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현장

HOME > 민족자료 > 민족현장

'지상의 천국' 일본 滋賀현 석가산 百濟寺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작성일 09-02-23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8,171회

본문

‘지상의 천국’  석가산 백제사

                                          최영호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

백제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은 일본에 다섯 개 쯤 있다고 한다.
일본의 건국기념일인 휴일을 이용하여 지난 12일에 갔던 백제사도 그중의 하나로 ,우연히 찾은 보석이었다.
시가현(자하) 비와(琵琶)湖 옆에 있는 오고토(雄琴) 온천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펼쳐 본 관광 안내 책자가 그 시작이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소개로 시작된 이 절이 우리 마음을 끌어 당긴 것은 물론 그 이름이었다.
호텔에서 두 시간 걸린다는 종업원의 자세한 설명을 귀에 담고 네비게이션에 의지하여 찾아 간 곳,  그러나 한 시간 반 만에 우리를 맞이해 준 백제사의 일본식 이름은 구다라절이 아닌 햐쿠사이사(百濟寺).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라고 한다.

이절의 주지스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 최초로  햐쿠사이사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절입니다. 도래인들은 자기의 모국을 구다라라고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구다라라는 이름은 백마강 전투 이후 대량의 백제인들이 오우미(近江)에 도래한 이후에 열린 나라시대 이후라고 생각 됩니다’

절 앞에 있는 설명문과는 좀 달라서  질문을 했더니 그 설명이 틀렸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쇼오토쿠 태자가 고구려 승려이자 스승인 혜자와 함께 이 지역에 와서 ,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모국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햐쿠사이’라고 했고 그걸 받아서 “그러면 당신나라 이름으로 절을 지으시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백제사의 주차장에 서는 순간 , 이 절은 지금까지 일본에서 본 절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먼저 평지에 세워진 절이 아니었다. 높은 산은 아니나 산속이었으며 곳곳에 이끼 낀 돌 층계와 돌담이 긴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어쩌다 가끔 상업화 되지 않은 이름 모를 산사를 발견하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 지는가. 바로 그런 편안함이 온 몸에 퍼진다.
이곳에도 매화가 한창인데 어느 시절 몇백년이나 되었는지 칠도 다 벗겨진 크지 않은 건물과 절문들은 이른 봄 정취와 함께 성큼 우리 마음속으로  다가왔다.

이곳의 주지 스님은 하마나카 료묘(濱中亮明)라는 분이다.
일찍이 쿄오토 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30여 년 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오셨다는 그분은 많은 자료를 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얘기를 해주셨다.
다음은 그분에게 들은 것을 요약한 것이다.

‘백제사는 천태종 고찰로 金剛輪寺, 西明寺와 함께 湖東三山중  하나이지만 그중 가장 역사가 오래 되었고 수수께끼에 가득 찬 절로 두 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 이유는 파란 만장한 역사 때문일 것이다.
606년경,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가 고구려 승려 혜자와 함께 湖東 지역을 여행하고 있었다.
요우카이치 마을에서 투숙할 때 일이다. 매일 밤 동쪽 하늘에서 서광이 비치길래 찾아 갔더니 커다란 삼나무에서 광채가 나고 있었다. 이미 나무의 윗부분이 잘려 나간 나무였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백제의 용운사를 지을 때 이 나무의 상단 부분을 잘라 백제로 가져 가 본존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을 조각했다는 것이었다. 쇼오토쿠태자는 크게 기뻐하며  그 나무를 뿌리 채 캐내어 십일면 관음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시작한 날이 606년 10월 21일, 지금부터 1400여 년 전 일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일찍이 선진기술과 첨단 문화를 가지고 와서 대지를 개척하여 살고 있는 가옥, 의상, 풍속이 다른 도래인들을 위해 그들 나라 이름으로  절을 세우도록 했으니 그것이 지금의 백제사이며 태자가 새긴 십일면관음을 본존으로 하였다. ’

그러나 한국에서 백제시대에 만들었다는 용운사는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백제사는  그후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다섯 번의 화재로 다 불타 버렸는데 그중에서도 전국시대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의 군대가 지른 불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에도시대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오다노부나가 시절에 일본에 있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1573년 5월 27일(불이 난 것은 같은해 4월 11일)의 서간에서
“ Facusangi라고 부르는 대학에는 서로 독립해 있는 다수의 僧院, 座敷(객실),池泉과 庭園을 갖춘 坊舍 1000坊이  세워져 있어 참으로  지상의 천국.....)이라고 극찬하며 폐허가 되어 버린 것을 애석해 하는 글을 남겼다는데 절 앞의 안내문에도 그의 문장이 요약되어 있었다.

