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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고려인 정주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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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정남 작성일작성일 09-01-09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50,1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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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고려인정주 70주년에 즈음하여
-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소수민족: 상황과 전망

명 드미뜨리(알마틔국립대학 정치사회학 교수)

서 론

2007년도는 처음은 쏘련, 다음 CIS 그리고 결국에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의 역사적 경과를 이해하며 정당히 평가하는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있는 사건은 무엇보다도 전체주의 시기인 70년 전인 1937년에 소련의 원동에 살던 고려인들이 어린이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중아시야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였다. “그 당시 사변의 직접적 참가자들의 이야기와 고문서 문헌들에 의하여 소수민족이 대대적인 비극적 숙청의 범위와 상세한 부분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 비극의 심도와 그것이 스탈린탄압의 맷돌에 들어간 고려인들에게 가져온 구체적인 피해는 아직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꾸준한 연구가 필요하다”(1).

인류의 기억에 잔인한 두 세계대전을 남겨놓았으며 수억명의 희생을 가져온 20세기는 소련이라고는 “세계에서 가장 인도주의적인 나라”에 살던 민족들의 대대적 강제이주로써 문명의 역사에서 비참한 시대였다. 이 추악한 실험의 쓰라림을 처음 겪게 된 사람들이 바로 고려인들이였다. 그들을 뒤이여 뽀월시예의 독일인들, 체첸인들, 인구스인들, 까라차예브인들, 발까르인들, 깔믜끼야인들, 꾸르드인들, 크릠따따르인들 기타 많은 민족들이 그런 운명을 겪게 되였다.

고려인들은 혹독한 강제이주를 맨 먼저 당하게 되였다. 이제는 수많은 민족들에게 한민족의 지위가 특별이주당한 민족의 지위로 변형된 사실을 자세히 알리지 못할 것이며 이것이 일제의 위험으로 인한 역사적 필요성이였다는 것을 확인시키지도 못할것이다.
고려인들은 1930년대 원동으로부터의 강제이주부터 시작하여 스탈린 정권의 비극적인 시대, 소련붕괴 이후 민주주의적 사회개조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어려운 발전의 길을 겪게 되였다.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정책에 의하여 부득이 카자흐스탄에 오게되였다. 카자흐스탄은 고려인들을 받아들여 가능한대로 집도 주고 먹을것도 주었다. 고려인들은 이에 대하여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특히 고려인들과 사귀지 말라는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에게 따뜻이 대하여 준 카사흐인들과 러시야인들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있다.

1.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의 고려인들의 사회정치 지위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자리잡는 것은 “이주과정, 그후 여러 번에 거친 재배치, 게획변동 등 단순한 일이 아니였다. 고려인들이 실려온 지역들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물질적 토대가 약했다. 그것은 중앙에서 이 조치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

그 당시 자신도 변변치 못하게 사는 카자흐인들은 불행한 고려인들을 모든 면으로 도와주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수십년동안 거주하면서 “고려인들은 그 어느 한때 말했듯이 백여 민족과 준민족들 속에서 역사의 먼지로 되지 않았고 동화되지 않았으며 자기의 민족풍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많은 면에서는 풍부화 시키면서 공화국의 사회경제적 및 정신적 발전에 당당한 기여를 하였으며 또 하고있다”(3).

사회주의의 급격한 발전시기에 고려인들은 인민경제의 모든 분야, 문화, 과학, 교육, 기술, 스포츠 및 기타 영역에서  성실하게 일하였다. 강제이주의 첫 몇년간에 그들이 농사를 짓거나 힘든 육체적 노동만 하였으나, 지금은 세계 문명의 모든 유산을 소화하고있다.

고려인들은 함께 거주하는 민족들에 대한 관계에서 항상 관대성의 원칙을 준수하여왔다. 우선 카사흐인들과 러시아인들과의 관계에서 그랬었다. 스탈린이 사망한후에 사태가 바뀌여 고려인들은 나라의 다른 공민들과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움직이고 살며 공부할수 있게 되였다.

