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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정치제도와 체제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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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1-15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153,5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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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아시아 정치제도와 체제변화


김인성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
kis980117@yahoo.co.kr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스탈린 시기에 강제이주된 고려인 수십만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경제교류의 증가와 새로운 카스피해 유전의 발견, 그리고 국제적인 분쟁 지역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슬람 국가들과의 인접성 등으로 인해 한층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 중앙아시아와 관련된 학계의 관심은 고려인 문제나 국제정치적인 이슈에 집중되어 왔으며, 특히 카스피해 석유와 이 지역패권을 둘러싼 제반 이슈들이 분석의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지역 정치의 내적인 다이내믹스에 대해서는 별반 알려진 것이 없다. 이 지역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국제적인 패권경쟁의 보다 깊이 있는 이해와 장기적인 차원에서 이 지역 국가들과의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내적인 정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중앙아시아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필자는 두 개의 세부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는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중앙아시아 각국의 정치제도의 분석이다. 각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에 따라 이 지역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에 대해 분석하되, 이들 체제가 강력한 대통령제에 기초하고 있기는 하지만, 의회제의 성격도 일부 띠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슈가트와 캐리의 ‘대통령-의회제’개념을 분석에 도입할 것이다. 분석에 있어 이 개념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대통령과 의회, 수상 사이의 권력관계가 부각됨으로써 중앙아시아 정치제도에서 드러나는 막강한 대통령 권한에 대한 설명이 용이하다는 데 있다. 둘째는 실제에 있어서의 중앙아시아 각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분석이다. 국가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제도들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제도의 고안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또한 정치지도자의 권력이나 사회구성원들의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제도적 틀이 허용하지 않는 행위들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즉, 한편에서는 특정한 정치체제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적 맥락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행위자들의 의지가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중앙아시아 정치체제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ㆍ경제적인 요인들을 분석한 후, 이 지역 정치행위자들의 행태와 이들 간의 권력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 정치체제를 규정하는 핵심요인이 규명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아시아 국가 정치체제의 제도적 특징

1) 중앙아시아 정치체제 성립의 배경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체제는 의회제 성격이 가미된 강력한 대통령중심제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가건설의 경험이 부재한 반면, 유목민으로서의 전통과 사회주의의 경험으로 인해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부각된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이 지역에 혼합형의 강력한 대통령제가 형성된 보다 직접적인 이유로는 구소련 말기에 형성된 정치제도의 영향력을 들 수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개방정책(글라스노스트)은 정치제도의 개혁을 수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당제, 의회제, 비밀투표제, 복수후보제 등의 민주적 절차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 도입의 이면에는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해야만 하는 정치적 계산이 존재하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기에 고르바초프는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세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첫째는 개혁저항세력이자 이미 세력이 약해지고 있던 공산당을 대신하는 통치권력의 확보이고, 둘째는 소비에트민족공화국에서 분출하는 분리주의적 민족주의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경제위기의 심화와 정치정세의 불안정으로 인해 심화된 국민들의 불만의 고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신속히 해결하기 위하여 고르바초프는 급격히 약화된 공산당을 대신할 국가기구로서 소비에트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레닌 시절의 구호를 다시 부각시키는 한편, 다당제와 복수후보제, 비밀투표제를 도입함으로써 공산당의 독점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대신 최고회의와 인민대의원대회로 구성되는 소비에트의 정상화를 시도하였다. 한편 고르바초프 스스로는 겸직규정에 따라 소비에트 의장과 공산당 서기직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일련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의 위기관리능력은 미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1990년 3월 인민대의원대회의 결정에 따라 대통령제를 신설하였으며, 소비에트 의장이 대통령직을 겸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유의 대통령이 되었다. 구소련의 민주화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개인권력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 일인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고르바초프는 당서기장과 의회(최고회의)의장, 그리고 대통령을 겸함으로써 당권과 입법권, 그리고 행정권을 모두 관할하는 전대미문의 권력자가 되었다.

1991년 ‘신연방조약’의 체결 시도가 8월의 보수쿠데타에 의해 무산됨으로써 구소련의 소비에트민족공화국들은 실질적인 독립을 획득하였으나 중앙아시아의 다른 소비에트민족공화국들은 국가체제를 수립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소연방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개별 민족주의의 중심축으로 역할하며 독립을 추구하거나 준비해온 집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구공산당 고위간부들이 개별 공화국의 국가건설 담당자로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의회(소비에트)를 최고권력기관으로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당비서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구소련의 전통과 의회와 집권정당 그리고 행정부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일개인에게 융합시켰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정치개혁의 경험은 각 민족공화국들의 정치제도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대통령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제도에 의회제의 성격을 반영하여 대통령과 행정부, 그리고 의회를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대통령의 권력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2)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
중앙아시아 각국의 대통령의 지위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이들이 국가 내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위치이다. 주목할 점은 이들 국가의 정치체제는 많은 점에서 프랑스 5공화국을 참고하였다는 사실이다. 구소련 말기의 정치제도를 이어받으면서도 민주주의적 정당성은 서구국가인 프랑스로부터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며, 헌법에서 사용하는 많은 문장들도 역시 프랑스 5공화국의 문헌들을 많이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대통령의 지위와 관련하여 드골은 베이유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집행권한은 국가의 수반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국가수반은 제세력 위에 위치해야 하고, …… 중대한 혼란이 존재하는 경우 선거에 부쳐 주권자의 결정을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 중재자로서 행동해야 한다. 국가수반은 조국이 위기에 처하는 경우, 국가의 독립성 및 프랑스가 체결한 제조약의 수호자로서의 임무를 지녀야 한다.”
중앙아시아 각국 대통령의 위상은 드골의 베이유 선언을 많이 닮아있다. 카자흐스탄 헌법 제40조는 대통령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 카자흐스탄 공화국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최고위직무수행자로서 국가 대내외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을 결정하고 국내와 외교관계에 있어 카자흐스탄을 대표한다. 2. 공화국 대통령은 국민의 일체성과 국가권력, 헌법의 굳건함,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상징이자 보장자이다. 3. 공화국 대통령은 모든 국가권력기관의 조화로운 기능과 인민에 대한 권력기구들의 책임성을 제공한다.”

