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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서 壯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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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정남 작성일작성일 09-01-12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8,5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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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서 좡족(壯族)을 찾아서

                                            김재원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원)

  좡족은 그 인구가 2000년 인구조사 기준으로 1,617만 8,811명이나 되는, 한족을 제외한 중국의 소수민족 중 최다의 숫자를 가진 민족이다. 우리가 찾은 광서좡족자치구에는 좡족의 87%인 1,420만 정도가 거주하며, 광서좡족자치구 전체 인구 중 3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좡족은 춘추전국시대의 월(越)나라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스스로 부르는 자칭이 20개가 넘는다. ‘뿌썅(布爽)’, ‘뿌쫭(布壯)’, ‘뿌농(布農)’, '뿌만(布曼)'등이 대표적으로, 여기서 ‘뿌’(布)는 좡족 말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좡족의 통칭을 ‘통’(潼)이라고 했다가, 이 글자가 어린아이, 하인 등을 연상한다고 하여 1965년 주은래의 주도로 민족명칭이 ‘좡’(壯)으로 개칭되었다.
  좡족은 한족 세력에 의해 밀려나 남부와 남서부의 산악지대로 도망쳐와 살게 되었다. 광서좡족자치구 지역 자체도 예로부터 한족들에게 ‘팔산일수일분전’(八山一水一分田)이라고 불리는 산악지대였다. ‘팔산일수일분전’은 말그대로 8할이 산이고 1할이 물이고, 농사지을 만한 땅은 1할에 불과하다는 말로, 좡족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경작이 힘든 산을 논밭으로 일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좡족은 오랫동안 윤택한 삶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찾은 광서좡족자치구와 좡족은 이러한 과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명나라 말기부터 유입된 한족의 영향,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현대화의 영향으로 좡족의 전통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좡족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고 있다. 비록 2000년 기준으로 좡족의 도시거주 비율은 8.79% 정도로 중국 평균(23.55%)보다 훨씬 낮지만, 도시로의 이주는 점차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이제 좡족, 특히 도시에 사는 좡족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한족과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며, 좡족의 전통옷을 고수하는 좡족도 나이든 여성들 정도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통적인 좡족의 생활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관광지로서 전통적인 모습이 보존된 촌락이나 한화와 현대화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시골마을 정도뿐이다.







1. 산속 깊숙이 있는 마을- 금죽채(金竹寨)




 
  우리 일행이 찾은 용승각족자치현(龍勝各族自治縣)의 좡족 마을 ‘금죽채’(金竹寨)는 관광지로서 좡족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살아남은 케이스이다.
  금죽채는 총 82호로 400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모두 13개의 부락으로 구분된다고 하는데, 이 중 11개 부락은 좡족의 부락이고 2개 부락은 야오족 부락이라고 한다. 야오족 주민이 좡족 주민과 함께 살고 있는 이유는 야오족이 비교적 최근에 정주화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야오족은 예전에 화전 농업이나 수렵으로 생계를 꾸려서, 시기마다 새로운 경작지나 수렵장을 찾아 이동하는 생활을 해왔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정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인민정부가 다른 민족과 함께 살며 농업기술을 배우도록 지도하였는데, 금죽채의 야오족은 좡족과 함께 살며 농업기술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좡족의 촌락은 적게는 20명, 많게는 2천 명의 사람들로 구성되며, 규모가 있는 촌락들은 강이나 도로에 시장을 설치하여 운영한다. 좡족의 마을로 이주해오는 외지인은 반드시 촌락외곽에서 거주해야만 하며, 온 시기가 늦어질수록  더 외곽에 거주한다고 한다. 관광지인 금죽채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가게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금죽채로 가는 길은 산길이지만, 오늘날에는 시멘트로 도로가 포장되어 차량이 다니는데 큰 지장이 없다. 사진은 금죽채 부근 도로 공사 현장
 
