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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화의 보고 다이토쿠지(大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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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5-01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8,3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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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통신>-8 


고려 불화의 보고 다이토쿠지(大德寺)
                                                                                                                                                                                              최영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아직 바람이 차가워 겨울의 끝자락이 남아 있던 2월 마지막 일요일에 나는 다이토쿠지를 찾았다. 우리 나라 처럼 한 경내에 하나의 절이라는 생각을 하고 간 나에게 다이토쿠지는 그 예상을 뛰어 넘었다. 어마 어마하게 넓은 울타리 안에 무려 23개의 탑두(塔頭, 제자들이 세운 작은 절)들이 각각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암자들 중 22개가 차석(茶席)을 가지고 있을 만큼 차와 관계 깊은 절이라고 한다. 

올해 일본에서 유명한 문학상인 나오키(直木)상을 받은  <리큐(利休)니 다즈네요>라는 소설은  다도의 대가 센노리큐(千利休)의 얘기이다. 산몬(三門,혹은 山門 절의 정문)에 세워진 리큐의 목상이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비위를 건드려 할복 자살케 했다는 얘기는 워낙 유명한데 야마모토켄이치(山本兼一)는 독특한 구성으로 그의 일생을 소설화 하면서 무궁화와 고려 여인을 리큐의 마음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런데 코벨은 이 센노리큐를 조선인으로 본다. 대덕사는 이렇게 나의 관심안으로 들어 왔다.

다이토쿠지 (大德寺)는 14세기  초에 만들어 진 절이지만 일본 정치의 변화와 함께 부침을 겪다가 15세기 말에 유명한 선승 잇큐(一休)를 만나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잇큐(一休)는 조선이 건국되고 약 2 년 후 (1394년 1월 ) 태어 난 분인데 그의 출생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어머니는 왜구가 날뛰던 고려 말에 일본 왕에게 보내 진 고려의 궁녀라고 한다. 일본 100대왕 고코마쓰(後小)왕의 장남으로 태어 났으나 고려 궁녀가 어머니였으므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여섯살에 중이 되어 80세가 넘어 타이토쿠지의 주지가 되기까지 파란 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그가 사카이(堺)상인들의 기증으로 이절을 복원하고 그들에게 선(禪)을 가르친 것이 인연이 되어 사카이 상인들이 중심이 된 차도가 이 절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차도의 완성자라는 센리큐가 할복하기 직전에 이절 쥬코인聚光院)의 다다미 한 장 반의 차실에서 베풀어졌다는 차의 의식이 위에 소개한 소설의 첫장과 끝장을 장식하고 있다.

내가 그곳 , 삼몬(山門)을 찾은 날 일본 화가 한 사람이 산문의 2층 문루인 금모각(金毛閣)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저곳에 센리큐의 조각이 있었나요?”

“그렇지요. 그것 때문에 할복 자살했지요...” 

그러면서 한국인 인 우리들에게 시가(滋賀)현 오쓰(大津)시의 사카모토(板本)에 있는 돌담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 조상이 쌓았다는 돌담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서 석공의 이름과 돌담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 주기까지 했다. 내가 있는 동안 찾아 볼 수 있을 런지...?

그런데... 이 삼몬 앞에서 나는 책을 꺼내어 금모각 문루안의 벽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는 나무 조각상인 나한상을 찾아 냈다. 이 조각이 저 곳에 안치되어 있다는데... 내가 계속 인용하고 있는 이책은 . 코벨박사가 일본인의 미움을 사면서 까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논문들을 모은 것. 아직 누구도 한국인은 볼 수 없었다는 조각상을 그는 2대에 걸쳐 연구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타이토쿠지의 이층 문루로 된 삼문은 1590년 다도의 대가 센리큐가 세웠다. 이층 문루에 있는 16나한상은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서 가져와서 다이토쿠지에 기증한 것이다"는 일본학자들의 기록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1933년에 발행된 일본 관광안내서에 저명한 대학교수들 20명이 집필한 내용이란다. 일반인에게 거의 공개가 봉쇄된 저 누각이 언제 16나한상의 진실을 보여 줄 것인가? 학자들에게 만이라도 개방하여 연구 할 수 있게만 된다해도  아쉬움이 사라질텐데 하는 마음이다. 어쨌든 가토 기요마사라는  이름이 나오면 우리는 임진왜란때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던 사령관들의 이름을 떠 올릴 수 밖에 없다.  고니시 유키나카,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요시다케 -- 그들이 한반도를 유린하며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갔음을 짐작할 때 16나한상의 조각품도 얼마든지 가능했으리라. 또 구로다 요시다케의 아들은 아버지가 죽은 후 다이토쿠지에 아버지의 추모사찰, 료코인(龍光院)을 세워 아버지가 조선에서 가져온 많은 문화재를 기증해 지금도 그곳에는 고려 석등을 비롯하여 많은 한국 작품들이 있다고 한다. 설마 정원에 세워 진 석등은 볼 수있겠지 하고 물어 물어 료코인을 찾아 갔다.  역시 울타리가 쳐져 있다. 초인종을 눌렀다. 여자가 나왔다. 대문에 발을 디디고 눈으로는 절 마당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아주 공손한 표정으로..