드골의 언급은 프랑스 4공화국에서와 같은 정치적 혼란시기에 대통령이 중재자로서 역할하고 위기상황에서 국가의 독립성을 국제적으로 표명하고 국제조약을 준수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정치적 혼란 혹은 위기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반면에 중앙아시아 각국 대통령의 위상에서는 ‘혼란’이나 ‘위기’ 상황에 관련된 언급은 삭제되어 있다. 또한 각국헌법이 삼권분립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지위는 삼권분립을 뛰어넘어 삼권의 상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지위로 묘사되고 있다. 후에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의회의 권한에 대한 대통령의 간섭을 제도적으로 용인하거나, 삼부를 넘어서는 최고권력기관을 설치하여 대통령의 권력을 합법적으로 극대화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대통령의 위상이 단지 상징적인 언술에 그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카자흐스탄 헌법에 나타난 대통령의 위상관련 규정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헌법에서도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의 정치체제가 강력한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하여 의회제의 성격을 일부 가미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국가의 대통령들은 대통령제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이를 테면, 수상을 비롯한 검찰총장, 헌법재판소장, 중앙은행총재, 감사원장, 외교관 등에 대한 임명권을 가지고 있으며, 법률안 상정권, 대통령 명령 발포권, 의회해산권(타지키스탄 제외), 법률안 비토권, 각료회의 주재권, 비상조치권, 파병권, 국민투표 회부권, 군통수권, 사면권 등의 권한을 대통령이 보유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대통령이 법률안을 상정할 수 없으나, 대신 행정부로 하여금 법률안을 상정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이러한 권한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들 국가의 정치체제에 권위주의적 속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권한들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 특히 의회제를 일부 가미한 대통령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대통령이 보유하는 권한들이다. 의회제의 성격을 일부 가지고 있는 한국의 대통령제에서도 이러한 권한들은 대체적으로 대통령에 부여되어 있다. 예외가 되는 권한은 법률안 상정권과 의회해산권이다. 미국과 같은 순수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나 행정부는 법률안 상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행정부는 같은 정당 소속의 의원들을 통하여 실질적인 법률안 상정권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행정부가 법률안 상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실상 대통령은 행정부를 통하여 자유롭게 법률을 입안할 수 있다. 한편 의회해산권은 의회제의 수상이나 내각에게 고유한 권한이지만, 이른바 ‘준대통령제’ 혹은 ‘이원집정부제’로 불리는 혼합형 체제에서도 흔히 대통령의 권한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국가 대통령들의 강력한 권한에 대한 논의는 대통령이 행사하는 권한들을 나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다. 이에 대한 논의는 삼권분립의 균형, 특히 대통령, 행정부와 의회간의 권력관계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규정되어 있으며, 그리고 실제에 있어 어떻게 행사되고 있는 지를 고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3) 대통령과 행정부, 의회간 권력구도의 제도적 세팅
제도적으로 파악했을 때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혼합형 체제로 분류할 수 있다. 슈가트와 캐리의 대통령제 구분에 따르면, 순수대통령제 이외에도 ‘수상-대통령제(premier-presidential regime)’와 ‘대통령-의회제(president-parliamentary regime)’가 존재한다. 수상-대통령제에서 수상과 각료들의 해임은 의회의 권한에 속하며, 내각해산시 정부구성에 참여하는 것은 의회이다. 한편 대통령-의회제에서는 내각해산권이 대통령과 의회 공동의 권한이며, 내각해산시 대통령이 다시 행정부를 구성한다. 내각의 구성과 해산과 관련하여 대통령은 의회해산권을 보유한다.

일단 염두에 둘 점은 중앙아시아 5개국은 모두 대통령제이지만 순수한 대통령제는 없다는 사실이다. 순수대통령제는 엄격한 삼권분립의 원칙에 기반해 있다. 따라서 대통령의 권한과 의회의 권한이 중첩되는 일은 없다. 이를 테면 대통령은 법안상정권을 갖지 않으며, 의회를 해산할 권리도 보유하지 않는다. 또한 행정부는 대통령의 직속기관으로서 의회가 행정부의 구성이나 해산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다만 의회가 대통령 탄핵권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순수내각제에서는 의회가 내각을 구성하거나 불신임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고, 내각은 의회해산권을 가진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타지키스탄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 대통령이 의회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을 제외한 국가에서는 대통령의 수상임명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중앙아시아 5개국은 대통령제에 의회제의 성격이 가미된 혼합형 정치체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준대통령제(혹은 이원집정부제)의 두 가지 형태라고 이야기되어지는 슈가트-캐리의 수상-대통령제와 대통령-의회제의 개념에 부합하는 국가는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흐스탄 두 국가뿐이다. 먼저 중앙아시아에는 수상-대통령제에 해당하는 국가는 없다.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흐스탄은 대통령-의회제의 성격을 띠고 있고, 다른 국가들은 순수대통령제에 가깝다. 이는 나머지 세 국가의 의회가 내각불신임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제도의 차이를 국가별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키르기즈스탄
대통령은 두 가지 경우에 의회해산권을 발동할 수 있다. 첫째, 대통령이 지명한 수상후보를 의회가 세 차례 거부하거나, 둘째, 의회가 삼 개월 이내에 두 차례 수상불신임을 결의한 경우이다. 이 때 대통령은 의회의 결정을 수용하거나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즉 의회해산권과 수상불신임권은 대통령과 의회 양자 사이의 권력견제의 제도적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키르기즈스탄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의회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키르기즈스탄의 대통령-의회제는 제도적으로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 자신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의회 스스로의 결정으로 대통령에게 1년 기한으로 입법권을 부여할 수 있다. 둘째, 의회해산시 대통령은 입법권을 보유한다. 다만 대통령은 직접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준하는 대통령령을 발포함으로써 입법권을 행사한다. 신생러시아 초기에 의회와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옐친 대통령이 대통령령을 발포하여 의회의 입법권을 우회한데서 알 수 있듯이, 정치제도화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는 대통령령의 존재 자체가 실질적으로 의회의 권한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키르기즈스탄의 경우는 이를 헌법상에 명문화시켰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2.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과 제도적으로 비슷한 형태를 취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제가 보다 더 권위주의적이다. 대통령은 세 가지 경우에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첫째, 내각불신임시, 둘째, 수상임명동의를 두 차례 거부할 경우, 마지막으로 의회의 상원과 하원 사이에서 혹은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해결불가능한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할 경우.

