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현장

HOME > 민족자료 > 민족현장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다’와 만나다 ---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5-05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8,253회

본문

<쿄토 통신> - 9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다’와 만나다 ---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일본의 연휴가 계속되는 5월 3일 오후 , 버스를 타고 쿄토국립박물관에 갔다. 내가 탄 시내 버스가 그 유명?청수사로 가는 노선이어서 그랬던가... 약 두시간이나 걸렸다. "키요미즈테라(淸水寺)에 가시는 분은 두 정거장 남았지만 여기서부터 내려 걸어 가는 것이 빠를 것 같습니다." 하도 막히니, 버스기사가 하는 말이다.

국립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에서 열린 묘신지(妙心寺)전람회를  보러 가는 길이다.

묘신지는 14세기에 창설된 임제종의 총본산이라 하는데 쿄토에서 다이토쿠지와 함께 위용을 자랑하는 절이다. 다이토쿠지의 탑두((塔頭,원래는 본산의 주지를 지낸 유명한 승려의 은거지였으나 제자들에 의해 발전하여 경내에 담을 두르고 대개 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독립된 조그만 절)가  23개인데 반해서 묘신지는 무려 47개나 된다니 이절의 규모가 짐작이 된다.

묘신지는 국보를 포함하여 중요문화재도 상당히 많다는데 무려 12000점의 귀한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워낙 귀한 것들이어서 절 자체내에 보관하는 것이 화재 등에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박물관에 맡겨 위탁 소장하고 있으며 올해 묘신지를 창건한 지 65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 전람회가 코토 국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호리병으로 메기를 잡다” 가 나와 있지 않을까? 

국제일본문화센터의 게시판에 붙어 있는 특변전의 포스터를 보고 책에서 그 그림이 전시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찾아 갔다. 박물관의 한 건물을 열 개 정도로 나누어 조각품과 책, 그림 인물 초상화 승려가 입었던 가사,  병풍, 종 등 다양한 전시물이 수준 높은 관람객들과 어울어져 전시 자체가 또 하나의 전시물이 된듯한 독특한 인상의 그곳에서  드디어 만나고 싶었던 그림과 대면할 수 있었다. (blog판에서는 그림 감상 가능)

그것은 국보였는데 수묵화 전시실의 아주 중요한 자리에서 하나의 유리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15세기 , 일본의 선종관계 승려 31명이 찬을 달은 이 그림 설명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효낸쓰(瓢鮎圖), 국보, 15세기 退藏院 .....조세쓰(如拙) 필. 조세쓰(여졸)는 쇼코쿠지(相國寺)를 중심으로 활약한 화승으로 믿어지나 상세 불명>

일본 수묵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분에 대해서는 쇼코쿠지에 관한 글에서 잠깐 소개했다. 

일본문화 연구가 코벨이 15세기 억불숭유정책의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대표적인 두뇌 유출로 꼽았던 인물. 그런데 이곳에서 그분의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필법으로  승려들의 찬에서 ‘새로운 형식’이라고 평했던 그림.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에 전시될  수 있었으니 큰 행운이었다.

일본 수묵화의 거장 셋슈(雪舟)가  ‘아버지 격인 스승은 슈분이요,  할아버지 격인 스승은 조세쓰’ 라고 했다는 조세쓰가 누구인가를 밝혀줄 우리 전문가는 안 나오는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의 저자 오주석씨가 살아 계시다면 이 인물이 남긴 오직 한 장의 그림에서 많은 얘기를 들려 줄 것만 같은데..... 참 아쉽다.

아무튼 그 그림 설명에서는 상세히는 알 수 없다고 했으니 언젠가 밝혀 질 날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비록 조선 화가의 그림이라고 추정되는 이 것말고도 ‘고려 작품’이라는 명찰을 단  걸작이  두 점이 더  나와 있었다.

하나는 역시 전시장 중앙 유리 케이스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향합(화장도구로 사용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고 쓰여 있었다)이었고 또하나는 고려 불화였다.

향합은 세계에서 몇 안된다는 진귀한 고려 나전 칠기였는데 그 섬세한 아름다움에 관람객들이 탄성을 내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전시품 포스터에도  대표작품으로 나와 있었으니 그 가치를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이름은 국당초문나전대창(?)합자菊唐草紋 螺鈿玳?合子). 그리고 고려 불화!  일본 전국에 퍼져 있다는 그 불화가 묘신지(妙心寺)에도  있었다. 마리시텐죠(摩利支天像)라는 이름의 14세기 작품 역시 묘신지의 탑두 성택원(聖澤院)소장의 ‘중요 문화재’였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과 관련된 문화재의 국적을 밝히기를 극히 꺼려하는데, 여기?나와 있는 이 유물들은 언제 고려 것으로 밝혀 졌을까? 여기에 전시되어 있지 않은 많은 것들중에 우리 문화재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그리고  하나의 절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가 이렇게 풍부한 나라 일본이 한없이 부러웠다. 나라(奈良)에서, 또 쿄토에서 찾아 보는 조상의 자취는 스케일에 있어서나 예술성에 있어서 셰계가 그 가치를 평가해 준지 오래다. 우리나라에서 건너 간 호족들이 남긴 것이 이럴 진데 우리 땅에 전쟁이 없었다면 ?  종교적 탄압이 없었다면 ?

나는 그 훌륭한 전시물들을 진정으로 감상하며 그 시대로 돌아 가 보는 공간과 시간 속에 빠지지 못하고 오직 우리 것을 찾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의 대표적인 호랑이 그림이 나와 있었다. 병풍화로 그려진 두 마리의 호랑이는 호랑이가 살 지 않았던 일본에서 대단히 그리기 어려운 상상의 동물같은 것이었으리라.

시간 가는 줄 몰랐으나 어느새 오후 6시, 폐관시간.  조상들의 작품이 비록 조국은 떠나 왔지만 몇 백년을 잘 견뎌내어 비록 일본에서라도 살아 있는 것이 고마워 돌아 보고 돌아 보며 박물관을 나왔다.                        2009/05/03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46729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