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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비가오카(双ヶ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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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5-01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8,19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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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통신>-5

일본을 교토를 개척한 하타(秦)씨     

세번째 이야기 :  나라비가오카(双ヶ丘)

                                                                최 영 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어제는 (4월 18일) 가 보고 싶었던 곳에 다녀 왔다. 나라비가오카(双ヶ丘), 6세기 말에서 7세기에 걸쳐 만들어 졌다는 무덤군이 있었던 곳. 그곳은 해발 116미터의 넓으나 높지 않은 산 언덕이었다. 

일본의 쪽 염색을 체험해 보기 위해 가는 길에 같이 갔던 일본인 중에 마침 우즈마사(太秦)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던 분이 계셨다. 이런 저런 대화 중에 나라비가오카를 찾아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고맙게도 안내를 해 주셨다. 어린 시절 우즈마사에서 이 산까지 놀러 다녔다는 그 분 덕에 이미 일본인에개는 잊혀 진 유적을 찾을 수 있었으니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인 모양이다. 그분에게 들은 귀한 얘기가 또 하나 있다. ‘우즈마사’라는 지명에 관한 것이다. 그 옛날에 그곳에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어서 (우즈타카이라는 일본 말은 지금도 사용하는 단어)생긴 지명이라는 것이다. 태진(太秦)이라는 글자의 발음으로는 나오지 않는 지명의 유래를 들을 수 있어 얼마나 반갑던지... 그래서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하타씨라는 성이 그 근처에 아직도 많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한자는 틀리지만 하타씨라고 읽는 성들이 많이 있지요 예를 들면 하타케(畑),하네(羽)등이 그렇습니다." 

오늘은 지난 번 광륭사(廣隆寺)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코노시마니이마스아마테루미타마(木鳴坐天照御魂)신사에서 본 세기둥의 도리이(鳥居)에 관한 얘기를 할까 한다. 우즈마사(太秦)라는 곳에 있는  누에 신을 모시는 신사다. 지금은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잡고 겨우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보잘 것 없는 신사같이 보였으나 이 신사에는 일본에서 거의 유일한 유적이 있어 관심있는 학자나 신사 연구가들에게는 아주 귀한 곳이라고 한다. 물론 이신사도 하타씨가 세웠다. 

첨단문화를 일본에 가르쳐 주어 쿄토의 역사를 시작한 이 인물들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에 대한 의문을 풀어 주는 좋은 책 한권이 눈에 띄어 그 내용을 여기서 소개한다. 미야모토겐지(宮元健次)의 <신사의 계보>(神社의 系譜)라는 책이다. 그는 건축학을 전공한 학자로 많은 저서가 있다. 그중 한권인 이 책은 나를 젊은 학창시절로 돌아 가게 했다. 동국대 교수였던 황수영 박사가 우리 학교에 특강을 해 주신 때가 대학 몇학년 때이던가...문무왕능을 발견했다고 신문에 대문짝 만한 기사가 났던 때. 그 분은 석굴암 부처의 시선을 따라 갔더니 바로 문무왕능에 닿았다면서 우리에게 신라인의 정신 세계를  불교 문화와 연결시켜 가며 열강을 해주셨다. 그 때 느꼈던 고대인의 정신 세계에 대한 외경을 나는 위에 소개한 책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일본 고대인의 정신 세계속에서  하타씨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국왕이 살았던 고쇼(御所)를 중심으로 방위를 그려 당시의 신앙을 설명한 미야모토겐지는 하타씨가 세운 신사를  이 시대를 해석하는 키워드로 사용한다. 즉 고쇼로부터 하지의 일출의 방위에 시모카모(下鴨)신사 (이 신사도 카미카모신사와 마찬가지로 하타씨의 사위였던 카모(賀茂)씨의 씨신(氏神)을 모신 곳이다)가 있고 그 반대로 동지의 일몰의 방위에 코노시마니이마스아마테루미타마(木鳴坐天照御魂)신사가 있다 그리고 그 선을 연장하면 바로 마쓰오 대사가 있다. 반대로 동지의 일출과 하지의 일몰 방위선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하지의 일몰선상에 헤이안으로 천도한 후 칸무천황으로부터 정액(定額)사로  대접받은 신호사(神護寺)가 있고 동지의 일출선상에 쿄토 개척과 관계깊은 장군이며 키요미즈테라(淸水사)를 세운 인물의 무덤이인 장군 총이 있다고 한다. 농경생활을 하던 옛사람들에게는 춘분 ,추분, 하지, 동지가 큰 명절이었다. 일출과 일몰을  자연력(自然曆)으로 이용하여  농사 짓는 기준으로 삼고 태양신을 섬겨 제사를 지냈으니 큰 명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왕이 살고 있는 곳을 가장 중심되는 곳으로 하여 네 방위중 두곳이 하타씨와 관계 깊은 곳이라면 당시를 지배했던 신앙의 힘과 신라계 인물의 위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또 한가지 여기서 빼놓고 갈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삼주도리이(三柱鳥)에 대한 흥미 진진한 내용이다. 오래동안 기둥이 세 개인 이 도리이(鳥居)는 수수께끼였다고 한다. 일본 유일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도 그는 방위로 설명한다. 세 기둥 중  두 기둥은 하지의 일출과 일몰을 나타내는데 그중 일출 방향으로 연장하면 태양 신앙의 산인 히예잔(比叡山)정상이 되고 이 축선을  180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연장하면 마쓰오 대사와 마쓰오 산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지의 일몰의 선을 연장하면 한쪽은 역시 하타씨가 세운 후시미이나리(伏見稻荷)신사에 닿고  반대쪽은 고대부터 수험도(修驗道)의 영장(靈場)으로 유명한 아타고신사(愛宕神社)에 도달한다고 한다.