주목할 점은 내각불신임은 의회가 아닌 행정부에서 먼저 절차를 개시한다는 사실이다. 행정부는 자신이 제출한 법률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양원합동회의에 행정부 신임여부를 제의하며, 의회는 48시간 내에 신임을 결정해야 한다. 이 경우 의회가 내각을 불신임하면 대통령은 내각을 해체하거나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만일 의회가 내각불신임에 실패할 경우 행정부의 법률안은 통과된 것으로 간주한다. 즉 의회의 내각불신임권한은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견제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방편으로 변질된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 게다가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 심각한 견해 차이가 존재할 경우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의회의 권한은 크게 축소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더하여 대통령의 발의에 의해서 양원에서 각각 2/3이상의 의원이 찬성할 경우 대통령은 법률제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대통령은 상원의원 39명 중 7명을 임명하며, 상원의장후보의 지명권도 보유한다.

3. 타지키스탄
대통령은 의회해산권을 갖지 않으며 의회에는 내각불신임권이 없다. 다만 의회는 스스로의 결의에 의해 자진해산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타지키스탄의 정치제도는 대통령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의회가 수상임명을 승인할 권한을 보유하며, 대통령이 법안 발의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의회제의 성격이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하원의원의 1/4은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사실이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이 상원의원 일부를 임명할 권한을 행사하는 반면에, 타지키스탄의 대통령은 입법과정에 주도적인 권한을 가진 하원의원을 직접 임명한다. 이는 타지키스탄의 대통령이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의 대통령들에 비해 의회에 대한 영향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4. 우즈베키스탄
의회에 내각불신임권이 없다는 점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의회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또한 대통령이 의회해산권을 가지지만 제도적으로 내각불신임과 결부되지 않는다. 의회해산권은 세 가지 경우에 행사된다. 첫째, 의회 내의 의견불일치로 의회의 기능이 중지되는 경우, 둘째, 의회가 여러 차례에 걸쳐 헌법에 저촉되는 법률을 채택하는 경우, 셋째, 상원과 하원간의 의견 불일치로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이 정지되는 경우. 대통령은 의회해산권 이외에도 법안발의권을 가지고 있으며, 의회는 수상임명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조항들은 우즈베키스탄 정치체제가 일부 의회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대통령은 상원의원 16명에 대한 임명권과 상원의장후보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지역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의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권한을 향유하고 있다.

5. 투르크메니스탄 - 초헌법적 대통령제
의회가 수상임명이나 내각의 해산과 관련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대통령이 법안발의권과 의회해산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의회제의 성격을 일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은 정치체제에 의회제의 성격을 도입했다고 하기보다는 그저 단순히 모든 권한을 대통령에게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정치제도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할크 마슬라하티(인민회의)’의 존재이다. 인민회의는 다른 국가들의 상원과 유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헌법상 의회(메질리스)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인민회의는 별도의 국가기관으로 상정되고 있다. 인민회의는 2,500여명에 달하는 방대한 기구이다. 인민회의에는 대통령과 의원, 최고재판소장, 최고민사재판소장, 검찰총장, 장관, 기타 지방행정수반들 및 부족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중앙정치권과 지방정치권의 핵심인사들 모두가 인민회의의 구성원들이다. 인민회의의 주요 권한으로는 헌법제정 및 개정, 국가발전방향 결정, 조약비준, 전쟁선포, 대통령 탄핵결의 등이 있다. 즉 인민회의는 일반적으로는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대통령에 속하는 주요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인민회의는 1년에 한 번 이상 소집되는 비상설기관이었으나, 2003년 헌법개정을 통하여 상설기관으로 바뀌고, 국가주요정책과 관련된 다양한 부서들로 구성되는 의장실을 신설함으로써 사실상의 의회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할크 마슬라하티는 헌법상 인민권력의 최고대표기관이며, 이 기관의 존재로 인해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어 있다. 중요한 정책결정은 실제로 이 기관을 통해 행해지기 때문이다. 할크 마슬라하티의 의장직은 대통령 혹은 투표에 의해 구성원 중 1인이 수행하도록 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대통령이 의장직을 담당하고 있다. 2003년에는 관련법의 제정을 통해 현직 대통령이 인민회의 종신의장이자 의회최고지도자의 직책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대통령은 의회와 행정부, 그리고 인민회의의 권력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이로써 고르바초프가 집권 말기에 행했던 정치적 성취를 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도 달성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고르바초프는 제도적인 권력집중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정치적 무능력을 보임으로써 결국 국가의 몰락과 정치권력의 상실을 맛보았다면, 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의 권력은 제도적으로도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도 훨씬 더 강고해 보이며, 더 오래 지속될 것 같다는 사실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적인 차원에 있어 그 내용은 국가들마다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부국가는 준대통령제의 개념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정치체제를 형성해온 반면, 다른 국가들은 의회제의 성격을 일부 가미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편, 구체적인 내용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국가 정치체제는 공통적으로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작동하기 어려운 제도적 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결론적으로 헌법을 통해 본 중앙아시아 국가의 정치체제의 성격은 의회에 비해 우위의 혹은 압도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대통령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정치체제 형성과정과 내용