  금죽채는 찾아가기 힘들 정도로 산 속 깊숙이 위치해 있다. 도로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승현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가까이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금죽채가 이렇게 산속 깊숙이 위치한 이유는, 한족 등 다른 민족의 침입 때문이다. 특히 한족은 줄기차게 좡족의 영역을 침범해왔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군대가 오늘날의 광서 지역을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한족의 좡족 지배가 시작되었다. 진나라 말기인 기원전 203년에는 진나라의 혼란을 틈타 남해군을 다스리던 조타(趙佗)라는 한족이 광동지역과 광서지역, 그리고 베트남 북부지역을 병합하여 남월(南越)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비록 군주가 한족이었으나 이로써 좡족은 한족의 중앙왕조로부터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조타 등 남월의 군주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좡족에게 호의적으로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의 한무제의 공격으로 남월은 기원전 111년 멸망하였고, 좡족은 다시 한족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후에도 좡족은 한족에게 굴하지 않고 11세기인 송나라 때에 오늘날 베트남 지역에서 일어난 농지고(儂智高)의 반란에 호응하여 한족에 대항하는 전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송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였고 이 지역은 평정되었다. 송나라는 이때 오늘날의 광서좡족자치구 지역 대부분을 세력권에 넣고 이 지역에 광남서로(廣南西路)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하여 중앙권력의 직접적인 통제아래에 두었다. 한족의 송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족의 원나라도 광서 지역을 병합하여 원나라의 관리를 상주시키는 광서행성(廣西行省)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때도 전국 13개의 황제 직할령인 포정사사(布政使司) 중에 하나를 광서 지역에 두었고 명나라 말기 만력제(萬曆帝) 때 토벌군을 보내어 반란세력이 준동하고 있던 광서 지역을 재차 평정하였다. 명말청초의 정권 교체기에는 특히 많은 한족이 광서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와, 많은 좡족들이 이들의 세력에 밀려 산지로 이주해갔다. 청나라도 광서성(廣西省)을 두어 이 지역을 계속 지배하였다. 그 외에도 명나라 말기에 있었던 왜구의 약탈, 청나라 말기의 프랑스 세력의 침입 등 좡족은 외세의 침입에 계속 시달려야만 했다. 이에 좡족은 한족 및 다른 민족의 지배 및 수탈을 피해서 산간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 결과 대부분의 전통적인 좡족 마을은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금죽채의 계단식밭은 ‘용승 다락밭’이라고 하여 유명한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름의 녹색빛깔, 가을의 황금빛깔, 겨울의 눈 쌓인 논밭은 훌륭한 정경이다. 



