병합' 이전의 일이다. 1883년 16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일본 체류 조선인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시기 초기에는 체류자의 대부분이 유학생이었으나, 1911년 오사카부(大阪府)의 방적공장이 조선인을 고용한 것을 시작으로 취업을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가는 조선인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일본에 체류하게 된 조선인들은 1920년대부터 '조선인부락'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재일조선인 수는 240만 명에 달했으며 1946년 3월에는 64만 명 가량이 일본에 남아있었고, 당시 잔류한 조선인들이 재일동포 1세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2) 재러동포

조선인들이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조선인들은 장기간 러시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계절에 맞추어 거주지를 이동한 사람들이었다. 1869년 후반기에는 6천5백 명의 조선인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당시 한인들의 이주가 증가한 이유 중의 하나는 러시아가 한인의 이주를 장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거주의 형태로 조선인이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부터이다. 구한말 흉년과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자 많은 조선인들이 소련 원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한일병합' 후에는 항일투쟁을 위해 월경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소련 원동에 정착한 조선인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가 있기 직전 약 18만 명에 달했다. 

3) 재미동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미동포들의 원형은 다양한 형태의 미국정착에 의해 형성되었다. 재미동포는 1900년대 초반 미국으로 이주한 정치망명객과 노동이민자들, 미국인과 결혼한 사람들, 입양아, 유학 중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 1965년 이후 급격하게 증가해 온 가족이민들을 포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된 1882년부터 노동이민단이 최초로 하와이에 도착한 1903년까지의 시기이며, 둘째 7천명의 노동이민이 도착한 시기부터 아시아인의 이민을 금지시킨 1924년까지의 시기, 셋째 1945년 해방 이후 1965년까지의 시기, 넷째는 가족이민이 대량으로 이루어진 1965년 이후의 시기이다. 한인들이 대량으로 미국에 가족이민을 가면서 재미동포 사회는 양과 질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4) 재중동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은 일본의 토지정책과 간도지방의 토지가격과 토질, '한일병합'이라는 정치경제적 이유에 의해 간도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1936년 통계는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의 총수를 87만 5천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은 중국과 일본 양측의 음모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압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망명한 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한 일본측의 조치는 오히려 만주지역 조선인들의 항일정신을 더욱 고양시켰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자 조선족은 연변 자치주를 형성하고 중국국적을 소유하게 되었다. 1952년 당시 연변자치주는 1시 5현으로 구성되었다.



<표1>해외이주연표


해외이주사
 
시기
 내용
 인원(단위: 명)
 
1860년대
 흉작으로 러시아 이주
 6,500
 
1890년
 서재필 최초로 미국시민권 획득
 
 
1903년
 최초의 노동이민단 하와이 도착
 7,000
 
1905년
 멕시코로 계약노동자 최초 이주
 
 
1911년
 일본 오사카의 방적공장이 최초로 조선인 고용
 
 
1915년
 만주·연해주의 조선인들이 전시노동력으로 시베리아, 유라시아, 중앙아시아로 이주
 20,000
 
1920년대
 일본에 '조선인부락' 형성
 
 
1921년
 멕시코 이주 노동자들 중 일부 쿠바로 재이주
 300
 
1929년
 소련 영내 조선인들 중 상당수가 만주·조선으로 이주 시작
 
 
1936년
 당시 만주 거주 조선인
 850,000
 
1937년
 재소 조선인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180,000
 
1945년
 1933년부터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무자

8월 15일 당시 재일조선인
 722,787

2,400,000
 
1946년
 귀국 후 잔류한 재일조선인
 640,000
 
1955년
 최초의 캐나다 이민

재일동포 북송 시작
 
 
1962년
 한국정부 해외이민법 제정 후 집단 이민 시작
 387
 
1963년
 광부 독일에 취업
 247
 
1972년
 뉴질랜드 이민 시작
 
 
1984년
 재일동포 북송 종료
 93,340
 
 
 

5) 해외이주자

이민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해외이민법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한다. 법제정 이후 36년 동안 해외 이주자수는 83만 명에 달하고 있다. 해외이주자의 증가에 따라 1991년 한국정부는 해외이주 허가제를 신고제로 전환하였다.


<표2> 해외이주 현황

지역별 (단위: 명)

지역

구분
 미국
 카나다
 호주
 뉴질랜드
 기타
 총계
 
1999년
 5,360
 6,783
 302
 174
 36
 12,655
 
점유비(%)
 42.4
 53.6
 2.4
 1.3
 0.3
 100
 
전년대비증감

(%)
 ▽38.6
 △42.1
 ▽6.2
 ▽81
 ▽25
 ▽9.4
 
 

 

형태별 (단위: 명)

지역

구분
 연고초청
 국제결혼
 취업이주
 사업이주
 기타
 총계
 
1999년
 3,342
 1,464
 5,267
 2,582
 -
 12,655
 
점유비(%)
 26.4
 11.6
 41.6
 20.4
 -
 100
 
전년대비증감

(%)
 ▽49.6
 △8.8
 △38.4
 △18.5
 -
 ▽9.4
 
 