“고려 석등을 좀 볼 수 있습니까?”

“개방이 안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고려 석등이 있는  건 사실인가요?”

“그것도 대답해 줄 수 없는데요”

누구를  통하면 문이 열릴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게는 그런 힘이 없구나... 

다음은 다이토쿠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불화에 관한 얘기들이다.

1978년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은 고려 불화전을 개최했다. 이때 전시된 고려 불화는 70여점.  사실 그때까지 고려 그림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던 것은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와 수덕사의 꽃그림이 거의 전부였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엄청 난  파문을 던진 이 전시회 이후 그 동안 국적을 잃었던 이것들은 고려의 걸작으로 살아 났다. 이 전시회가 열 릴 수 있었던 것은 이시자와 마사오라는 아마토분카칸의 제 2대 관장과 그곳의 학예사들이 십수년간 연구한 결과라고 한다. 그리하여 1997년 시공사가 발행한 <고려시대의 불화>에는 한국에서 그 이후 찾아 낸 것까지 합쳐서 130여점의 불화가 해설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런데 일본의 불화들은 다 어디에서 솟아 났는가?

슬프 게도  우리는 그 공의 일부를 왜구들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고려 말, 14세기부터 고려는 엄청 난 괴로움에 시달렸다. 원의 지배로 쇠퇴할대로 쇠퇴한 고려에 왜구의 약탈이 또 심해 진 것이다. 개성 근처까지 나타 난 왜구를 토벌 할 방법이 없었던 조정에서는 바다 삼면에 성을 쌓자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런 상상하기 조차 끔찍한 피해를 우리에게 주었던 왜구들의 약탈품이 고히 간직되어 이름만이라도 우리에게 돌아 온 것이다. 물론 숭유억불책의 조선초기에도 , 임진왜란때에도 고려의 불교 작품들은 많이 반출되었으리라.  그리하여 일본에서 살아 남은 불화들이 고려 문화를 이해하는  유물들이 되어 있으니 이제라도 조상들은 분이 좀 풒리셨을런지... 

다이토쿠지에는 여래도를 비롯하여 양류 관음상까지 고려 불화가 일본 두번째로 많이 소장되어 있다.  버드나무를 들고 있는 관음상 그림이 4점이나 있다는데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이곳에 소장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 이곳 저곳에 100여점이나 있는 고려 불화중에 관세음보살 그림이 30점 이상이나 되고 그 관음도들을 우리는 '수월 관세음보살'이라 부르기도 하고 '양류 관세음보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월(水月)이라는 이름은  고려에서 11세기경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며  양류라는 말은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인데 관음도에 버드나무가 반드시 나오기 때문이란다. 주로 정병에 꽃힌 모습으로 등장하는 버들가지는 아픈자를 치료하고 보살피는 현세이익(現世利益)과 내세구제(來世救濟)의 보살인 관세음의 상징인 듯한데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버드나무는 아스피린의 원료라는 것이다. 옛 사람들의 지혜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이 절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불화들은 오랫동안 중국인 화가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고 하니 비록 그 그림들을 볼 수는 없으나 이제 선구적인 학자들에 의해 그 출생이 밝혀진 600년 혹은 700년전의 조상의 걸작이 소장되어 있는 곳을  멀리서 나마 바라보며 서 있는데 다이토쿠지의 하늘은 그저 맑기만 하구나.

고려인들을 표현할 길 없는 고통으로 몰아 넣었던 왜구들이 약탈해 온 고려의 불화들, 비록 조국에서는 버림 받았을 지라도 그 지혜를 쏟아 부었던 무로마찌 시대의 선 승려 화가들이 남긴 수묵화의 걸작들. 임진왜란이라는 7년간의 전쟁을 통해 일본에 건너 온 그 많은 선진 문화들,  자기, 그림, 석등 , 석탑, 책, 조각품, 그리고 사람들. 고대 일본을 일구어 준 조상들의 뒤를 이어 중세에도 근세에도 우리 피를 가진 사람들은 이웃나라 일본의 문화를 이렇게 떠 받들어 주었던 것을....

돌아 오는 길,  다이토쿠지 정문 앞에 있는 마쓰다(松田) 노포(老鋪)에 들렸다. 15세기에 고려 여인의 피를 가진 잇큐에 의해 키워 졌다는 ‘다이토쿠지 낫토’(納豆)를 파는 가게였다. 몇 대째 이어 가게를 한다는 80세가 넘은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 옛날의 모양과 맛을 지녔다는  낫토를 건네며 모델이 되어 주셨다. 아하..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일본 생 청국장이  이렇게도 먹는구나...  200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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