 
  산속 깊이 들어가 금죽채를 만든 좡족들은 산간 지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좡족에게 있어서 농업은 일반적인 생업이다. 한족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하여 평야 지대에 사는 일부 좡족을 제외하면 좡족의 거주지가 대부분 산간지역에 있어 농경에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있는 하천에서 물을 끌어와 관개시설을 만들거나 빗물, 우물물을 이용하여 여러 곡식을 재배해왔다. 산지를 경작지로 이용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논밭을 만들어 벼농사를 하여 쌀을 주식으로 삼았고, 찹쌀, 옥수수, 고구마 등도 많이 심어 부식으로 삼았다.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뜻한 아열대성 기후 덕분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모작이 가능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삼모작도 할 수 있어서 산지라는 불리한 점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금죽채의 경우는 가까이에 하천이 없었기 때문에 빗물과 산에서 나오는 샘물을 이용하여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다. 특히 이곳의 계단식 논밭은 규모가 크고 자연 경관이 좋아 오늘날에는 광서좡족자치구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소수민족을 보러온 우리 일행이 매우 드문 케이스이고, 대다수의 금죽채 방문객들은 이곳의 계단식 논밭, 즉 ‘용승 다락밭’을 보러 온다고 한다.
  농업 외에도, 인근 강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가축으로 돼지와 닭, 오리 등으로 길러 먹을거리를 보충하였다. 소나 물소를 경작용과 식용으로 기르는 경우도 많다. 말, 노새 등은 식용으로 쓰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물품을 운반할 때 활용한다. 또한 버섯, 약초 채집, 수렵 등도 생계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예로부터 목공, 석공, 건축, 재단, 대나무 짜기, 직물 짜기 등의 수공업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납염 기법으로 염색을 한 옷감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좡찐(壯錦)이라고 불리는 이 천은 면사와 5색의 비단실로 만들어 지는데, 당나라 때부터 아름다운 천으로 유명하였다. 명나라 때는 황실이 정한 공예품으로 지정되기까지 하였고 오늘날에도 특산품으로 많이 팔린다.
  남녀 간의 노동은 분업이 되어 있어, 남자는 경작과 가축의 관리를 맡고, 여자는 모내기, 직물 짜기, 수확, 가축에게 사료 주는 것을 담당한다.
  금죽채의 논밭 정경. 겨울철이라 논에는
벼가 자라지 않고 있지만, 아열대 기후인
덕에 이 시기에도 채소는 잘 자란다.
좡족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옥수수,
고구마 등 여러 잡곡을 부식으로 먹는다.        논밭에 거름을 누고 있는 좡족 노인. 이 곳의 논밭은 화학비료나 농약 같은 것을 주지 않는다. 굳이 그런 것을 하여 생산량을 늘리지 않아도 관광지로서의 수입과 정부에서의 지원금이 있기 때문에 생계에 지장이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좡족은 고유의 언어인 좡어를 사용하며, 좡어는 다른 광서좡족자치구의 소수민족 언어인 부이(布依)어, 수이(水)어, 동(侗)어, 마오난(毛南)어, 무라오(仫佬)어와 함께 한(漢)․장(藏)어족 캄․타이 어군 속하는 언어로 이들 언어와 높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수의 좡족이 좡어 뿐 아니라 한(漢)어도 구사할 수 있으며, 관광지인 이 마을의 좡족들 역시 좡어와 함께 한어를 쓴다. 좡어는 광서 남쪽에 있는 강인 주강(珠江)을 기준으로 북부 방언과 남부 방언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1천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북부 방언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에 의해 좡어의 표준어로 권장되고 있다. 금죽채 역시 광서좡족자치구의 북쪽 지역에 위치하는 만큼 이 곳에서 쓰는 좡어도 북부 방언에 속한다. 문자의 경우, ‘고장문’(古壯文)이라고 불리는 당나라 때부터 쓰던 방괴문자 형식의 좡족 고유의 문자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 문자는 사용법이 복잡하여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이에 1950년대에 중국 정부가 라틴 자모를 이용하여 좡어의 북부 방언을 기본으로 한 좡족 문자를 만들어 보급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죽채에서는 어디에서도 좡족 문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2. 좡족의 집을 보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대부분 다락밭을 보러 오기 때문에 우리 일행 같이 소수민족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관광객을 맞이하러 나온 한 소녀에게 다락밭이 아닌 소수민족인 자신들을 보러왔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하니까 좡족 중 한 소녀가 자신의 집을 보여주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소녀의 복장은 좡족 전통복장이었는데, 추운 날씨 때문에 서구식 점퍼를 그 위에 껴 잆고 있었다. 금죽채의 대부분 사람들이 좡족 옷을 입지만 전통적인 좡족 옷은 얇은 편이기 때문에 추운 날씨에는 이 위에 점퍼 같은 다른 옷을 겹쳐 입는다고 한다. 좡족이 푸른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좡족의 전통 복장은 푸른색 계통이 많으며, 남자는 통이 넓은 긴 바지를 입으며, 여자도 통이 넓은 긴 바지를 입는 경우도 입고 치마를 입는 경우도 있다. 여자의 허리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앞치마가 둘러지며, 형편이 좋다면 옷에 은장식을 많이 넣는다. 그러나 좡족의 전통복장도 도시에 사는 좡족이나 젊은 좡족들이 한족과 같은 방식의 옷을 입으려고 하기 때문에 점차 이를 입고 있는 사람을 보기가 어려워지는 추세라고 한다.

 
 금죽채의 큰 길 쪽에 있는 집들은 현대식 건물이지만 산에 있는 집들은 전통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금죽채에서 우리를 안내해 준 좡족 소녀와 함께한 조정남 한국민족연구원 원장
 

  중국 남부의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집을 2층이나 3층으로 지으며 1층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창고, 축사 등의 공간을 활용한다. 굳이 2층, 3층집을 짓는 이유는 사람이 지면 가까이서 생활하기에는 기후가 너무 습하기 때문이다. 지면 가까이 있으면 지면에 찬 습기로 인해 질병이 걸릴 가능성이 높으며, 벌레가 생기기도 쉬워 음식물의 안전한 보관과 섭취가 어려운 것이다. 이에 이들 소수민족은 대대로 2층, 3층집을 지어서 살아왔다. 전통적인 가옥에 쇠로 만든 못을 박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이것도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이다. 습한 기후로 박은 못이 부식되어 버리면 집이 무너질 염려가 있으므로,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은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못으로 집을 고정시키고 있다. 이는 좡족인 이 소녀의 집도 차이가 없어, 그녀의 집은 동족, 야오족 등 광서좡족자치구의 다른 소수민족들과 마찬가지로 3층 집이었고, 쇠못 없이 나무못으로 집이 고정되어 있었다.