출처: 외교통상부,『외교백서』2000(http://www.mofat.go.kr/main/top.html), 검색일: 2000. 7. 11

최근 해외이민의 경우 생활환경이 좋은 국가를 선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이민선호 대상 국가이고, 90년대 들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새로운 이주국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99년의 경우 해외이주는 미국과 캐나다로 집중되었지만 캐나다 이민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이민의 형태별 특징은 과거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98년에 비해 연고초청이 줄어들고 취업이주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2. 재외동포 현황

<표3> 연도별 재외동포 현황

 

주: 91년부터 중국동포 및 독립국가연합동포 포함

출처: 한민족네트워크(http://www.okf.or.kr/gkc-data/info/m110.html), 검색일: 2000. 7. 11


남한정부에서는 91년까지도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을 재외동포 현황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70년대부터 꾸준히 재외동포의 수가 증가한 것은 해외이주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표4> 지역별 재외동포 현황


지역
 동포수
 백분율(%)
 전년비증감율(%)
 
아주
 2,811,300
 49.81
 0.35
 
일본

중국

기타
 660,214

2,043,578

107,508
 11.70

36.20

1.90
 -6.08

2.92

-4.79
 
미주
 2,271,393
 40.24
 2.76
 
미국

카나다

중남미
 2,057,546

111,041

102,806
 40.24

1.97

1.82
 2.76

0.83

3.40
 
구주
 551,324
 9.77
 5.50
 
독립국가연합

독일

기타
 486,857

25,669

38,798
 8.63

0.45

0.69
 8.17

-16.23

-7.27
 
중동
 6,326
 0.11
 -15.00
 
아프리카
 4,215
 0.07
 23.61
 
총계
 5,644,558
 100.0
 1.79
 
 
출처: 외교통상부,『외교백서』2000(http://www.mofat.go.kr/main/top.html), 검색일: 2000. 7. 16



 

재외동포의 거주상황은 다른 국가와 달리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정치경제적인 이유에 의해 이주하게 된 일본, 중국, 미국, 독립국가연합의 동포수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최근 논의되고 있는 한민족네트워크가 몇 개 지역만을 포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세계 전지역과 국가를 포함하는 네트워크 형성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북한은 '해외동포'의 발생이 일제시대에 대규모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일제 식민지 통치 당시 조선인의 12%가 해외로 이주하였고 현재 재외동포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조선인들은 식민통치가 지속되면서 생존위협과 억압을 피해 해외로 탈출하게 되었다. 일본지역의 경우는 일본정부의 징용정책이 재외동포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북한 당국은 자신들이 식민지 이전 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 시대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자신의 공민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북한의 주장대로 한다면 남한에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해외동포'이며 자신들이 공민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공민으로 주장하는 '해외동포'는 주로 재일동포에 국한되고 나머지 지역의 동포들은 '해외동포' 수준에서 언급한다. 그리고 70년대 들어서면서 재외동포를 공민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표현은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표5> 재외동포단체현황 총계

지역
 1995
 1997
 증감
 
일본
 266(1)
 291(1)
 25
 
아시아(일본제외)
 139(23)
 188(24)
 49
 
북미
 1,065(2)
 1,089(2)
 24
 
중남미
 151(19)
 182(19)
 31
 
유럽
 427(32)
 475(30)
 48
 
중동
 45(16)
 50(16)
 5
 
아프리카
 26(17)
 28(17)
 2
 
총계
 2,119(110)
 2,303(109)
 184
 
 

주: ( )은 국가수

출처: 한민족네트워크(http://www.okf.co.kr/gkc-data/info/m112.html), 검색일: 2000. 7. 19


재외동포 단체는 미국지역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재미동포들이 미국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상호협력관계의 유지력이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럼에도 한국정부는 민단과 조총련의 대립이 지속되어왔던 일본지역에서 민단의 우위를 보장해주기 위해 민단계 단체들을 중심으로 지원하는 양태를 보여왔다. 이러한 조처들은 여타지역 재외동포들로부터 반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한다.


 

3. 남북한의 재외동포에 대한 정책

1) 재외동포 정책의 역사

남한의 제1·2공화국 시기 정부의 재외동포정책은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제3공화국에 들어서는 '해외이주법'을 통해서 해외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정책의 목적은 국내의 과잉인구와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이는데 있었다. 또한 북한과의 대결 속에서 재외동포의 친북화를 막기 위해 감시와 통제정책에 중심을 두었다. 당시 정부의 자세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는데 중국과 구소련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동포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반면 북한은 50년대부터 일본지역을 시작으로 재외동포 정책을 전개해왔으며 70년대에는 이념을 초월해 재미동포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정책들을 시행해왔다. 재일동포들에 대해서는 직접 귀국하게 하는 조치인 '북송사업'을 상당기간 전개했다. 남한정부의 동포들에 대한 정책이 변화를 겪게 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서였다. 1993년 정부는 '신교포정책'을 발표하였다. 이 정책은 재외동포의 거주국에서의 성공적인 경제적·사회적 적응을 지원하고 재외동포와 모국과의 정신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최근 정부는 재외동포 정책의 기본목표를 재외동포들의 혈통, 문화 및 전통의 뿌리가 한국에 있음을 유념하면서 거주국 사회 내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또한 존경받는 모범적인 구성원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국제법, 국내법 및 거주국의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2) 재외동포의 규정