농업에서 달성한 막대한 성과에 대하여 67명의 고려인들이 사회주의노력영웅이란 칭호를 받았고 공업, 교육, 보건, 문화, 농업, 스포츠 분야에서는 200여명이 공훈일군칭호를 받았다. 소련시대에 리 레오니드 빠블로위츠에게 야금공업분야에서 카자흐스탄과학원원사의 칭호, 김영광에게는 수학에서 카사흐공화국 과학원 후보원사의 명칭이 수여되였다.

소련시대에 또한 뮨헨과 멕시코 올림픽대회에서 체조선수 김 넬리가 참피온으로 되였다. 그는 또한 수차 세계, 유럽, 소련, 카자흐스탄 참피온으로도 되였다. 음악가-가수 최 윅또르(크슬-오르다), 대극장 오페라 가수 남 류드밀라(우스또베), 가수-음악가 박 왈레리(침껜트),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 김 아나똘리(우스또베), 소련의 첫 권투트레이너 최유리(따라스)가 바로 카자흐스탄에서 창작의 길을 걷거 시작하였다. 소련영웅 민 알렉싼드르도 카자흐스탄 출신이다. 이와 같이 공화국에서 고려인들의 활동무대가 점차적으로 넓어갔다. 현재 고려인들이 일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근면성은 고려인들의 생활양식의 불가분한 부분으로 되였다.

인민들의 의식 속에는 고려인들과 카자흐인들이 서로 다른 문명의 민족에 속한다는 신념이 깊이 뿌리를 박았다. 실지에 있어 전통적인 차이가 종교, 언어, 문화, 특히 일상생활, 사회적 심리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기이한 현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서로다른 두 민족을 문명간 합성의 적극적 주관자들로 만든 관대성,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다.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들은 자기의 영웅심과 근면성으로 일본간첩이란 잘못된 죄명의 무근거성을 증명하였다. 그들은 헌신성, 사업에 대한 충실성과 좋은 행동으로 자기의 민족적 및 공민적인 명예를 회복하였다. 스탈린시대의 혹독한 살인정책과 국가테로를 겪은 카사흐스탄 고려인들이 자주 공화국의 완전한 권리를 가진 공민으로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과거에 겪은 것을 회상하면 마음 속에 모욕감은 남았지만 악의는 없다. 어제의 “일본간첩”들의 손자들이 오늘 국회에 있으며 장관의 직위를 차지하며 장령이란 높은 군칭을 받으며 구 소련과 현재 카자흐스탄의 국가상을 받고있으며 주도적 과학연구소 사업을 지도하고 종합대학들에서 교수들로 일하며 비즈네스의 중요한 영역에서 성과를 달성하고있다. 그들 중에는 공훈배우, 인민배우들도 있다. 고등지식 수준으로 보아 고려인들은 소련시대나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우선적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그런데 수백만명의 고려인 소수민족이 사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도 우리 공화국에서 처럼 사회발전분야에서 대 성과를 달성한 사실이 없다.

역사는 대중적인 강제적 이주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며 공인된 국제규범이 없으며 국가의 내부법규 문제로 되며 국제기구가 그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정치적 성격을 띠고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은 정권이 진다. 고려인들은 운명의 비운을 대담하게 이겨내고 민족으로써 살아 남았으며 공화국 민족들사이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소련시대에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역사는 전체주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 품성을 발휘하면서 사람들이 정권보다 강한 전인류적 가치물의 승리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다. 고려인들은 그동안 살면서 민족적 자체보존과 자체의식의 기구가 얼마나 강하며 그것을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화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역사는 다민족 나라에 사는 인민들의 역사의 일부분이다. 거기에는 어두운 페이지도 있었고 밝은 페이지도 있었다. 그러나 매 페이지가 소수그루빠, 카자흐스탄의 전체 인민의 유산으로 된다. 역사의 그 어느 한 사변도, 그 어느 한 사실도 시대나 그 어떤 힘이 지워버리지 못한다. 역사에는 무관심한 직관이나 우연한 경우가 없다. 어쨌던 거기에 참가하게 되며 그것을 변경하게 된다.

역사적 전환기인 20세기에 의지가 강하고 애국심이 발전된 민족만이 잠재적으로 살아남으며 발전의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세계의 수많은 민족들중에서 고려인들이 바로 그런 민족들중 하나이다.