 
 땔감으로 쓸 장작이 쌓여 있고, 뒤쪽 끝에는 변소가 설치되어 있다.  좡족은 집 1층을 창고, 변소 및 돼지, 닭 등의 축사로 활용한다. 
 
 
  1층에는 농기구나 땔감 등을 놓아두는 창고가 있었고, 돼지 세 마리를 기르는 조그마한 가축우리가 있었다. 또한 재래식의 변소가 1층 한쪽 구석에 있었다.
  2층은 부엌 및 주방, 거실 등 공동의 생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부엌 중앙에 화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기는 하지만 워낙 산골지역이다 보니 가스 시설은 들어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화로의 연료는 전통 그대로 나무 땔감을 사용하고 있었다. 화로 주변에는 바닥이 타지 않도록 시멘트가 발라져 있었으며, 불의 강도에 따라 냄비의 위치를 조정하는 지렛대와 장작이 불에 잘 타도록 하는 부지깽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마침 우리가 왔을 때는 1층 축사의 돼지들에게 줄 돼지죽을 끓이고 있었다.
  가스시설이 없는 대신 전기는 들어와 있어서, 타일로 잘 꾸며놓은 조리대 위에는 전기버너도 있었다. 기타 조리 기구에는 전통적인 것은 눈에 띄지 않았으며, 프라이팬, 철제 국자 등 현대식 조리기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이런 곳에까지 있을까 싶은 코카콜라, 중국식 이름으로는 可口可樂이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부엌 중앙에 설치된 화로의 모습. 전통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화로 주변에 시멘트를 발라놓아 화재의 위험을 막고 있다.      부엌 조리대의 및 찬장의 모습. 전기 버너, 철제 프라이팬, 철제 국자 등 현대식 조리기구가 전통적인 조리기구를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구석에는 코카콜라도 보인다. 
 
  2층에는 부엌 외에도 거실 역할을 하는 넓은 공간, 그리고 식량 창고가 있었다. 식량 창고가 2층에 있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습기 찬 지면에서 되도록 거리를 두어 식량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거실 이곳저곳에는 가족사를 찍은 사진과 장식을 위한 그림, 복을 빌기 위한 현판들이 걸려 있었다. 이곳에서 이 가족이 상당히 한화(漢化)되었다는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한족처럼 복을 비는 문구로 ‘복’(福)자를 문에다가 거꾸로 붙여놓았고, 식량창고에는 한족처럼 도교의 신의 그림을 붙여 놓았다. 거실에 있는 복을 빌기 위한 현판들도 한족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문구들이었다.   

  2층 거실의 벽면. 한족과 유사한, 복을 비는 현판들이 걸려 있다. 문에 복(福)자를 거꾸로 붙이는 것도 한족의 풍습이다.  집 대문의 모습. 대문에 붙여 놓은 글씨와 글귀도 한족과 별반 다르지 않다.

  3층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층이라기보다는, 지붕 밑의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 곳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았다. 3층 전체가 하나의 바닥으로 깔려 있는 것이 아니고, 2층에 있는 방들의 윗부분을 바닥으로 하는 공간에다가 별도의 침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3층이 2층과 같은 식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고 물건을 놓을 수 있다면 가옥에 지나친 무게가 가해져 붕괴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구조로 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3층은 개인의 침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의외로 서구식 침대가 놓여 있었고 매우 깨끗하며 전기도 들어와 있었다. 좡족의 전통적인 침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3층에서 2층을 내려다본 모습. 3층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층이라기보다는 지붕 밑 짜투리 공간을 활용한 곳이었다.
  가옥의 지붕에는 기와가 덮여 있다. 문양 없이 조그마한 기와조각을 2중으로 쌓아올려 만든 기와지붕은 이 지역 소수민족의 가옥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굳이 기와를 올려야 하는 이유는 이 지방이 비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잦은 비가 목조로 된 건물을 부식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비가 많기 때문에 번거로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좡족에게 있어, 특히 이곳 금죽채의 좡족에게 있어서는 잦은 비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접한 강이나 하천이 없어 잦은 비에 농작물의 경작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수만이라면 산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이용하면 충족시킬 수 있지만, 농작물을 경작하는 데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좡족의 집 지붕. 기와가 얹어져 있으며
 전깃줄이 들어와 있다.
 