門을  들어 서서 먼저 천하 원망(遠望)의 정원(庭園)이라는 희견원(喜見園)의 원망대(遠望臺)로 올라 갔다.  저 멀리로, 비와호수와 희예산등이 한눈에 보이는 곳.
  그리고 북위 35.1도 선상인 이절에서 부터 서쪽으로  880키로 미터 떨어진  같은 북위 35.1더 선상에 백제가 있다고 한다.
 안내도에서 보니 백제사와 우리 나라 백제가 일직선상에  있다
주지 스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일본  최초의 승정이라는 높은 지위를 얻었던 백제 승려 관륵은 602년에 일본으로 건너 가
일본에 천문 지리 역법 등을 전하고 불교문화 진흥에 크게 기여 했는데 그 분이 햐쿠사이사 창건을 위한 터와 방위 결정등에 관여 했다는 것이다.
관륵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북위 35.1선상이야  말로 백제의 망향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그분의 설명을 들으며 나도  비와호수 넘어 망향선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보았다.
 그리운 고국을 떠나 온 선진문물의 백제인들은 이곳 절에 올라, 멀리 두고 온 산하를 바라보며 두고 온  가족들의 안녕을 부처님께 빌었으리라. 

한반도  최남단에서 뗏목을 띄우면 일본 해류를 타고 저절로 며칠안에 와카사에 표착하게 된다고 한다.
 5,6,7세기에도 백제인들이 이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쿠이현인 이곳은 겨울에 엄청 눈이 내려 살기에 적당치 않아서 그들은 넓은 비와호수 동쪽의 평야가 보이는  오우미(近江)로 남하하여  선진문물로 농경생활의 터전을 만들고 부처님을 믿으며 살고 있다가 쇼오토쿠 태자 일행을 맞이했을 것이다.

희견원 연못속의 잉어가 한가롭다. 바위와 나무와 물의 배치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를 뒤로 하고 본당으로 가기 위해 인왕문을 향하여 이끼 낀 돌 층계를 올라 간다. 완만한
계단 길이다.  양쪽에는 자생 동백 100여 구루가 꽃망울을 자랑하고 있다. 3월부터 5월까지 동백 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좀 일렀구나.......   
에도시대에 지어 진 이 본당에  십일면 관음상이 안치되어 있다는데 비불이라 볼 수는 없었다. 
오다노부나가 군대에 의해 화재에 휩싸이기 전날 ,쇼오토쿠 태자가 조각했다는 이 관음상은다행이도  뒷산 8키로미터 떨어 진 곳으로 피난에 성공했다.  그 이후 관음상의 신통한  힘이 더 유명해 졌다고 한다.

본당 왼쪽으로 종루(鐘樓)가 있다. 크지 않았으나 종유(鐘乳)가 108개라던가..
우리나라와는 달리 자유롭게 종을 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종이 대단했다. 겉 보기와는 달리 종소리가 아주 우아하다.
여운도 아주 길고 맑았다. 2분 12초 동안, 끊어 질듯 , 이어지는 아름다운 소리, 1950년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에밀레 종소리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쳐 봤다.

본당과 종루 사이에 이 절이 가지는 또하나의 명물이 있었다. ‘천년 보리수 ’ 라는 이름의 나무다.
1573년 화재로 불을 만났으나 뿌리까지는 타지 않고 살아서 다시 가지가 부활한 나무란다. 석가님이 성불하신 곳이 보리수 아래였으니 부처님의 가호로 불을 피한 모양이다.
약 80센티미터 기둥은 죽었으나 사방으로 다시 가지가 살아서 지금은 직경 150센티미터의 건강한 보리수로 자라고 있었다. 6월에는 그 향기가 주변을 번거롭게 한다던가....

주지 스님은 백제사의 화려했던 역사를 다시 재건하려는 의지가 아주 강한 분이셨다.
일본에서도 아주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절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으로 우선 일본 명찰 100선(選)안에 넣기 위한 작업을 하고 계셨다,
한국과의 연결도 끊이지 않고 하시는 듯 매년 한번씩은 방문한다고 한다.
그분의 뒤에는 치마 저고리를 입은 한국 여인을 모델로 한 우리 나라 달력이 걸려 있다.
저 달력을 관륵이 전해 주었지.....

나는 돌아 오는 차안에서 주지스님이 하신 말씀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1400여넌전에 세워 진 백제사의 본존과 용운사의 본존은 한 나무에 의해 조각된 관음상입니다 여기에 한일 교류의 원점이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goodsociety/90042971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