2. 시장관계의 조건에서 고려인들의 적응
이미 지적한바와 같이 2007년은 구 소련의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뜻깊은 해이다. 고려인들은 “눈물젖은”이 날을 명절로 맞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소를 끌고 카사흐스탄 땅을 개간하던 그 지난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기념할것이다. 이것은 그런 일이 절대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데 대한 훈시이다. 이것은 인류의 생활에서 인종살륙이 영영 근절된데 대한 추억이다. 이는 카자흐인들의 옛땅에 거주한 지난 기간을 총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70년이 지났다. 인간의 한일생에서는 긴 세월이다. 그 때로부터 새로운 몇 세대가 자라났다. 우리가 그 당시의 비극적 사변에서 멀어질수록 목격자들이 더 적게 남지만 그 잊을수 없는 날들이 고려인들의 의식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전체주의 체제는 인민의 의식을 없애며 개성이 없는 “소비에트인민”속에 동화시켜버리려 온갖 애를 썼다. 스탈린체제는 인민에게서 민족적인 것을 없애기 위하여 체계적으로 노력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소련이 붕괴되자 앞으로 어떤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며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어떻게 되겠는가하는 질문이 제기됐다. 이것은 당연한 질문인데 그 질문에 일방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그 누구에게는 좋고 누구에게는 나쁘다고 말할수 없다. 역사의 과정을 되돌릴수 없다. 카자흐인민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독립과 자주권을 이룩하려고 하였다. 결국에 그들은 원하던 것을 달성하였다.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들은 이 위대한 나라에서 모든 권리를 가진 공민으로 되며 이 나라의 일부분으로 된다. 때문에 이 나라의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법과 사고로 살고있다.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살고있는 고려인들의 70%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다. 그러기에 그들이 태어난 곳 즉 카자흐스탄이 그들의 조국이다. 사람은 한번, 한 곳에서 태여난다. 첫 조국, 둘째 조국이 없다. 때문에 고려인들도 공화국의 모든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이 대가정의 식구들이며 기타 인민들의 운명과 긴밀히 연결되여있다.

필자는 고려인들이 집합되여 거주하는 곳(알마띄, 우스또베)에서 몇 년전에 사회여론조사를 하였다. 앙케이트에 기록된 질문들 중 하나가 “역사적인 조국으로 가서 살 생각이 있습니까?”였다. 대다수가 부정적 대답을 했다.

현재 카자흐스탄은 황제정부가 처벌받은 사람들을 보냈으며 소비에트시대에는 스탈린체제가 “인민의 반역자들과 원쑤들”(사상이 다르다고하여)을 보내던 알지르, 굴라그, 스쩹라그 등 죽음의 수용소들이 있던 류형지가 아니다. 오늘의 카자흐스탄공화국은 모든 지표로 보아 고도로 발전된 국가로, 가까운 장래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50개국에 확신히 진입할수 있을 것이다.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공화국, 그의 성취에 긍지감을 느끼고있으며 공화국의 융성발전에 자기의 노력을 기여하였고 또 기여하고있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현명한 정책으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한 엔. 아. 나사르바예브대통령을 자랑하며 카자흐스탄이 고려인들에게 문명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모든 것을 준 것을 자랑하며 이 아름다운다 민족, 다 종교 나라에서 거주하는 것을 자랑한다.

1990년대에 카자흐스탄에서는 경제발전이 소수민족의 생활에 관계되는 법 기초의 정비도 동반되였다. “카자흐스탄공화국의 국가 민족정책 개념”채택과 동시에 민족간 관계에 관한 일련의 법규와 지침서가 채택되였다. 그런 관계의 형태들 중 하나가 민족 사회단체의 활동이였다.