  이 소녀의 집이 좡족의 전통적인 주거형태로, 이러한 집 구조를 간란누방(干欄樓房, galans)이라고 부른다. 간란누방은 직사각형 형태의 집을 짓는 것이 원칙이며, 지역에 따라서는 대나무로 집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평지나 비교적 습하지 않은 지역에 사는 좡족들은 한족의 영향을 받아, 한족과 같이 1층짜리 집을 짓고 사는 경우도 많다. 이때 1층짜리 집은 나무, 벽돌, 흙, 띠(茅) 등으로 만든다. 현대화와 한화의 영향으로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집이나 벽돌로 만든 기와집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3. 좡족의 연애, 결혼 풍습에 대해 묻다
 
  우리를 안내해준 좡족 소녀는 올해 20살인데 아직 미혼이라고 한다. 또한 사람에 따라 개인차는 있지만, 자기 마을에서는 20살 정도에 시집가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좡족의 젊은 남녀는 다른 민족에 비해 자유연애의 기회가 비교적 많았다. 대표적인 자유연애의 수단으로, 가우(歌圩)의 풍습을 꼽을 수 있다. ‘가우’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개최하는 ‘대가’(對歌)의 행사이다. ‘대가’는 말 그대로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고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이는 좡족의 오락수단이자 구애의 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풍습이다. 마을의 노래경연대회인 ‘가우’는 매일 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음력 정월 초하루인 춘절(春節)이나 가을의 중추절(仲秋節)을 전후한 기간, 음력 3월 3일 등 특정한 기간에만 행해진다. 특히 음력 3월 3일에 있는 ‘삼월삼’(三月三)의 축제기간은 좡족 공통의 것이며, 대가가 가장 성대하게 이루어지는 기간이다.
  ‘가우’가 가장 성대하게 이루어지는 시기인 음력 3월 3일이 되면 마을 외곽 언덕이나 물가 같은 곳에 젊은 남녀들이 모인다. 이들은 서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드는 상대와 가까워지고 구애를 한다. 여자가 남자의 구애를 허락한다면 정표로서 색깔 있는 비단으로 만든 공을 주는데, 이 공은 12개의 꽃잎 모양으로 되어 있다. 12개의 꽃잎 모양은 1년 12달을 상징하여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렇게 구애와 정표를 주고받으면 둘은 공식적으로 사귀는 사이가 된다.
  오늘날 광서좡족자치구는 이 풍습을 국내외 유명 가수들을 초대하여 가지는 페스티발로 승화시켜 계승하고 있다. 이 축제는 1993년에 ‘광서국제포크송페스티벌’(Guangxi International Folk Song Festival)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며, 1999년에 ‘남녕국제포크송페스티벌’(南宁國際民歌藝術節, Nanning International Folk Song Festival)로 이름을 바꾸어 더욱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다.

                          남녕국제포크송페스티벌의 모습. 출처: 신화통신

  가우 등의 축제 기간에는 젊은 남녀들이 모여 수를 넣은 공(繡求)을 서로 던지는 놀이를 하는데,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있어 오락 거리이자 연애의 수단이기도 하다. 공의 모양은 지역에 따라 둥근 것도 있고 네모난 것도 있다. 공 안에는 겨나 솜을 넣어 두툼하게 만들고, 30 센티미터 정도의 색깔 있는 끈으로 공 주위를 묶어 이를 고정시킨다. 이 공을 가지고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공놀이를 하는데, 남녀 별로 두 개의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공을 던지고 한 팀은 이를 받으며 논다. 이때 남자는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손수건 같은 것을 은밀히 건네주며, 여자가 이를 수락할 의사가 있다면 선물로 화답한다.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공을 던져 이를 구애의 표시로 삼을 수도 있는데, 만약 이때 공을 잘못 던져서 마음에 둔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가 공을 받게 되면 공을 받은 남자와 교제를 해야만 한다. 
  이러한 자유연애의 풍습이 있기는 하지만, 좡족 풍습에서 결혼 자체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집안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 했다. 부모들의 의사로 결혼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동성, 특히 4~5대 이내의 가까운 동성끼리는 결혼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친척과의 결혼이 금지되는 것은 친가 쪽의 이야기이고 외가 쪽과의 결혼은 오히려 선호하여, 외삼촌의 자녀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족의 영향으로 결혼에 있어서 궁합을 보는 것도 일반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과거에는 조혼이 많았는데, 조혼의 영향으로 인하여 결혼한 후에도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 신부가 친정집에 계속 머무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친정집은 아직 어린 딸에게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고, 딸의 노동력을 농사에 활용할 수 있었다. 단, 명절이나 농번기에는 딸이 시집으로 가서 있을 수도 있다.