1) 민족주의와 정치체제

중앙아시아 국가형성과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이 지역 국가들이 한결같이 다민족국가라는 점이다. 독립 당시 이 지역에서 명목민족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가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이 때문에 명목민족이 어떠한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권력을 행사할 것인지, 그리고 여타의 소수민족들은 새로운 사회에서 어떠한 입지를 차지해야 하는 지는 이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주요과제 중의 하나였다.

표 1 ) 중앙아시아 국가의 자민족 비율 (단위: %)

이 지역 국가들의 민족문제는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지는 않다. 밀집해서 거주하고 있는 슬라브 민족들이 있는가 하면, 구소련의 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온 민족들이 존재하고, 또한 이 지역의 토착소수민족들도 존재한다. 특히 민족갈등의 잠재력이 큰 지역으로는 카자흐스탄의 북부와 페르가나 계곡을 들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북부 영토는 러시아와의 국경선과 길게 맞닿아 있으며, 러시아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의 러시아인들은 신생 카자흐스탄 정부에게는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비록 커다란 소요사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정책이 이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촉발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문제로 인한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또 하나의 지역은 페르가나 계곡이다. 이 계곡에는 타지크인들과 우즈벡인, 그리고 키르기즈인들이 혼재하여 거주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계곡이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키르기즈스탄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민족간 분쟁의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이 계곡이나 이 계곡을 끼고 있는 3개국에서 발생한 분쟁의 여파가 이 계곡을 통하여 인접국으로 전파될 가능성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이 지역의 민족문제가 관용이나 상호인정에 기반하여 해결되어 온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은 자국 내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의 충성심에 끊임없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지역의 지도자들은 구소련 말기의 분리주의운동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자신들 스스로가 분리주의적 추세에 힘입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이 지역 정치지도자들은 자국 내의 소수민족들이 기회만 있으면 분리독립을 주장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갖게 되었다. 둘째,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민족에 기반하고 있으나 명목민족이 절대적인 다수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소수민족들에 대한 관용정책을 펼 수 있는 자신감이 별로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 각국은 독립과 함께 명목민족의 위상을 높이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각국은 명목민족언어에 법률적으로 공식언어의 지위를 부여하였으며, 대통령을 위시한 공직자의 조건으로 명목민족언어의 구사능력을 명시하였다. 카자흐스탄과 타지키스탄만이 공용어로서 러시아어를 인정하고, 최고위직을 제외한 공직에의 진출의 길도 열어놓았다. 이러한 사실이 비명목민족인 러시아인들의 실질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1994년 3월에 실시된 카자흐스탄 총선은 카자흐인에게 유리하게 치우친 정치적 불평등의 극명한 한 예를 보여준다. 총 177의석 중 42석이 선거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에 의해서 지명되었다. 700명 이상의 후보가 나머지 135석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카자흐 선거관리 위훤회는 러시아 민족주의 성향인 200명의 후보자들을 지역선거에서 배제했다. 선거전의 조작 결과 유권자의 수가 러시아인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28명의 러시아인들만이 후보로 출마할 수 있었다. 카자흐인은 566명이 총선에 출마하였다. 선거 결과 카자흐인이 의석의 60%를 차지한 반면, 러시아인은 겨우 28%를 차지하였을 뿐이다. 동화를 선택하기보다는 자민족이 명목민족인 국가로의 이주를 선택하는 이들도 상당수이다. 이를 테면 1989년에서 1993년 사이에만 카자흐스탄을 떠난 러시아인은 26만7천명에 달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에서 국가체제의 존립이나 정부구성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격한 민족갈등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중앙아시아 각국 정부는 되도록 민족분쟁이 촉발되지 않도록 일종의 유화정책을 펴면서도, 소수민족이 이민을 유발하고, 해외거주 자민족의 유입을 장려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이 지역국가들의 타민족정책에는 이와 유사한 이중성이 부각되고 있다. 이를테면, 한편으로는 이중국적제도를 거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1991~1992년에 채택된 시민법을 통해 법률의 채택 시점에 각국에 영구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아시아 국가에서의 자민족 비율은 크게 증가하였으며, 이는 소수민족들이 동화보다는 자민족국가로의 이주를 선택한 때문이다. 정치참여에 있어서도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카자흐스탄에서의 의원선거에서 알 수 있듯이 공식적으로는 소수민족들의 정치참여를 허용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이들의 정치참여를 되도록 제한하여 소수민족들이 정치세력화하는 것은 방지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인 밀집지역의 지방행정장에는 카자흐인을 임명하면서도, 부행정장에는 러시아인들을 임명함으로써 민족적 반감을 무마시키고 있다. 즉, 중앙아시아 지역의 정부들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소수민족들이 사회ㆍ정치의 전면에 부상하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일정정도의 융화정책을 구사함으로써 민족갈등이 표면화하는 것을 예방하고 있다. 