카자흐스탄에서의 고려인 운동에서 이 시기는 서로 다른 민족협회와 사회단체 형성의 시기였다. 카자흐스탄은 다민족국가이며 거기에서 10만명의 고려인을 비롯한 근 130여민족이 거주하기 때문에 독립을 쟁취함에 따라 각 민족이 자아의식을 지향하였다.
모국어, 문화, 독창성을 살리려는 것이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를 창설한 목적이다. 고려인 사회단체를 설립한 것은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였다. 그런 단체는 “사회적 취미, 성, 연령 기타 특징에 따라 고려인들을 단합시킨다. 강령의 문헌과 상기 단체 활동분석은 차이를 불구하고 유일한 목적, 언어, 풍습, 전통, 총체적으로 문화를 재생시키려는 목적이 그들을 연합한다”(4). 문화센터들은 소련 및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언어 및 문화를 되살리며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사업을 하였다.

공화국에서는 고려극장이 성과적으로 활동하고있으며 “고려일보”가 민족어로 발간되며 TV방송 “고려사람”, 라디오방송이 모국어로 방송되고있다. 극장이나 대중보도 수단들은 민족적 문화의 보관자로, 소수민족의 생활에 대한 소식 전달자가 됐다.

교육, 문화 분야에서 고려인들의 다대한 성과는 국가의 꾸준한 배려, 민족그루빠에 대한 주의깊은 태도, 한국의 인도주의적 지원으로 하여 가능하게 되였다. 이런 도움이 없이는 고려인 소수민족이 역사적 문명의 초보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고려인 소수민족은 재생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며 문화발전에 각별한 주의를 쏟고 있다. 이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동포들과 연계를 맺고 그들과 친선관계를 튼튼케 하며 합동 국제회의, 포럼 등을 진행하고있다. 실례로 2006년 6월에 서울에서 해외한인 리더 포럼이 진행되였는데 대한민족 노무현대통령이 거기에서 긴 연설을 하였다. 이 모든 상봉모임은 외국에 사는 한인들의 사회적 및 문화적 상황을 더 낫게 발전시킬 가능성을 준다. 우리 혈육의 형제들의 민족적 재생 경험은 친선적 상호관계와 상호이해에서 항상 훌륭한 모범으로 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이 민족적 독립을 얻은 것을 고려인 소수민족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경시켰다. 공화국 정부가 실시하는 민주주의적 개조, 높은 생산잠재력, 풍부한 독창적 문화, 막대한 부존자원은 세계 강국들로 하여금 카자흐스탄에 주목을 집중하게 하였다. 카자흐스탄에는 매개 민족이 자기의 독창적 문화, 역사, 언어를 발전시키며 종교의 자유를 위한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였다.

그와 함께 다른 민족그릅과 마찬가지로 고려인들도 과도기의 어려움을 겪고있다. 고려인들은 모두다 문제없이 잘 산다는 소문이 돌고있다. 시장관계는 진취성과 근면성이 있는 고려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에 따르면 고려인들의 48%가 아직도 국가 보조금을 받아야 할 형편이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부유한 민족이나 가난한 민족이 없다. 민족마다에 부자가 있고 빈궁한 사람이 있다. 고려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적 지위로 보아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 그들에게도 속히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있다.

모국어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가 모국어를 모르는 것은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이미 70년동안 역사적 상황에 따라 러시어가 모국어로 되였기 때문이다. 자기의 모국어 문화를 알아야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공화국의 다민족 가정에서 집성적 부분으로 당당히 자신을 대표할수 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들이 한국어 즉 자기 선조들의 언어를 모른다면 그는 누구인가? 끼르기시야의 작가 친기스 아이트마또브는 그런 사람들을 만꾸르트라고 일컬었다. 그렇다면 카자흐스탄에서 사는 고려인들의 97%가 만꾸르트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꾸르트가 되였다고 해서 피해를 입은 것이 없다. 보건대 로시아어는 고려인들에게 세계문명, 문화에로의 길을 닦아주었다. 고려인들이 모두다 한국어만을 사용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들이 그 언어를 가지고 구소련에서, 카자흐스탄에서 무엇을 하였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을것이다.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를 알았기에 오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룩하였다.

민족마다 그가 소속되는 인종을 존경하기 위하여 선조들의 언어를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역사적 상황에 따라 고려인들은 작은 파편으로 자기의 역사적 조국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부득이 고향 멀리에 있게 되였다. 모국의 정부는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였고 가치있는 생활을 보장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정든 고향땅을 부득이 떠나 정착하게 된 새 지역의 조국에 적응하여 살아나가게 되였다. 그들은 이 과업을 당당히 실행하였으며 그러면서도 현지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의 민족적 소속을 떳떳이 대표하였다.

