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승리

자유민주당의 지리노프스키, 공산당의 쥬가노프 그리고 야부린스키 등 총 11명의 경쟁자 중에서 브르드밀 푸틴이 러시아연방의 세 번째 대통령에 당선됐다. 소연방해체 이후 그 동안 대권을 맡아왔던 보리스 엘친의 갑짝스런 사퇴로 앞당겨 실시된 러시아 대선은 시작 전부터 이미 결판이 난 것과 다름없었던 싱거운 통과의례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지난해 12월 옐친 대통령의 사임으로 전격적으로 대통령권한대행에 발탁된 이 47세의 젊은 KGB요원의 대통령 당선은 무엇보다도 그가 체첸 사태의 해결과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내 보였던 실천력이었다. 소연방 해체 이후 최고 통치자로 군림은 하면서도 제반 영역에서 과도기적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늙고 병약했던 엘친 대통령에 비해, 47세의 젊은 야심가는 전광석화와 같은 추진력과 실천력으로 짧은 시간에 그가 약속한대로의 문제해결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내 보임으로서 눈 깜짝 할 사이에 제3대 러시아 대통령의 자리를 검어 쥘 수 있었다.

푸틴의 승리는 또 경쟁세력들의 분열이 결과적으로 푸틴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러시아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세력은 여전히 러시아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들 두 세력이 이번 선거에서 제대로의 결집된 힘으로 작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민족주의는 너무나 다양한 분열을 만들어 내 지리노프스키의 자유민주당이 이들의 단일의 대표 세력이 될 수 없었고, 소연방 붕괴이후에도 여전히 러시아정치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아온 러시아공산당도 사유재산의 인정과 프롤레티라이독재를 포기함으로서 과거 공산주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많은 연금생활자들을 비롯한 보수지향의 유권자들을 실망시키면서 쥬가노프 동 당 당수는 4년전의 지지율에도 못 미치는 실패한 선거를 치 룰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의 이러한 분열과 노선전환에서 이탈된 유권자들의 민심을 한꺼번에 낚아 첸 것은 '법의 독재'와 '국가기관의 강화'를 통해서 '강력한 러시아'창출을 소리높이 외친 푸틴 이었다.

또 하나의 푸틴의 승인은 행동의 승리였다. 과거 소련의 웅대한 자태를 잃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러시아의 오늘이 필요로 했던 것은 그 어떤 논리보다도 확실한 행동과 실천력이었는데, 바로 이 같은 러시아의 현실적인 요청을 푸틴이 십분 활용하면서 대선을 승리로 이끌어 냈다. 체젠사태의 해결과정에서 분명한 수완을 보인 젊은 독재자는 지금 러시아에서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임을 강조하면서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 러시아의 민심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독재권력의 회복에 대한 약속 또한 푸틴의 승리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 했다. 그는 선거기간 중 '법의 독재'를 가장 강력한 공약으로 내세웠다. 소련시절의 '계급의 독재'가 '법의 독재'로 포장을 바꾸면서 새롭게 강조됐고, 이 공약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연방해체 이후의 내외적으로 과도기적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신생 러시아, 그곳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풀뿌리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기관의 강화'였고, 또 다른 형태의 독재 그것이었음은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자유와 인권을 강조했던 민주정파도, 계급독재를 당헌에서 제거한 공산당 그 모두를 외면하고, 독재권력의 확립을 통한 대국 러시아건설의 공약에 열렬한 박수가 모아진 것은 러시아사의 또 하나의 아이러니이자, 러시아정치의 본질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푸틴 대통령당선자에게는 그의 손으로 만들고 실천해 내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일은 러시아정치의 '과도기성'을 하루빨리 청산하는 일이다. 신생 러시아가 탄생한지 10여 년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새로운 체제건설을 위한 진통은 지금까지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점점 다양한 형태로 갈등을 심화시켜 가고 있는 민족분쟁을 조정하고, 독립국가에 걸 맞는 국가권력과 행정권의 확립은 여전히 시급한 러시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대선에서 푸틴을 선택한 것은 러시아의 유권자들이 신생 러시아건설의 방법보다는 그 목표달성에 대한 초조가 훨씬 절박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 만큼 그들은 절차의 정당성보다는 목표 상실에 초조해 하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통한 강력한 러시아건설과 경제난 해결을 원했다. 이제 '법의 독재'의 가면을 쓴 푸틴의 행보가 러시아의 내일, 아니 세계정치에 어떤 의미를 던질 것인가를 주목해야 할 시간이다. 그 독재가 법에 의한 독재인지, 법을 빙자한 폭력 그 어느 것인지에 따라 러시아는 또 한차례의 변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000/3/27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