기존에는 해외에 있는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재외국민', '해외교포', '교민'등이 혼용되어 왔다. 과거 외무부에서는 '교민'과 '재외국민'을 주로 사용했다. 그러던 중 1997년 3월 27일 해외한인들의 공식창구로 재외동포재단을 설립하면서 재외동포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령'에서는 재외동포의 범주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자 또는 영주할 목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재외국민)이며, 둘째는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 또는 그 直系卑屬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 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자"(외국국적동포)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60년대부터 '해외동포'에 대한 지위규정과 정책방향 등을 공식적인 표명과 법률을 통해 확립해왔다. 북한은 '해외동포'중 상당수를 해외조선공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해외동포에 대한 정책방향이 '민족적 권리와 리익'에 있음을 밝혔다. 또한 사회주의 헌법과 국적법 등에서도 '해외동포'의 상당수를 자신들의 공민으로 규정하고 공민에 준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밝혔다. 72년 12월 27일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은 15조와 65조에서 '해외동포'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회주의 헌법에 나타난 '해외동포'에 대한 표현은 대외선전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실시했던 정책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그리고 1963년 10월 9일에 공포된 국적법에서는 "인민공화국 창건 이전에 조선의 국적을 소유하였던 조선인과 그의 자녀로서 본법 공포일까지 그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자" (제1조 1항)는 모두 '공민'으로 인정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해외 동포'가 거주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거나 남북정권 수립 이전의 국적을 소유했던 자 모두에게 공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매우 포괄적인 범위의 규정이다. 한편 제2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은 그의 거주지에는 관계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적 및 법적 보호를 받는다"고 밝히면서 '해외동포'에 대한 적극적 정책을 천명했다.


 

3) 재외동포 사업 기구

남한은 조직적으로는 재외동포정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재외동포사업을 주도적으로 전개할 기구로 1998년에야 비로소 재외동포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재외동포재단의 역할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외교통상부와 통일부 등의 정부기구에서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분담하고 있는 형편이다.

북한의 '해외동포'에 대한 정책을 담당하는 부서는 노동당과 정무원에 이원적으로 존재하며 각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체계를 갖고 있다. 북한은 통일전선의 지도적 역량을 노동당에 두고 당 대남사업 담당비서 직속기관으로 통일전선부를 78년 1월에 설치했다. 이후 북한은 당 연락부와 통일전선부를 중심으로 조직확산을 지도해왔다. 또한 노동당 산하에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중심기구로 설치, 동포사회에서 통일전선의 형성에 주력했다. 한편으로는 '해외동포'에 대한 각종 사업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정무원산하에 해외동포위원회와 교포사업총국을 두어 동포 방북 주선 및 친북활동 지원을 전개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해외주재 공관이나 무역상사를 이용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유엔 북한 대표부가 중심이 되고 있으며 그 밖의 지역은 해외공관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들 기관들은 동포들을 상대로 하는 각종 선전물 배포와 함께 수시로 기념 행사, 문화행사, 학술세미나 등을 개최해왔다.


 

4) 재외동포 관련 법률

1998년 10월 입법예고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특례법"에서는 외국국적 소지 재외동포들에게 내국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여 출입국과 체류, 국내정치·경제활동에서 차별을 없애고자 했다. 국내에서의 재산권 행사를 보다 자유롭게 하고, 정치활동에 있어서도 90일 이상 장기체류자일 경우에는 국내에서 실시하는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한이 재외동포에 대한 법률을 별도로 제정한 것은 없었다. 최근 북한은 재미동포를 비롯한 재외동포들의 투자를 유치하고 보장해주기 위한 자유경제무역지대의 출입 및 사업활동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5) 남북한 재외동포 정책의 실제

(1) 교육정책

남한정부가 재외동포에 대한 교육정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북한의 조총련에 대한 민족교육의 강화가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에 있는 민단계 학교에 대한 지원에 국한되었다. 60년대까지 재외동포 교육은 일본지역에 집중되었다. 1961년 교육보조비 지원과 교육요원 파견, 일본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육문화센터 10개소가 창설되었다. 1970년대에는 일본지역 이외의 지역에서도 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7년에 재외국민교육에 관한 규정이 공포되었다. 1978년 해외에 수립된 토요학교의 수는 17개국 78개교에 달했다. 1980년대에는 교원과 학생의 모국 초청연수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으며 재외한국교육원의 개설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 들어서는 북방외교의 추진으로 구소련 지역과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들에 대한 교육을 확대해 나갔다.

한국정부의 재외동포 교육사업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997년 교육부는 당시 재외동포 관련예산의 절반 가까운 200억원을 재외국민 교육사업에 지출했는데 대부분의 돈이 일시체류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한 한국학교와 한국교육원에 관련예산의 대부분을 배정했으며 재외동포사회가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천여개 한글학교에 대해서는 8억원 가량을 배정했을 뿐이다.