    좡족의 결혼식 모습.
출처: http://www.guilintourist.com
 
  좡족의 결혼풍습은 많이 한화되어 한족과 유사해졌지만, 몇몇 의례에서 과거 좡족의 결혼풍습이 남아 있다. 특히 신부를 신랑 측에 전달할 때 한 사람의 청년에게 신부를 신랑 측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기는 것은 좡족의 과거 결혼 풍습인 ‘신부 훔치기’의 흔적이다. 한화의 영향을 받기 전의 과거에는 신랑과 그의 친구가 신부를 몰래 훔쳐서 도망가서 결혼한 후에 신부 집에 예물을 보내며 용서를 비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결혼식 때 신부를 업고 가는 청년이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기 전까지는 신부의 발이 땅에 닿게 하면 안 되는 것도 이러한 풍습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신부의 발이 땅에 닿는다면 액땜을 위해서 신랑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셔야만 한다.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면 부모로부터 떨어져나가 독립해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좡족의 가족은 대부분 핵가족의 구조를 가진다. 단, 막내아들이나 외동아들만은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막내아들이 유산의 상속에 있어 가장 큰 몫을 받는 우선권이 있다. 재산의 계승은 부계(父系)로 이루어지지만, 딸에게도 유산의 상속권이 있다.
  일단 결혼을 하면, 웬만하면 평생 같이 살아야하며, 이혼은 매우 꺼려지는 행위로 사회악으로까지 여겨진다. 다만 사별 등으로 헤어진 경우에는 재혼을 하는 것이 비난받지 않는다. 
  현대화의 물결로 인해 이러한 관습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농촌거주 인구의 비율이 높은 편인 좡족의 특성상 이러한 관습들은 어느 정도 보존되고 있다.
 

4. 비록 음식 대접은 못 받았지만- 좡족의 식문화와 예절

  소녀는 우리 일행에게, 미처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과를 하였다. 우리 일행은 갑작스런 방문이니까 그런 것은 당연하며, 우리를 집에 들여보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좡족은 손님을 중하게 여기는 민족이다. 과거에는 부락 어느 한 집의 손님을 부락 전체의 손님으로 여겨 환대하여, 여러 집에서 번갈아 가며 초대하며 풍성한 요리와 술을 내놓으며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나이에 따른 예절도 매우 분명하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노인이 자리에 앉아서 먹기 전에는 감히 음식을 먹지 않는다. 우리와 비슷하게,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음식이나 차를 줄 때에도 반드시 두 손으로 공손히 드려야 한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식사를 끝마쳐야 한다. 좡족에게 있어 식사는 함께 끝내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좡족의 오색찹쌀밥.  출처: 중국국제방송 홈페이지 kr1.chinabroadcast.cn)
  좡족의 주식은 쌀이고, 옥수수, 고구마 등 여러 잡곡을 부식으로 먹는다. 특히 찹쌀을 좋아하고, 절인 고기와 시고 단 음식을 좋아한다. 차도 즐겨서 유채로 만든 기름에 볶은 여러 가지 곡식을 녹차에 넣고 함께 끓여서 만드는 유차(油茶)를 많이 먹으며 손님에게 내놓는다. 명절 때에는 보라색의 등나무 덩굴로 만든 보라색 물, 국화로 만드는 노란색 물, 단풍잎으로 만드는 빨간 물 등으로 찹쌀에 여러 가지 색깔로 물을 들인 후 쪄내어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흰색의 오색 밥을 지어 먹는다. 평상시에도 이 오색찹쌀밥을 만들어 주먹밥으로 해서 먹는다. 같은 방법으로 달걀, 오리알, 거위알 등을 물들여서 먹기도 하며, 운남성의 문산(文山)좡족먀오족자치주 등의 지역에서는 음력 3월 3일 등에 찹쌀을 ‘크람’이라는 나뭇잎으로 싸서 붉은색 물을 들이게 하여 붉은 밥을 짓는 관습이 있다.