고려인협회의 목적은 모국어와 문화에 대한 애착심을 배양하는것인데 이것은 고결하고 어려운 과업이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현재 문제점은 그들이 국어를 배워야 하고 외국어를 꼭 알아야 하며 한국어를 하다 못해 회화를 할수 있을정도 알아야 하는것이다. 물론 다수가 첫 두가지 언어를 택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또다시 지역의 조건에 적응해야 하며 운이 좋으면 관리의 직책을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현재 공화국에서는 국어를 모르고는 국가나 과학 기관에 취직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지며 대학에서 공부하거나 전반적으로 취직하기가 곤난하다. 필요 없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하여 고려인들은 국어를 열심히 배우고있는데 물론 이것은 시간을 요구한다. 모든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30년대에 고려인들은 러시아어가 모국어로 되도록 그것을 배웠는데 21세기초에는 카자흐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좀 흐르면 고려인들은 카자흐어도 능숙할것이다. 생존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그리고 카자흐인민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이다. 임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은 지난 세기의 30년대에 그랬듯이 불만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카자흐스탄은 민주주의에로 전진하고있으며 공민의 합법칙적 사회를 건설하고있다.
위대한 민주주의적 전취물을 이용하며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민족마다 자기의 독창적인 문화, 역사, 언어를 발전 배가하며 종교자유, 개성의 자체확립을 위한 평등권 보장을 위한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 고려인들의 정신적 재생, 전망적인 발전을 위한 효과적인 길들 중 하나다. 국가수뇌들의 상봉, 한국과 카자흐스탄 대사관들, 사회단체들의 활동, “삼성”, “대우”, “LG”와 같은 대기업, 각종 합작기업과 회사들의 사업이 고려인들의 자체 확립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여 준다.

카자흐스탄과 한국간 외교관계가 수립됨에 따라 1991년에 알마띄시에 대사관 직속 교육원이 열렸는데 그것은 사회 인문학과 언어강령 발전 확장에서 긍정적 역할을 높였다. 교육원이 개설됨에 따라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어가 인기를 끌고있다. 공화국의 대학, 학교, 유치원들에서 한국어를 적극적으로 배우고있다. 결과 고려인들, 러시야인들, 카자흐인들 그리고 기타 민족 대표들이 한국말을 괜찮게 한다. 공화국에서는 한국어교육, 전문가 양성이 높은 수준에서 진행되고있다. 10여개의 종합대학들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대도시들과 고등교육기관들에는 한국어과가 있다. 거기에서는 한국어 전문가들을 양성한다.

교육원은 설립이래 15년간 큰 문화종합체로 성장되었다. 교육원에는 800석의 공연실, 큰 도서관, 컴퓨터실, 학습실, 스포츠 및 무용실들, 식당 및 기타가 있다. 해마다 20개의 그룹에서 500여명이 한국어를 배우고있다.

한국어, 전통, 문화 연구에서 카사흐스탄공민들의 문화적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키며 카사흐스탄과 한국간 교육기관들의 관계발전에 협조하며 한국어전문가 양성에서 대학, 단과 대학, 학교에 도움을 주며 한국에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하는등 기타 여러가지 사업을 하는 것이 교육원의 과업이다. 교육원은 해마다 한국어 수준을 검열하는 올림픽을 진행한다. 지원자들은 한국어 콩쿨에 참가할수 있다. 거기에는 시, 옛말, 한국어로 된 연극장면, 한국가요, 전통음악, 춤, 읽기와 쓰기가 속한다. 한국문화 축전과 전시회가 체계적으로 진행되는데 그 행사에 카자흐스탄과 한국의 문화기관들이 참가한다. 대학과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워주는 교원들의 세미나가 정기적으로 진행된다. 세미나에서는 교육 및 교수 방법론이 토의된다. 한국은 학습에 필요한 교과서, 참고서들, 비데오와 오디오 카세타들을 공급한다.