<표6> 한국학교의 재일동포 현황


학교
 전교학생수
 재일동포자녀
 본국주재원자녀
 
학생수
 %
 학생수
 %
 
東京
 852명
 107명
 12.6
 745
 87.4
 
建國
 612명
 446명
 72.9
 166
 27.1
 
金剛
 233명
 167명
 71.7
 66
 28.3
 
京都
 103명
 102명
 99.0
 1
 1.0
 

 1,800명
 822명
 45.7
 978
 54.3
 
 
출처: 1995년 민단중앙본부 문교국조사, 박병윤, "재일동포민족교육의 모순과 해결정책,"『한민족공영체』제6호, 91쪽에서 재인용.


남한은 한국학교의 형태로 학교를 설립해왔다. 과거에는 남한을 선전하는 교육이 주로 행해져왔다. 그나마 동포들을 위한 민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동경한국학교의 경우 학생들의 90% 가까이 남한에서 온 학생들로 재일동포 자녀들은 아니다. 즉 단기간 일본에 머무르는 남한 국내인들의 자녀가 한국학교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65년 체결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협정'에서 재일동포들이 일본학교에서 '일본사람과 같은 교육'을 받는 교육의 '기회균등'만 보장되어 있을 뿐 민족교육에 관한 내용은 배제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재일동포들은 일본학교에서 방과 후에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민족학급을 설치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91년 한일외무장관간의 '91년각서'에서 일본정부는 지방자치체가 공립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민족학급의 운영에 대해서 배려해줄 것을 결정했다.


 

<표7> 남북한의 재일동포 교육



 남한
 북한
 
교육정책 시작 시기
 1960년대 초반
 1950년대 중반
 
학교형태
 정규학교 이외에 교육문화센터
 정규학교(종합대학 보유)
 
교육지원
 교육보조비지원, 교육요원파견, 모국 초청연수프로그램
 매년 교육지원금 지원과 방북프로그램 진행, 훈장수여
 
교육내용
 남한체제선전, 민족문화
 북한체제 및 주체사상 선전, 민족어교육,
 
 

 

북한은 재일동포에 대한 민족교육을 전개한 것이 교육사업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50년대부터 조총련계 학교에 대한 지원을 해왔기 때문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지역의 동포들에게는 별다른 정책을 시행하지 못했다. 사회주의권 붕괴의 영향으로 재중동포와 구소련 지역동포들이 친남한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자 조선족 자치주 지역 학교에 교원을 파견하고 교재를 배급하는 사업을 전개해 호응을 얻기도 했으나 경제위기로 인해 지속성을 가지지는 못했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교육정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민족교육강화이고 둘째는 교육지원금 송출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지원사업이다. 민족교육강화를 위해 조총련계 학교에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목적을 지시했다. 또한 일본에 종합대학을 신설하기 위해 조총련을 지원해서 조선대학교를 설립했다. 김일성은 민족교육에서 언어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조총련은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민족어'를 광범위하게 보급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민족어'는 다름아닌 '평양문화어'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민족교육강화를 위해 전개된 사업은 운동의 형태로 전개된 '사상학습'이었다. 70년대에 북한은 '조선사람되찾기' 운동과 '주체적인 해외교포교육',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등을 통해 사상학습을 철저히 할 것을 지시했으며 주된 대상은 교원들이었다. 그리고 1979년 '재일조선청년학생대표단'의방북을 시작으로 매년 각급 학교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또한 조총련계 학교에 교원들과 학생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각종 훈포장을 수여하였다. 북한의 재일동포에 대한 교육지원비 송금은 1957년 4월에 최초로 시행되었다. 당시 북한은 전후 복구건설을 벌이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1억 2천만엔을 조총련에 보냈다. 교육지원비와 장학금은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나 적십자를 통해 전달되었으며 일본의 재일본조선인중앙교육회가 수령했다. 교육지원비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계속 증가했으나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감소하기 시작했다. 교육지원비는 1981년 17억엔에서 1990년 5억엔으로 감소했으며 조총련이 운영하는 학교 학생 수도 절반 이상이 감소했다. 90년대 북한의 교육지원금 송금은 불규칙해졌으며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에나 전보다 감액된 원조비가 송금되었다.

남한과 북한의 교육사업은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유사성을 가지지만 역사와 지속성을 비교해보면 북한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민족교육을 통해 재일동포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었으며 이것은 조총련 조직강화에도 복무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권 붕괴와 경제난은 북한의 민족교육 지원을 급격하게 축소하게 했고, 반면 남한은 지역적으로 확대된 교육을 할 수 잇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효과적인 교육정책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각 국가의 특성에 맞는 사업이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돈을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내용과 방침을 정해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2) 재외동포 초청 및 모국방문사업

 