 좡족의 구운돼지고기 요리.
 출처: 중국국제방송 홈페이지
 (kr1.chinabroadcast.cn)
 
  이외에도 찹쌀에 대추, 돼지고기, 녹두, 깨, 버섯 등을 넣어 쪄 먹기도 하고, 호박이나 고구마를 가마에 넣어 익힌 다음 그 위에 찹쌀을 얹고 쪄서 만드는 호박밥과 고구마밥도 먹는다. 찹쌀로 가루를 내서 떡을 만들어 기름에 튀겨 먹기도 한다.
  좡족은 터부시하는 고기가 없어 여러 가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데, 특히 구운돼지고기와 두부요리가 유명하다. 돼지고기는 짚으로 잘 구워 향을 넣은 다음에 꺼내어 기름을 발라 다시 장작불에 구워 익혀서 먹는다. 이 요리는 명절 때나  큰 집안일이 있을 때 손님 대접용으로 내놓는다. 두부요리는 ‘두부원’(豆腐圓)이라고 부르는데 초두부와 돼지고기, 땅콩, 파, 소금, 찹쌀 등으로 소를 만들어 두부 속에 넣어 기름에 튀겨서 먹는다. 
  비록 중독성이 있고 구강암을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빈랑(betel) 열매를 씹는 사람이 많다. 특히 여성들이 많이 씹어서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이 좡족 여성들이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이 광서 지방의 서남쪽을 중심으로 남아있다. 빈랑열매를 손님 접대를 위해 내놓기도 한다.





5. 좡족 고유의 종교를 찾아볼 수 없는 좡족 소녀의 집

 소녀의 집 3층 침실의 모습. 침대가 있어 좡족의 전통적인 침실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 있었다. 좡족 고유의 신앙인 화왕성모를 위한 꽃묶음 같은 것은 걸려 있지 않았다
 
 
  전통적인 좡족의 종교는 조상숭배와 자연숭배이며, 한족의 영향으로 대승불교와 도교도 많이 믿고 있다. 가장 숭배하는 것은 부락신과 토지신으로, 마을마다 이들을 위한 신당이 만들어져 있고 마을 어귀의 나무아래에는 돌 두 개를 놓아 부락신의 우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화왕성모(花王聖母)’라는 우리의 삼신할매와 비슷한 아이들의 수호신도 모셔서, 아기를 낳으면 산모의 침대 머리 쪽 벽에 들에서 꺾어온 꽃묶음을 걸어 놓아 신주로 삼는다. 아이는 자란 뒤 해마다 설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이 꽃묶음에 절하여 자신을 점지해주고 잘 크도록 키워준 화왕성모에게 감사를 표한다. 좡족의 무당은 좡족의 민간신앙과 문화의 전승자 역할을 하며 악귀를 쫓는 일도 한다.
  그러나 금죽채 및 이 소녀의 집은 책에서 봤던 좡족의 종교와 차이가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돌 두 개가 놓인 것이 보이지 않았고, 소녀의 집 침실에도 화왕성모를 위한 꽃묶음 같은 것은 걸려 있지 않았다. 다만, 도교의 영향을 받은 문구와 그림들이 눈에 띄었고,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도교와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것은 모두 한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소녀의 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종교의 흔적은 모두 한화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었고, 좡족 고유의 신앙 형태는 발견할 수 없었다.
 


6. 좡족의 악기

  좡족 지역 호텔에 전시되어 있는 동고의 모습. 좡족에게 있어 동고는 매우 신성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지인에게 보여주는 것도 꺼린다.