한국문화축제 프로그람은 조선인민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다민족 카자흐스탄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 모든 행사는 카자흐스탄주민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교육원은 역사의 사정으로 잊어진 역사적 조국의 예술을 잘 알아보며 새것을 많이 보도록 도와준다.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는데는 교육원의 큰 공로가 있다. 여기에서 또한 한국어와 문화를 배우는데서 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관의 활동을 특히 지적하여야 할것이다. 대사관은 사업을 능숙하게 조절하면서 원대한 과업을 확정하고있다.

고려인들은 공화국에서의 시장경제발전에도 참가하였다. “크람스” 상사를 지도한 조 윅또르가 맨 먼저 그 길을 닦아놓았다. 고려인들은 은행, 회사, 상사 그리고 나라의 기타 중요한 부문을 통제하며 지도한다. 공화국의 경제발전에 현저한 기여를 하는 몇가지 이름을 지적할수 있다. 이는 주식회사 “꾸아트” 사장 남 올레그, “도스따르”회사 사장 최 유리, “유스꼬 인터네스늘”회사 총지배인 박 윅또르, 주식회사 “꼬르뽀레이슨 카사흐믜스”사장 김 블라지미르, 주식회사 “뱅크 쩬뜨르 크레디트” 사장 리 블라지슬라브, “술빠크-엘렉뜨로니크”(5)회사 사장 박 안드레이 등 많은 비즈네스맨들이 있다. 카자흐스탄과 한국 비즈네스맨들 간 두 나라의 무역활동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였다.

이상에 지적한 실례는 고려인들이 공화국의 다른 민족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에 당당한 기여를 하고있다는 것을 증시하여 준다.

고려인들의 생활에서 역사적 조국과의 연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한국 관계가 적극화되고있다. 이 중요한 관계에서 고려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아래의 단락들에서 보기로 하자.

3. 카사흐스탄-한국 간 협조에 고려인들의 참가

이런 사명을 위한 국제법률상 전제조건은 소련이 붕괴된 후 카자흐스탄-한국 공동성명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1995년에 양국 대통령들-김영삼과 엔. 아. 나사르바예브 간에 서울에서 있은 첫 회견시에 쌍방은 카자흐스탄고려인 소수민족의 인격을 회복하며 자기의 정치권 실천 가능성을 다른 인민들과 동시에 담보하는데 돌려진 가장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데 대한 합의가 달성되였다. 정치적 과정과 국가들의 대화는 물론 국가들을 발전시킨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 원인에 따라 카자흐스탄과 한국이 상호유익한 협조를 하는데서 장애물이 있는데 바로 이 길에서 고려인 소수민족이 두 나라를 연결해주는 믿음직하고 효과적인 고리로 될수 있다.

친선과 협조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국가들 간 연계를 가일층 확대할 모든 가능성이 있다. 카자흐스탄공화국 엔. 아. 나사르바예브대통령의 한국 방문 (1995년과 2003년), 대한민국 노무현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2004년)이 이것을 증명하여준다. 정부들, 국회의원들, 비즈네스맨들, 학자들, 문화활동가들간 수많은 실무적 접촉이 이 과정에 협조하였다. 이 조건에서 한국민족협회는 친선적 두 나라들간 연계를 적극화하라고 호소하였다. 역사적 조국과 카자흐스탄 간 규합과 협조가 한국사회단체의 목적지향성 있는 방향들중 하나이다.

역사적 조국은 고려인 소수민족 내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상시적으로 주목을 돌리며 그들과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정신적 분야와 교육부문에서 도와주려고 힘쓰고 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상황은 양국 대표단들과 일부 국가활동가들의 차후 많은 상봉의 대상으로 되였다.

그 상봉들에서는 많은 주 들에서 분포되여 살고있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의 문제에 일련의 주목이 돌려졌다. 한국 측은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공화국 주민들의 일부분을 이루는 카사흐스탄 인민이라는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이 구체적 경우에 이 벡터에 관한 관계가 고려인들의 생활정비와 생활보장 면에서 합동원조(한국-카자흐스탄)를 주도록 사업을 조직할수 있다.