7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를 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북한내 가족찾기 사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의 생존을 확인한 해외동포들은 다양한 조직과 형태로 북한을 방문했다. 70년대 말까지는 개별적 재북 연고자를 중심으로 연평균 3명의 해외동포를 초청하였으나 79년 이후에는 평양에서 개최된 제35회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를 계기로 북한에 연고가 있는 재미동포들을 '조국방문단' 등의 형태로 단체초청에 주력하여 방북 숫자가 17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81년에는 북미지역에서 '금강산 관광단' 모집 등에 의해 3명의 동포를 추가로 초청하였으며 82년에 들어서도 36명의 재외동포를 초청했다. 또한 초청대상 선정에 있어서는 거주국 정부에 영향력 있는 교수, 학자, 과거 각계에서 유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재외동포들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1981년 말에 북미지역 동포중심의 '금강산 관광단'을 모집하여 초청했던 것은 북한이 재북 연고자 중심에서 일반 무연고 동포까지 초청범위를 확대시킨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북한은 재외동포들의 방북 기간 중 초청대상의 비중에 따라 김일성, 김일등 당·정·통일전선 관계자 및 해외동포원호회 등의 고위급 인물들과의 면담과 함께 평양시 및 지방도시 환영군중 대회, 연회개최 등으로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 그리고 방문한 재외동포들을 대외선전 목적하에 전시용으로 개발한 만경대, 조선중앙역사박물관, 평양산원, 미림갑문, 금강산 등지에 안내하여 북한 사회주의의 발전상을 선전했다. 재일동포들의 북한방문은 1979년 8월부터 새로운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즉 재일동포들은 참관과 휴식을 기본으로 하는 '재일동포단기조국방문단'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재일동포의 방문은 기존 조총련계 간부들에 국한되었던 북한방문을 일반 재일동포들에게까지 폭넓게 확대하려는 북한당국의 의도를 나타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기방문단'에 참여한 재일동포들중에 많은 숫자가 북송동포들의 가족이거나 북한에 친척을 둔 사람들이어서 실질적으로는 대중적인 재일동포들의 북한방문이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미국에는 '해외교민가족찾기회'와 '귀향회'가 조직되어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이산가족의 방문을 주선했다.

북한은 89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열면서 북미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대거 초청하였다. 초청된 동포들에게는 가족과 친척의 명단만 적어내면 상봉할 수 있는 특혜를 베풀었다. 사실상 재외동포들이 북한을 방문하려는 동기도 가족상봉에 있었던 것이었고 이러한 방문동기를 북한당국이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북한은 95년에 '국제평화를 위한 평양 체육 및 문화축전'을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주최로 4월 22일부터 30일까지 개최하면서 북미지역의 동포들을 초청했다. 한편 북한은 94년 8월 재외동포 청소년을 상대로 '송도원 국제소년야영'을 개최해 북한으로 초청했고 재중동포·재소동포, 재캐나다동포 소년야영단 등이 참가했다. '국제소년야영'은 범민족대회에 참가하려고 북한을 방문한 재외동포들의 자녀가 많은 수를 차지하는 소규모의 행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99년 3월 북한은 사회안전부에서 '흩어진 가족 찾아주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해외동포영접총국'(해외동포원호위원회 후신)을 통해 '해외동포'들의 가족을 찾아주는 사업을 전개했다. 이 사업의 결과로 실제로 일부 재외동포들이 가족을 찾았으며 북한방문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북한의 해외 이산가족 찾기 사업은 재외동포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남한은 북한에 비해 재외동포들의 방문을 상당 기간 봉쇄하고 있었다. 이승만정권은 1955년 일본에서 조총련이 성립되자 당분간 전체 재일동포의 한국방문을 금지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남한정부의 입장은 일본정부의 한국왕래 제한으로 이어졌다. 50년대와 60년대 남한정부는 북한의 공세적인 재외동포정책에 밀려서 수세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급기야는 재외동포의 방한도 철저히 통제하는 입장을 취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재외동포 방문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60년대 중반부터 민단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70년대 초반 재미동포들이 한인회를 조직하기 시작하면서 방문은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1년 7월 미국내 5개 도시 한인회 대표들은 서울에서 재미한인총연맹 발기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정부는 1975년에는 13개국의 재외국민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재외국민통일회의를 개최했다.

재외동포의 집단적인 한국방문은 조총련의 모국방문이 가장 큰 사건이었다. 1975년 9월에 조총련 모국방문 추석성묘단 1진이 내한했으며 박정희는 조총련 모국방문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당시 남한에서는 빈곤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방문돕기 성금운동이 전개되었다. 정부에서는 '재일동포모국방문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재일동포를 위한 공원묘역을 충청남도에 조성했다. 일본에서는 조총련 내부에서 모국방문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조총련의 모국방문에 대해 남한 정부가 주력을 다한 것은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재외동포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지역에서 선차적으로 조총련을 분열시키고자 노력한 결과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76년 해외동포 모국방문추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정부는 모국방문사업을 확대해서 일본지역 이외의 동포들에게도 모국방문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재외동포들이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대해 반대투쟁을 전개해나가기 시작하자 모국방문 사업은 축소되었다.