둘째, 중앙아시아의 독립이 분리주의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이 각국 명목민족들의 정치적인 구심점을 형성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각국마다 차이는 있지만 구소련 말기 러시아에서처럼 지도자를 중심으로 정치적인 지지가 결집된 사례가 중앙아시아에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이 지역 국가들은 민족주의적인 레토릭은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민족주의 세력의 압력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구소련의 최고위관료들이 이 지역의 정치지도자로 부각되었고, 이들은 오히려 민족주의 집단들이 정치세력화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봉쇄하면서, 민족주의를 자신의 정당성의 기반으로 삼아 개인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실제에 있어 명목민족의 지위강화는 극히 낮은 수준에서 이루어졌을 따름이다. 공식언어의 채택에도 불구하고, 고위공직자가 아닌 한에는 법을 실행할 구체적인 규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소수민족들은 헌법상 보장된 권리에 따라 자민족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급진적 민족주의로 인한 사회적인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은 감소하였으며, 타지키스탄의 내전을 예외로 한다면 국가적인 문제로 부각된 적은 없다.

셋째,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가 증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민족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되어야 하는 이슬람주의의 동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슬람 의 정치세력화는 철저히 봉쇄되고 있으며, 반정부세력이나 비판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종교에 기반한 정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은 이슬람부흥당이 존재하는 타지키스탄이 유일하지만, 이 정당마저도 정부의 강력한 견제와 탄압에 노출되어 있다. 2004년 1월, 타지키스탄의 대표적인 야당인 이슬람부흥당 부대표가 법정에서 1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타지키스탄 내전 당시 무장범죄단체구성, 불법무기소지, 국경무단횡단, 중혼,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본인은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일각에서는 타지키스탄 대통령 라흐모노프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편,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종교집단으로는 히즈브 우트-타흐리르(이슬람해방당)과 우즈베키스탄이슬람운동당이 있다. 이슬람운동당은 탈리반 및 알카에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부시 대통령에 의해 테러단체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슬람해방당은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과격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교리의 전파에 주목적을 둔 온건한 단체로 알려져 있으나 각국 정부의 끊임없는 박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테면 투르크메니스탄의 종교지도자 이바둘라흐는 니야조프의 개인숭배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표명하다가 2003년 사제장직을 박탈당하고 22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우즈베키스탄의 종교지도자 에숀후쟈예프는 불법무기소지와 납치, 극단주의를 조장했다는 혐의로 2004년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2) 경제와 정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독립초기부터 새로운 경제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 지역에 수립된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가 국민들로부터의 암묵적인 혹은 적극적인 동의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경제정책의 성공과 이에 기반한 복지혜택의 제공은 정권의 안정적 유지와 크게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표 2 ) 중앙아시아 각국의 경제 및 천연자원 현황


중앙아시아 지역 경제는 농업과 특히 천연자원에 크게 의존적이다. 2차 산업은 시설의 낙후로 인해 또한 구소련 시기의 지역별 분업시스템으로 인해 독자적인 생존이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 때문에 이 지역 국가들의 경제는 천연자원의 보유와 생산능력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석유와 가스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이 부유한 국가이며, 우즈베킨스탄은 천연가스 매장량이 풍부한 반면 인구가 많은 탓에 국민소득이 낮으며,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의 에너지자원은 국내소비에도 턱없이 부족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 탓에 중앙아시아에서도 가장 빈국에 속한다.

표2)에서 나타나는 바에 따르면 정치체제의 안정성 혹은 민주화의 정도와 경제수준과의 상관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이 지역국가들 중에서 민주적인 절차의 측면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고 일컬어지는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경제수준의 차이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국가인 투르크메니스탄의 국민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소득을 향유하고 있다.

염두에 둘 점은 이 지역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경우라 할지라도 1인당 국민소득이 각각 2,468달러와 1,970달러에 그치고 있어 서구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경제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격차가 상당히 큰 이 지역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수준과 정치발전과의 상관성이 극히 미약하며, 정치체제가 한결같이 권위주의적인 속성을 띠고 있다는 점은 해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구소련식의 노멘클라투라 체제와 천연자원의존형 경제의 결합이 중앙아시아의 사회와 정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연자원과 관련된 산업은 그 속성상 상당한 수준의 자본 투자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천연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의 경제적인 부는 이 자원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통제능력을 보유한 소수의 경제엘리트에 집중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구소련식의 철저한 위계질서에 기반한 노멘클라투라체제의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정치엘리트와 경제엘리트는 온정주의(paternalism)와 후견주의(clientelism)에 의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사회적인 기반이 되어야 할 중간계층의 형성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각한 빈부격차의 발생으로 국민들 대다수는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중앙아시아의 부국인 카자흐스탄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1997년 국제적십자사의 발표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에서 국민의 73%가 정부가 정한 월간 최저생계비 50달러 이하의 극빈층을 형성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국가에서는 소수엘리트에게 경제적인 자원이 집중되고 부의 재분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에 따라 국가의 경제적 수준의 차이가 정치적 차이로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요인들은 정치체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기 보다는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3) 국내정치지형의 형성 및 내용

신생독립국가로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제도의 공백상태였다. 이 지역 국가들은 장기간의 독립투쟁의 역사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근대국가형성의 경험도 없다. 소비에트시기에 이 지역 공화국들은 자치권을 가지기는 했지만, 중앙정부에서 결정한 사항을 단순히 실행에 옮기는 역할만을 했을 뿐이다. 정치와 경제 체제 전반에 걸친 소비에트식 노멘클라투라체제가 가지는 권위로 인해 소비에트민족공화국들은 국가경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거의 습득하지 못하였다. 형식적으로 존재했던 자치권을 실질적인 국가권력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이들 신생국들에게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국가체제형성의 어려움은 폭력적인 유혈사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991년에 시작된 타지키스탄의 내전은 5만 이상의 사망자와 120만 이상의 난민을 초래한 끝에 1997년이 되어서야 종결되었다. 비교적 최근인 2005년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안디죤에서 수백명이 사망하는 소요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같은 해 키르기즈스탄에서 발생한 이른바 ‘튤립혁명’의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주목할 점은 사회ㆍ경제적인 불안정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격변이 발생할 징후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키르기즈스탄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는 크고 작은 위기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권력구도를 장기간 유지해오고 있으며, 가까운 장래에 권력균형이 뒤바꿀 가능성은 별로 없다.