대한민국 노무현대통령은 동포들에게 주목을 돌리며 가능한 원조를 주며 문화교육센터를 조직하며 한국어 교육, 대학들에서 학과를 열어주는데 대하여 카사흐스탄의 정부와 사회단체에 감사를 표하였으며 창조적 노동을 고려인들을 호소하였다. 카자흐스탄 주재 전한국 태석원대사도 이에 주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소수민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긴 인종상 우리와 가깝지만 이곳 고려인들에게 특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카자흐스탄 공민들입니다. 우리가 생각컨대 고려인 소수민족은 친선적 연계를 가일층 발전시킴에 있어 카자흐스탄과 한국 간 믿음직한 교량으로 될수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우리 두나라와 인민들 간 협조 강화에 큰 기여를 하리라는 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6).

카자흐스탄과 한국 인민들간 연계는 소련이 붕괴된 후 맺어졌기에 그의 역사가 짧다. 그러나 그 기간 이 연계는 형제적인 따뜻한 것이였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인민들이 항상 미래에 대하여 상시적으로 생각하게끔 되여있다. 그것은 세계를 더 아름답게 만든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역할에 대하여 말한다면 양국 대통령들이 지적했듯이 해마다 커져야 한다. 그들의 심정은 카자흐스탄에 소속되여있지만 자기의 역사적 조국에 대한 신봉감이 고상히 발전되였다.

카자흐스탄공화국 대통령에 의하면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어디에서 거주하던지 막론하고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으며 카자흐스탄과 한국 간 관계를 공고히하는데 교량으로 역할한다는 것이다. 양국 지도자들은 공동성명에 카자흐스탄 발전에 그들의 현저한 기여를 지적하였으며 고려인들의 문화적 및 정신적 발전에 협조하여야 한다는 일치한 의견에 이르렀다. 엔. 아. 나사르바예브는 고려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고려인들의 재능, 근면성, 성실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국제관계에서 그들은 우리의 호상 친선과 신뢰를 튼튼케하는 독특한 다리로 되며 실무적 연계확대에 협조합니다”(7).

대한민국정부는 해외동포들을 가능한 지지하는 것을 자기의 국제주의적 의무로 간주하며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을 비롯하여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카자흐스탄에서 실시하고 그 사업을 고상히 평가하고있다. 이것을 위하여 한국정부는 2005년 12월 14일 CIS 나라들에서 거주하는 고려인 소수민족을 지지하는 새 강령을 제기하였다. 해외동포들에 대한 정책강구 국가위원회 회의에서 검토되는 계획에 따라 정부는 해외동포들이 한국에서 언어를 배우며 교육을 받기 위한 가장 좋은 가능성을 조성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서울은 CIS의 고려인들을 위한 문화기관들에 재정상 원조를 주고 그런 기관을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며 구소련에서 한국어로 발간되고있는 신문과 라디오방송국들을 지원할것이다. 그 목적은 CIS 고려인들이 자기의 인종상 독특성을 보존하게끔 그들을 도우려는것이다.

한국정부는 또한 한국 국립창작집단과 젊은 봉사단들이 외국방문을 계획할 때 CIS 나라들을 방문함에 우선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소련에 현재 고려인들이 근 53만 3천명이 거주하고있는데 이는 해외에 사는 660만명의 8%이다.(8)

언어연구에서 큰 난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 고려인 세대는 카자흐스탄-한국 실무, 과학 및 문화 협동 동작에서 적극적 중개자들이다. 하긴 고려인 소수민족의 소수가 한국어를 구사 하고 있지만 역사적 조국과 현재 조국간 “교량”의 문제가 성과적으로 극복되고 있다. 고려인들에게는 러시어로 완전히 동화될 위험은 없지만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치는 취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고려인들은 애국자들이며 친석적 두 나라를 연결하여 주는 고리로 된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소수민족이 언어의 장애물을 보다 성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어떤 길이 있는가? 물론 재정상 문제로 국가는 한국어를 완전히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젊은 사람들을 4-5년간 한국으로 보내지 못한다. 이 문제는 한국과 카사흐스탄 정부 간 협동노력으로 해결될수 있다. 한국과 카자흐스탄 대학들 간에는 해마다 15-20명의 대학생을 받아들이는 프로그람을 실현할수 있다. 즉 카자흐스탄의 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하여 한국으로, 한국에서는 카자흐어와 러시아를 배우러 카자흐스탄에 올 수 있다. 대학 간 이런 교류는 카자흐스탄과 한국에서의 원대한 정치적 전략에 들어갈수 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모국어는 임의의 인종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이며 민족의 전진과 진보를 위하여 부단히 작동하는 원동력이다”(9). 그것을 가속도로 재생시키는 것은 고려인 소수민족의 가장 우선적인 과업이다. 물론 교육기관 망을 조성하는 한편 다른 다목적 조치도 필요하다. 이것은 라디오사업, TV방송 사업개선, 교육참고서, 사전 발행 등이다. 현대 카자흐스탄에서 특히 국가 간, 정부간 협력하에 상기 조치들을 실시할수 있으며 국가를 토대로 하여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토대우에서도 그것을 할 수 있다.