80년대 들어서 정부는 올림픽 유치를 기반으로 해서 재외동포들의 모국방문과 기부활동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1년 11월 재일 청년상공인연합회가 모국방문을 했으며 올림픽 기금을 기탁했다. 전두환 정권은 재미 모국상품 구매사절단을 초청해서 국내상품을 구입하게 했다. 90년대 들어와서 사회주의권 붕괴와 세계화의 진전은 재외동포들의 왕래를 급격하게 증가케 했으며 중국과 구소련 지역 동포의 방문도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족 및 구소련 지역 동포들이 대거 남한을 방문하거나 체류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해당지역 동포들의 반감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세계한민족축전을 통해 100여개 넘는 국가의 재외동포들을 초청해서 다채로운 행사를 전개해왔다.

(3) 민족재통합정책과 재외동포

북한은 1979년 1월 23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성명을 통해 '대민족회의'를 제안하고 통일촉진 4개항을 채택했다. 또한 북한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안에서 '최고민족련방회의'를 구성할 때 '해외동포'를 적당한 수 포함할 것을 천명하였다. 시정방침에서는 해외동포에 대한 지원을 언급하고 있다. 즉 연방정부는 모든 '해외동포'들이 '주권참여권'을 가지도록 할 것이며,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통합국가를 방문하거나 자유롭게 귀국 및 정착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북한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안을 해외에 있는 동포들에게 선전하는 사업은 이후 계속적으로 진행된다. 93년 4월 7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는 '7천만겨레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조국통일'은 민족적인 문제이며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은 전체 민족의 행동강령이라고 주장했다.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된 호소문과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은 양형섭의 명의로 남한과 재외동포의 주요인사들에게 발송되어졌다.

1988년 12월 9일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범민족대회개최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 후 예비 실무회담개최문제로 난항을 겪은 후 1990년 8월 한국과 북한에서 범민족대회가 따로 개최되었다. 북한측은 1990년 8월 15일 판문점 북측지역에서 범민족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참석인원은 총 743명으로 그 구성을 보면 북한대표 111명, 한국대표 1명, 해외대표 631명이었다. 1990년 8·15 북측 범민족대회에서는 남·북한 및 해외의 통일운동 조직 연합체로서 범민족대회 상설기구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결성되었다. 범민련 의장단 등 임원들의 선출을 보면 14명의 공동의장에 허담, 윤기복, 여연구 등 북한의 기존 대남문제 전문가들과 해외대표는 한민련 중앙본부 의장 정규명, 한통련 의장 곽도의 등 친북인사들로 구성되어졌다. 재외동포들은 1960년 '영세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안할 정도로 남북한 통일문제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그럼에도 남한정부는 북한이 7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해외동포에 대해 통일정책을 선전하고 통일과정에 참여시키는 동안에도 언급조차 하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박정희 정권까지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통일문제에 대한 정책적 고려는 전혀 없다시피 했는데 이유는 체제경쟁과 북한의 적극적인 재외동포 정책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유신체제에 대한 재외동포들의 반감도 정부가 해외동포를 논의의 파트너로 삼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경제성장을 통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자 해외동포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재외동포까지 포괄하는 북한이 제기한 '대민족회의'를 받아들이로 하고 준비작업에 들어갔던 것이 한 예일 것이다. 1982년 2월 1일 발표된 「20개 시범실천사업」제의 내용 중에는 재외동포들의 조국방문을 공동으로 주관하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 들어서는「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에서도 재외동포의 자유로운 남북왕래가 이루어지도록 문호를 개방할 것을 제안했다. 1988년 7월 16일 7·7선언의 후속조치를 발표했다. 재외동포의 남북한 자유왕래를 위해 영주권소지자와 거주여권소지자의 북한방문을 허용, 해외에 거주하는 북한국적 동포에게도 모국방문 허용, 공산권 거주 동포의 모국방문 허용 등을 밝혔다. 당시 이러한 제안은 경제발전을 통한 대북우위확보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 등으로 인한 자신감의 신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통일정책은 통일과정에서 철저히 재외동포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 북한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었다. 즉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방문 등은 허락할 수 있지만 정치적인 개입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노태우정권에서 발표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나 1994년 김영삼 정부에서 발표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에서도 그러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재외동포의 교류에 대한 부분도 공시적인 언급은 사라졌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의 후속조치로 개최된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조총련계 동포의 한국방문이 결정된 것은 재외동포 교류와 자유왕래가 실현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재외동포의 통일논의 참여가 보장될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재외동포에 대한 통일정책의 선전을 위해서 남한정부는 70년대 재외국민통일회의를 만들어 재외동포들을 초청해 회의를 개최하는 방법을 취했다. 80년대 들어서는 민주평통 해외지회를 만들기 시작해서 정부의 통일정책을 선전하고 모국방문 기회를 제공했으며 90년대에는 민주평통을 지역적으로 확대하면서 통일부 주최의 한민족통일문제토론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통일문제 토론회는 서울에서 시작되었지만 중국 등 해외에서도 개최해오고 있다.