중앙아시아국가들은 전반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학자들은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은 ‘연성권위주의’로,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은 ‘경성권위주의’로 분류하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나마 가장 민주적인 국가는 키르기즈스탄이며, 그 다음으로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순서이다. 아래에서는 중앙아시아 권위주의의 내용을 살펴보고, 키르기즈스탄에서 발생한 튤립혁명이 과연 이 지역 다른 국가들의 정치체제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중앙아시아의 권위주의 정치체제
키르기즈스탄을 제외한 중앙아시아 각국의 정치는 대체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도적으로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이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은 제도를 뛰어넘어서 잠재적인 정치적 반대세력 혹은 견제세력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 지역의 국가체제에서 대통령과 의회와의 관계는 제도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대통령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과 의회와의 권력관계가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달을 경우 정치적 불안정을 노정하게 되며, 심각한 경우에는 국정의 전반적인 마비까지 초래할 수 도 있다. 1993년 후반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무력에 의한 의회강제해산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은 현재 정치적으로 상당히 안정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튼 정당인 ‘카자흐스탄 국민회의당’과 구공산당 성원에 의해 조직된 ‘사회당’ 등은 모두 친대통령 성향을 띠고 있다. 1993년과 1994년도에 대통령과 의회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정치적 불안정의 징후가 나타난 바 있었지만, 두 차례의 의회해산을 거친 후 정국의 불안정요인은 제거되었다. 1993년의 13대 최고회의는 자진해산의 형태로 해산되었으며, 1994년의 14대 최고회의의 해산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94년 총선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리고 의회의 활동을 중지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95년 국민투표를 통하여 개정된 헌법이 대통령에게 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한 것은 의회-대통령간 갈등에서 대통령이 승리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정치도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카리모프 대통령이 집권초반부터 친대통령정당과 의회의 장악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인 인민민주당은 구 공산당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의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94-95년 의회선거에서 총 250석 중 189석을 차지하여 대통령은 의회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타지키스탄 역시 대통령이 의회를 통제하고 있다. 2005년 타지키스탄의 의회선거에서 여당인 타지크인민민주당이 63석 중 49석을 장악하였다. 여기에 친정부성향의 공산당이 3석을 차지하였고, 야당인 이슬람부흥당은 2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무소속 의원은 6명이었으며, 3곳의 선거구에서는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무소속의원들이 대체적으로 여당에 가입하거나 친여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통령은 60명의 의원 중 58명의 지지를 확보한 셈이다.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의 의회장악은 통제를 넘어 완전한 지배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독립 초기에 구축되었다. 헌법상 투르크메니스탄의 의회제는 단원제를 선택하고 있고, 메질리스(의회)가 존재하지만 실제 역할은 극히 미미하다. 대통령이 할크 마슬라하티(인민회의)를 통하여 행정권과 입법권을 동시에 행사하기 때문이다. 할크 마슬라하티는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의 고위관리들과 지역대표 및 부족대표 등 2,507명으로 구성된 방대한 기구이다. 할크 마슬라하티는 헌법개정, 헌법관련법안, 국가발전방향의 결정, 조약비준, 전쟁선포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다른 국가들의 상원에 해당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헌법상 메질리스에게 부여된 입법권까지도 행사하고 있다. 국가통치에 관련된 주요 사항들은 모두 할크 마슬라하티의 결정에 따라 국민투표나 의회에서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2003년 헌법개정에 따라 할크 마슬라하티가 상설기구가 됨에 따라 의회는 유명무실한 정치제도로 전락했다.

둘째, 중앙아시아의 정치지도자들은 선거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잠재적 경쟁자들을 정치무대에서 제외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키르기즈스탄은 예외이며, 투르크메니스탄은 대통령선거나 의회선거 자체가 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외로 한다. 한편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대통령에 대한 잠재적 경쟁자는 행정부 고위층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니야조프 대통령은 자주 행정부를 교체하는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다.

선거과정에 대한 정치지도자들의 통제양상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언론에 대한 간섭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고, 당선가능성이 높은 후보들을 처음부터 배제하기 위하여 이러저러한 이유로 후보등록을 받아주지 않으며, 유권자명단 작성이나 개표과정에서도 부정이 발생하고 있다. 이를테면,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카자흐스탄에서는 러시아인들의 의회진입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이들의 후보등록을 방해하였으며, 언론에 대한 통제를 넘어서 대통령의 큰딸과 사위가 최대의 언론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한편,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였던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카리모프의 승리는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선거운동기간 동안 언론매체들이 카리모프를 지속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투표 후에도 카리모프를 찍은 투표용지가 중복 집계되거나 위조 투표용지가 제작되기도 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유력한 후보였던 살리흐가 31%를 득표하였다는 발표가 있은 지 1시간 후, 12.6%로 정정발표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개표과정에도 상당한 비리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2005년의 타지키스탄 의회선거 과정에서도 상당한 부정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많은 야당 인사들이 후보 등록을 거부당하였으며, 민주당의 대표인 이스칸다로프는 테러와의 관련성을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50명의 감시인단을 파견했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선거부정이 발생했으며, 관료들이 선거운동을 통제하고 언론에 대한 간섭이 자행되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한편, 타지키스탄 대권후보이자 전직 내무장관인 타지키스탄민주당대표 야크브 살리모프는 내전 당시 테러행위와 불법무기소지의 혐의로 2005년 4월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5년형이 선고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반체제정당이나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억제책을 사용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반체제활동과 관련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특히 반체제인사들을 이슬람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이들을 정치무대에서 배제시키는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군사정권시절 반공법을 앞세워 반체제인사들을 탄압했던 관행과 많이 닮아있다.