자, 그러면 정남을 향하고 있는 기둥의 의미는?

정남쪽을 향한 기둥을 180도 반대 방향으로 연장하면 표고(標高) 116미터의 나라비가오카(双가丘)에 도달한다는데...

어제 다녀 온 그 나라비가오카!

쿄토가 헤이안경으로 개척되기 전부터 있었던 무덤 군이라는 이곳은 지금은 이미 무덤군이 아니었다. 44기의 무덤이 있다고 하여 기대하고 갔으나 ‘제1고분 터“라는 설명 간판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산 이쪽 저쪽 어디엔가에 제 2고분 제 3고분등이 있겠구나 싶었다. 안내하는 분에게 미안하여 다 찾아 보지 않고 내려 왔으나 마음이 참 허전했다. 그럴 듯한 무덤군을 상상하고 그곳에 참배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이무덤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바로 하타씨들의 무덤이라고 일본 학자들은 말한다.  마쓰오 대사를 세웠던 하타씨의 조상들을 모신 곳. 일본 인터넷에 들어 가 봤더니 내가 올라갔던 산 언덕의 제1고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소화 55년의 발굴 조사에 의해 그 전모가 밝혀진 이 무덤은 원분으로 직경 44미터, 높이 약 8미터의 횡혈식 석실 고분으로 그 규모로 보아 수장 급 인물의 무덤으로 생각되며 광륭사의 창건자  하타노카와카쓰(秦河勝)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모시고 코류지(廣隆寺)절을 세운 분,  쇼오토쿠태자와 아주 깊은 관계가 있었던 분. ( 이 얘기는 하타씨 첫 번째 이야기에 나와 있다)

쇼오토쿠 태자가 홍역으로 갑자기 죽은  1년 후 신라로부터 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상  1구를 기증했는데 그것이 ‘우는 미륵’으로 유명한 미륵 보살 반가사유상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추앙받는 미륵 보살상 옆에서 태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고 있다는 미륵보살 또한 우리의 눈길을 사로 잡는 코류지의 명품이다 

얘기를 다시 삼주 도리이(三柱 鳥居)로 옮겨 보자.

일본 유일의 세 기둥 도리이,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던 채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누에의 신을 모신 이 신사의 표지인 삼주도리이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미야모토겐지는 이 배치를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하타씨들이 이 삼주도리이를 하나의 장치로 하여 하타씨와 관계가 있는 유적들을 자연력(自然曆)으로 삼아 벼농사를 활성화 시키려고 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남고자 했던 그들의 꿈을 이 자연력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까? 

미국인 일본 연구 전문가였던 코벨 박사는 말년에 일본문화의 고향으로 한국을 빼 놓을 수 없음을 알고 한국 문화를 깊이있게 연구한 인물이다. 그의 책 한부분을 인용하며 하타씨의 길고 긴 이야기를  끝내고자 한다. 

“1984년 한국이 일본에서 들여오려는 40억 달러 차관 소식을 들었을 때 역사가로서 내머리에는 8세기 일본 방직 업계의 한국인 대 부호 하타 가문의 우두머리가 지금 쿄토시가 들어 선 땅을 일본 칸무왕에게 기증했던 역사적 사실이 떠올랐다. 그 땅 값을 현재 시가로 따진다면 차관 해 오는 40억 달러의 몇 십 몇 백배에 해당할 것이다...... 한국인 하타가 기증한 그 땅에서 오늘날 재일 한국인들이 빈민층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코벨 박사의 <일본에 남은 한국 미술>에서)  2009/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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