 

4. 남북한의 국적법

1) 남한의 국적법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제헌국회는 1948년 12월 20일 법률 제16호로 국적법을 제정하였고 이후 국적법은 1962년, 1963년과 1976년, 1997년에 개정되었다. 4차에 걸친 개정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제1차 개정에서는 '외국인이 혼인, 인지 및 귀화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할 경우에는 국적취득일로부터 6개월 내에 원국적을 상실해야 한다'는 조항과 '국적회복심의위원회의 건의가 있는 경우 한국 국적을 상실했던 자가 대한민국에 주소를 가지지 않는 경우에도 국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다'는 조항이 신설되었다.

제2차 개정에서는 '귀화자의 경우 대통령 등 특정 공직의 취임을 금지하고 있던 규정을 삭제하여 평등권을 보장'하고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이 6월내에 종전에 보유하던 외국국적을 상실하지 아니한 경우 우리 국적을 상실하도록 하여 이중국적을 방지'하였다. 1977년 12월 13일 공포된 개정 국적법은 이중국적의 강제정리제도를 채용하였다. 즉 이중국적자는 22살까지 한국국적을 선택하지 않으면 한국국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의 적용은 예를 들면 일본인과 한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이중국적자는 굳이 한국국적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한국국적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것이다. 제3차 개정에서는 국적회복심의위원회를 폐지하였다. 1997년 12월 13일 개정된 국적법은 부모양계혈통주의의 도입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했다.



<표8> 남한국적법의 변화


개정
 시기
 특징
 
1차개정
 1962년
 6개월 이내에 원국적 상실, 국적회복 요건
 
2차개정
 1963년
 귀화자의 공직취임 보장, 이중국적 방지
 
3차개정
 1976년
 국적회복심위위원회 폐지
 
4차개정
 1997년
 부모양계혈통주의
 
 

2) 북한의 국적법

북한의 법체계상 '공민'은 '북한국적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국적'은 곧 '공민권'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국적에 관하여 헌법상 근거조항을 둔 것은 1992년 개정된 헌법에서부터이다. 1992년 개정헌법 제5장 제62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 되는 조건은 국적에 관한 법으로 정한다'고 규정하여 국적 법정주의를 명문화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북한은 정권수립 후 15년이 지난 1963년 10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법'을 채택하고 공포했으며 1995년 3월 23일 국적법을 개정했다. 북한의 구 국적법은 전문 10개조로 되어 있었으나 개정된 신 국적법은 전문16개조로 구성되었다. 이번 국적법 개정의 주된 내용은 구 국적법상에는 없었던 무국적자에 대한 국적법상 법률관계를 명확히 한 점, 민법 등 다른 법령상의 변경내용을 반영한 점, 국적관련 사무처리절차를 명확히 규정한 점, 그리고 시행상 불명확했던 사항을 보완하고 법률체제를 정비한 점을 들 수 있다.

구체적으로 신구 국적법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 국적법 제2조에서 '무국적자'를 추가한 것은 무국적자에 대해 배려하는 국제적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무국적자에 대해 외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국적법에서는 무국적자를 귀화대상에 포함시켰으며 무국적자의 자녀도 북한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공민의 보호에 구 국적법에서는 '거주지'에 관계없이 법적보호를 받는다고 하였으나 신국적법에서는 체류지를 추가했다. 국적사무처리 절차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고 북한의 외교 또는 영사대표기관을 활용하도록 했다. 북한국적을 상실한 자는 청원에 의해 회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적회복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국적과 관련해 외국과 체결한 조약에서 이 법의 내용과 다른 것을 정한 경우에는 그 조약에 따른다'는 국제법우선의 원칙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였다.


 

3)남북한 국적법 비교

남북한 국적법의 차별성은 몇가지 점에서 두드러진다. 첫째 북한이 재외동포와 남한국민들도 '공민'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반해 남한은 최초의 한국인의 범위를 설정하는 경과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국적의 취득에서도 북한은 1963년부터 부모양계혈통주의를 채택해온 반면 남한은 최근 개정된 국적법에서 비로소 부모양계혈통주의를 채택했다. 그리고 북한은 구체적 연령을 명시해 국적취득 절차를 세부적으로 달리하고 있다. 또한 남한의 국적법은 국적단일주의에 충실하고 국적이탈에 대해 매우 관대한데 반해 북한의 국적법은 이중국적에 관해 명시적인 규정은 두고 있지 않으며 국적이탈에는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표9> 북한의 신구국적법 비교


구분
 구국적법
 신국적법
 차이
 
서문
 존재하지 않음
 존재하지 않음
 신국적법에서는 제1조에서 국적법의 의미와 효용에 대해 기술
 
공민규정
 제1조 2항

외국인으로서 합법적 절차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자
 제2조 2항

외국공민 또는 무국적자였던 자로서 합법적 절차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자
 신국적법에서는 국적을 취득한 무국적자를 공민으로 인정

 
공민의 보호
 제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은 그의 거주지에는 관계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적 법적 보호를 받는다.
 제3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은 그의 거주지 또는 체류지에 관계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적 보호를 받는다.
 신국적법에서는 외국에 일시 체류하고 있는 공민에 대한 보호 규정을 추가
 
속지주의 원칙
 제4조 2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역내에 거주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과 외국공민간에 출생한 자녀들
 제5조 2항