이슬람과 결부된 반체제인사의 탄압은 키르기즈스탄을 제외한 중앙아시아 국가들 모두에서 폭넓게 나타나고 있으며, 관련법의 개정이나 신설을 통해 반체제인사에 대한 탄압을 합법화시키는 작업이 각국에서 진행중이다. 이를테면 2005년 2월 극단주의 활동 억제법을 통과시킨 데 이어, 5월 카자흐스탄 의회는 언론 및 비정부단체, 그리고 종교단체등과 관련하여 국가안보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법안의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 중에는 종교법이 포함되어 있는데, 종교활동에 대한 정부통제의 강화가 주내용을 이루고 있다. 명분상으로는 외국종교교리의 확대에 반대하고 역사적 가치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종교단체의 등록요건을 강화시키고, 등록되지 않은 종교단체의 활동을 금지함으로써 종교단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더욱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띠고 있다. 타지키스탄에서는 2005년 한 해 동안 99명의 히즈브 우트-타흐리트 멤버가 체포되었으며 38명에게는 중형이 언도되었다. 90년대 중반 들어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이 정당인사들은 그들의 활동이 평화로우며 단지 이슬람국가건설이 목표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러시아는 한결같이 이들을 극단주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고 있다.

몇몇의 경우에는 암살에 의해 반대파 정치인들을 제거하는 사례도 눈에 띈다. 이를테면, 2005년 11월,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부패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증거자료를 공개하겠다는 발언을 했던 전직 비상사태위원회 의장 누르카딜로프가 암살당했으며, 2006년 2월에는 대통령의 딸 나자르바예바의 불법행위를 폭로한 전직 장관이자 러시아 대사였던 야당인사 사르센바예프와 측근 2명이 살해되었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미등록 야당인 나기즈 아크 죨(빛나는 진실의 길)의 부대표였다. 야당인사들은 대통령의 딸과 사위가 이 사건에 결부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사건 모두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누르카딜로프는 머리와 가슴에 각각 한 방과 두 방의 총을 맞고 사망하였으나, 경찰은 그가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르센바예프의 암살에 나자르바예바와 그의 남편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 사건의 배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2005년 5월 13일에 발생한 안디죤 사태는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권통치를 입증한 사건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발표에 따르면 안디죤 사태를 야기한 폭도들은 해외에서 훈련받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로서 이들은 이슬람 구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의 목격자들과 외국 기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국제기구들의 현지조사요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실상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안디죤에서 진행된 23명의 사업가들에 대한 공판이었다. 이들은 히즈브 우트-타흐리르와 연루된 이슬람 테러활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실제 목적은 이들 재산의 몰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들의 체포에 항의하던 시위대가 관공서와 시내의 광장을 점거하고, 교도소까지 난입하는 상황으로 발전함에 따라 군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진압된 뒤, 테러가담혐의로 수백 명을 체포하고 수십 명을 사형에 처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권위주의적 개인지배체제의 공고화
중앙아시아 국가의 정치체제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1인의 정치지도자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1인 지배체제의 면모는 이 지역 대통령들의 임기가 사실상 종신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유일한 예외는 키르기즈스탄으로 2005년 ‘튤립혁명’에 의해 대통령이 사임한 바 있다. 혁명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 키르기즈스탄을 포함하여 중앙아시아에서는 대통령선거에 의해 새로운 인물이 최고정치지도자로 등장한 적이 없으며, 키르기즈스탄을 예외로 한다면 앞으로 대통령이 선거에 의해 경질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1인지배체제의 형성과 관련하여 가장 독보적인 존재는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니야조프이다. 최초의 헌법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삼선이 금지된 5년이었으나 1995년 국민투표를 통해서 2002년까지 임기를 보장받은 후, 1999년에는 할크 마슬라하티(인민회의)의 결정에 따라 니야조프는 종신대통령이 되었고, 2003년에는 할크 마슬라하티의 종신의장에 취임하였다. 니야조프의 개인지배체제의 공고화는 제도적인 차원을 떠나서 개인숭배의 양상까지 띠고 있다. 그는 2000년에는 스스로에게 사파르무라트 투르크멘바쉬(투르크멘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으며, ‘니야조프 달력’을 만들고 이슬람 경전에 자신의 시를 덧붙인 “루흐나마(성스러운 책)”를 새 경전으로 제시하는 등 우상화 정책을 펴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족의회의 결정에 따라 1995년 4월 29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1.2%, 찬성 95.5%의 압도적 다수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연장시켰다. 신헌법에 의해 1999년 대통령에 당선된 나자르바예프는 의회의 요구에 따라 조기선거형태로 치러진 2005년 12월 선거에 출마하여 유권자 75%의 투표율과 91%의 득표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현재 65세인 나자르바예프의 나이를 고려할 때, 201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가능성은 없으며 후계자를 물색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현재는 그의 장녀인 나자르바예바가 가장 유력한 후보인 것으로 보이는데, 2003년 10월, 카자흐스탄에 아사르(상호협력)당이 구성되었으며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의 장녀 다리가 나자르바예바를 당대표로 추대하였다. 장기적으로는 나자르바예바가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2003년 6월, 타지키스탄에서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중앙선관위의 발표에 따르면 96.39%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여 93.13%의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총 56개항의 개정이 이루어졌는데, 사실상 2003년 헌법개정은 타지키스탄 대통령 라흐모노프의 임기를 연장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대통령 임기를 7년 중임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이미 1999년 5년에서 7년으로 임기가 연장된 바 있는 라흐모노프는 임기가 만료되는 2006년부터 14년간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편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임기 역시 2002년 1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의 찬성으로  5년에서 7년으로 연장되었다.