한국 측은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생활, 공화국에서 민족 간 관계 공고화와 완성 체계에서, 이 관계의 문화를 형성 함에서 그들의 역할에 큰 관심이 있다. 실지에 있어 거의 모든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당했던 30-40년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로 카자흐스탄, 카자흐인들, 러시아인들 그리고 공화국의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이미 이루어진 자기 전통에 대한 충직한 애국자들로 남아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자기의 인종적 독창성과 문화를 보존하며 발전시킴으로써만이 카자흐스탄과 한국 간에 친선적 관계를 발전 및 공고화하며 새 세기의 현 세계에서 자기 선조들의 조국의 진보와 안전에 최대한 협조할수 있다.

결 론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이 공화국에서 생활한 70년간에는 여러가지 페이지가 있었다: 어둡고 밝고 슬프고 기쁜 페이지가 있었다. 그러나 페이지의 글 줄마다가 본 인종그루빠, 전체 카자흐스탄 인민의 유산이며 시대도, 그 어떤 힘도 그 페이지의 글자 하나도, 하나의 굿점도 지워버리지 못한다.(10) 그 기간에 고려인들은 새 역사적 조건에 적응하였으며 인테리들, 정치활동가들, 학자들, 문화활동가들이 나타났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민족적 단합의 토대를 얻었는데 그것은 민족적 자체의식 보존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경우에만이 가능하다.

강제이주 이후 지난 70년 간에 고려인들의 운명에서 많은 변동이 있었다. 그것을 일방적으로, 확정적으로 평가할수 없다. 자기의 문화와 언어를 잃어버린 것은 금후 발전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 앞에는 소련인민들의 성원에서 존재할 문제가 나섰다. 이 민족적 과업이 해결되였다. 이제는 문화를 재생시키며 시장관계에 성과적으로 들어설 문제가 해결을 요구한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의 다방면적 협조에서 카자흐스탄과 역사적 조국 사이의 활기찬 교량으로 된다. 고려인들의 생활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겠는가? 정확히 선택된 정치 및 생활 목표에 고려인 소수민족의 미래가 달렸다. 카사흐스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70주년과 연관된 교훈이 바로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1937년. 러시야의 고려인들: 쁘리모리예-중앙아시야-스탈린그라드(강제이주), 모스크바, 2004년, 25페이지
2. 강 게. 웨. 카사흐스탄고려인들의 역사, 알마타, 1995년, 78페이지.
3. 러시야의 고려인들 25-26페이지.
4. 강 게. 웨.-이상에 지적된 론문, 185페이지.
5. 참고: 카사흐스탄의 고려인들. “그들은 누구들인가 (편집 박 이. 떼, 편집위원들, 강 웨. 엠, 김 게. 엔, 명 데. 웨, 박 아. 데, 유 웨. 까, 양원식-알마띄 2005년, 379-400페이지.
6. 신문 “엑스쁘레쓰 까. 2005년 9월 22일호.
7. 서울통보, 2003년 11월 16일호.
8. 역시 상기 간행물, 2005년 12월 16일.
9. 리 웨. 에프. 예브르아시야 동방 (XX세기)의 지정학에서 러시야와 한국. 모스크바 2000년, 497페이지.
10. 강 게. 웨. 이상에 지적한 론설, 203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