공화국 령역 내에 거주하는 공화국 공민과 외국공민 또는 무국적자간에 출생한 자녀들

제5조 3항

공화국 령역에 거주하는 무국적자간에 출생한 자녀들
 속지주의원칙의 고수 속에서 무국적자의 자녀들의 국적 취득 허용
 
외부인의 국적취득

 제6조

외국인은 민족별 및 인종별에 관계없이 그의 청원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제6조

무국적 또는 외국공민은 청원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무국적자의 국적 취득 허용
 
입적 및 제적결정
 

제10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에의 입적 또는 그로부터의 제적은 본인의 청원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결정한다.
 제15조

공화국국적에의 입적청원 또는 공화국국적으로부터의 제적청원에 관한 결정은 중앙인민회의가 행한다.

 제적결정 기구가 중앙인민회의로 변화
 
 

 

5. 재외동포 정책의 새로운 과제

60년대와 70년대 북한은 재외동포를 자신의 '공민'으로 규정짓고 적극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북한에서 '공민'은 국가의 사회정치생활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포괄성을 가진 개념이다. 따라서 민족과 국가가 등치되는 상황하에서 민족문제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공민'의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자신들의 국민으로 인정하는 한 해외동포와 남한의 국민은 더 이상 분리와 방관의 대상이 아닌 적극적인 통합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물론 단일한 혈통과 조상이라는 전근대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이후 미주지역 재외동포와의 교류가 빈번해지자 북한은 재일동포를 제외한 재외동포들에게 '공민'의 호칭을 부여하는데 주저했으며 80년대부터는 통상 모든 재외동포들에게 재외동포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전환은 북한사회에서 '공민'은 정치적으로 사상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재외동포들은 그렇지 못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북한의 재일동포 민족교육 및 생활에 대한 지원, 중국과 구소련 지역 동포에 대한 문화교육 등은 해당지역 동포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구체적 예로 96년 북한은 경제난 속에서도 지진 피해를 입은 재일동포를 지원하기 위해 거액을 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 구 소련지역에도 '조선통일지지위원회'가 건설되어졌고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기존 조직들이 새로운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재외동포정책의 강한 지속성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중반 이후 대내외적인 환경변화는 북한의 정책에 있어 부분적인 변화를 강제하게 했다. 변화의 핵심은 공세적인 민족정책이 수세적인 민족정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체제의 유지가 사활적인 문제로 부각되었고, 남북한간의 공존전략이 선택되었다. 재외동포에게는 경제적 지원 요청과 북한체제의 생존 가능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주력해야 했다. 일본과 미주 지역에서 재외동포에 대한 정책의 축소로 인해 재외동포들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중국과 구 소련 지역 동포들에게 새로운 정책을 펼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남한정부는 기본적인 원칙을 유념해 두면서 정책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세계화 시대에도 불구하고 단일민족의 상징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한민족은 민족을 중요한 삶의 기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남북한 국민과 재외동포들은 단순히 경제적 성장을 민족정통성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따라서 남한의 민족정체성을 보존하고 발굴하는 작업은 북한의 체제정통성 확보를 위한 아전인수격 민족상징의 조작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재외동포 특례법에 대한 논란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남한의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은 전환되어야 한다. 미국과 일본 지역 해외동포에 대한 우대정책은 단시일 내에 이익을 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여타 지역 재외동포들을 소외시켜 민족재통합과 한국의 국제위상 신장에 결정적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의 경우 체제를 초월해 미국과 일본, 중국과 구 소련 지역 해외동포들에게 교육과 교류, 친선 등의 정책을 펴왔다. 조선족 사기 사건 등으로 민심을 잃은 남한이 중국과 구 소련 지역 동포들을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북한의 재외동포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켜주는 역할만 하게 될 것이다.

셋째 민족재통합 문제에 있어 북한의 공존정책을 인지하고 통합성을 가진 민족대단결 원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제기해 상호 교류와 협력을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통합방안에 있어 늘 수세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을 지양하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통해 민족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합리적인 통합방안을 장기적으로 준비해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남북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을 통해 조성된 화해시기에 부합하는 재외동포에 대한 정책도 시급히 마련해할 것이다. 구체적인 과제로 첫째 재외동포의 거주국내 법적 지위와 생활실태, 거주국의 소수민족이나 對 외국인 정책을 파악한 후 재외동포들의 정착과 위상강화를 지원하는 정책을 전개해야 한다. 둘째 남북한간의 관계개선에 부합하는 정책을 추진해야한다. 남한이 일본에 있는 재외동포들에게 지원금을 집중했던 것은 조총련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남북간의 긴장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북한과의 대결만을 고려하다보면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셋째 재외동포의 참정권에 관한 문제이다. 일본의 경우 1999년 외국 거주 일본인들의 참여를 보장했으며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재외국민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남한뿐이다. 유신독재 시절 재외동포들의 반정부활동을 막기 위해 재외동포 선거권 조항이 삭제되었고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국내문제와 한반도 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재외동포들의 참정권은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본국과의 네트워크는 보다 굳건해 질 것이다.

<민족연구> 제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