튤립혁명과 중앙아시아 정치체제 변화가능성
키르기즈스탄의 전직대통령 아카예프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관료출신이 아니며, 독립초기부터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도입을 위해 노력해 왔다.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키르기즈스탄의 반체제단체결성은 허용되어 왔으며, 이들 집단이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도 이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의 키르기즈스탄의 정치적 상황을 평가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이 국가를 ‘민주주의의 섬(island of democracy)’라 표현하였으며, 미국무성 차관 탈보트는 키르기즈스탄의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프를 ‘키르기즈스탄의 토마스 제퍼슨’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실제로 키르기즈스탄의 정치정당들과 언론은 상당한 정도의 자유를 구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의 정치적인 이슈들은 키르기즈스탄이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노정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유력한 야권 인사이자 차기 대선후보인 펠릭스 쿨로프와 다니야르 우세노프가 2000년 의회선거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각각 선거에 패배하거나 후보자격을 박탈당한 바 있다. 펠릭스 쿨로프는 2000년에 체포되었다. 2001년 법원은 그를 권력남용으로 7년형을 선고하였고, 2002년에는 횡령죄를 적용하여 다시 10년형을 추가하였다. 그가 체포된 실제 이유는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유력한 후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그는 2001년 반체제정당인 아르-나미스(존엄)당을 설립하였으며, 전당대회를 통하여 당대표로 추대되었다. 서구의 관측통들은 2000년 의회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법률위반, 개표조작, 언론에 대한 탄압, 주요 후보의 배제’ 등 민주주의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특히 2000년 아카예프의 대통령 당선은 절차상 헌법을 위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키르기즈스탄 헌법이 대통령의 삼선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2월, 키르기즈스탄의 헌법을 개정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75.5%의 투표자가 헌법개정에 찬성하였다. 헌법 개정안에 따르면, 키르기즈스탄 의회는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뀌며, 부분적으로 실시되던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들에게는 면책특권이 부여된다. 한편, 대통령의 임기를 2005년까지 보장하는 것과 관련된 별도의 문항에서 투표자의 78.7%가 찬성하였다고 발표되었다.

키르기즈스탄 대통령 아카예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두 번째 임기가 만료되는 2005년 10월에 대통령직을 물러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중앙아시아에서 최초로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바뀔 수도 있었지만, 2005년 의회선거부정과 관련하여 발생한 ‘튤립혁명’에 의해 대통령직을 박탈당하였다.

키르기즈스탄에 발생한 ‘튤립혁명’의 직접적인 발생원인과 그 경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005년 3월 13일에 실시된 2차 투표의 결과는 여당의 압승이었다. 야당은 도합 10%의 의석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대통령은 관료들을 통하여 선거과정을 잘 통제하였고, 언론에의 개입을 통하여 선거부정과 관련된 사태를 축소시키면서 극단주의자들에게 소요의 책임을 전가하였다. 한편 1월부터 시작된 부정선거항의시위는 현직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뚜렷한 대안도 내놓지 못하였으며 조직력도 갖추지 못하였다. 명백한 야당지도자에 대한 지지와 그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시위를 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이나 그루지야의 ‘장미혁명’과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는 2005년 4월 20일 지방도시 오쉬와 잘랄-아바드에서 먼저 발생하였으며, 24일에는 수도 비쉬케크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하였고, 경찰의 소극적인 진압 속에서 시위대는 대통령의 관저로 몰려들어갔다. 아카예프 대통령은 피신하였고, 반체제집단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튤립혁명의 전모는 불투명하지만 의회선거와 대통령의 권위주의화가 중요한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2005년 키르기즈스탄의 의회선거가 아카예프 대통령의 통제 속에서 치러졌다는 것 이외에도 이 선거에서는 대통령 아카예프 딸과 아들, 그리고 두 명의 처제가 입후보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수상의 아들 및 대통령 최측근인사의 아들과 사위도 후보자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거구에서 대체적으로 가장 강력한 후보들이었으며, 유력한 경쟁자들은 선거에서 배제되었다. 이를테면 선관위는 아카예프의 딸 아카예바의 경쟁후보였던 마리포프의 거주등록이 유효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후보등록을 거부하였다. 게다가 아카예프 대통령 자신과 친인척들에 의한 부정축재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키르기즈스탄 전직 대통령 아카예프가 약 180개의 사업체 및 기업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 기업체들은  거의가 아카예프의 부인을 비롯한 친척들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튤립혁명으로 인해 2000년 이후 급격히 진행되던 키르기즈스탄의 권위주의화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혁명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지는 못하였으며, 오히려 정치적 불안정은 가중되고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혁명은 지도자나 지도적인 단체가 부재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반체제집단들은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아카예프 정권 당시 반대통령 인사에 대한 탄압이 있기는 했지만, 야당에 대한 전반적인 탄압이나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의 의지나 권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으나, 키르기즈스탄 정당들은 정치권력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미약한 때문일 수도 있다. 쿨로프의 아르-나미스당 이외에 전직 수상인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이끄는 키르기즈스탄인민운동이 중요한 야당으로 부각되었으나, 쿨로프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대통령에 대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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