  우리 일행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호텔의 로비에 좡족의 전통적인 악기인 동고(銅鼓)가 전시되어 있었다. 동고는 말 그대로 구리로 만든 북이며, 크기는 다양하여 큰 것은 직경 1m가 넘는 것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청동 재질이다. 북의 한 면에는 개구리 등 토템의 의미가 있는 동식물이나 식량의 풍족을 기원하는 의미로 태양, 곡식, 생선 등이 새겨져 있다. 좡족의 과거 풍습을 반영하는 노 젓기 경기 모습, 춤을 추는 사람의 모습 등이 새겨진 경우도 있다. 이 동고는 하늘과 직접 통하는 신통력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마을에서 명망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으며, 보통 마을에서 1개 또는 2개 정도가 있다. 동고의 소유자 외에는 함부로 동고에 손댈 수 없으며, 특히 외부인에게는 동고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린다. 과거에는 전쟁 때 사기를 북돋는 용도와 제례를 위해 사용했지만, 오늘날에는 신에 대한 제사, 장례식, 새로 집을 짓거나 노인의 장수를 기념하는 날, 아이를 출산한 날 등,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관혼상제의 의식에 사용한다. 좡족 뿐 아니라 야오족, 먀오족 등 이 지역 다른 민족들도 동고를 사용하고 있으며, 수이족, 푸이족, 좡족, 와족 등 운남성의 소수민족들과 베트남의 일부 소수민족도 동고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의 남부 지방 민족들에게 동고는 상당히 보편적인 제례 악기이다.
 
    마구후(馬骨胡) 대의 머리끝이 말머리 모양이다.       
 
  이외 장족이 사용하는 악기로는 마구후(馬骨胡), 후루후(葫盧胡), 투후(土胡), 젱니(箏尼), 생황(笙), 퉁소(籥), 피리(笛), 스오나(嗩吶) 등이 있으며, 이중 마구후, 후루후, 투후, 젱니는 좡족의 고유 악기이다.
  마구후는 몽골에서 건너와서 중국의 전통악기로 자리 잡은 얼후(二胡)와 유사한 악기로, 두 개의 줄과 말이나 소, 노새 등의 넓적다리뼈로 만든 소리를 내는 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리를 내는 통의 앞쪽은 뱀가죽, 상어가죽, 개구리가죽 등의 가죽으로 싸여 있다. 줄을 지탱하는 대의 머리끝이 말머리 모양인 것이 특징이다.

            후루후(葫盧胡)            젱니 (箏尼)     

 후루후 역시 두 개의 현이 있는 현악기로서, 얼후나 마구후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소리를 내는 통이 조롱박으로 만들어졌고, 소리통의 앞부분이 얇은 나무로 덮여 있는 점이 특징이다.
  투후(土胡)도 두 개의 줄이 있는 현악기이며, 소리통은 조롱박으로 만들되 뱀가죽으로 소리통의 앞부분을 덮는 악기이다. 마구후보다는 낮은 음색을 낸다.
  젱니(箏尼) 역시 현악기로, 7개의 현이 있는 악기이다. 다른 현악기와 마찬가지로 활로 현들을 문질러 소리를 낸다.
 
 
 7. 좡족의 특이한 풍습

  앞서 언급한 대가(對歌)의 풍습과 수 넣은 공을 던지는 풍습(繡求) 외에도 좡족에게는 여러 재미있는 풍습이 있다.
  광서 난단(南丹) 등의 지역에 사는 좡족에게는 축구와 비슷한 경기를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다만 축구와 다른 점은, 발로 직접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목발 위에 올라선 후 목발로 달리며 공을 찬다는 점이다. 이는 광서 난단 지역의 좡족 사이에서 과거 남송시대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풍습이다. 헝겊으로 만드는 공이 없었던 과거에는 공 대신 왕귤나무의 열매로 경기를 했다고 한다.
  일부 좡족에게는 나무로 만든 신을 여러 명이서 함께 신고 춤을 추는 풍습이 남아 있다. 적게는 두 명에서 많게는 네 명까지 함께 한 짝의 신발을 신고 춤을 추는데, 여러 팀이 함께 경쟁을 하여 우열을 가린다. 동작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면 춤은커녕 걷기조차 힘들므로 서로 간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 춤은 좡족들에게 서로 화합하고 협동심을 기르는 기능을 한다.
  전설에 따르면,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때 왜구가 득세를 부려 광서의 해안까지 침탈하자, 좡족들이 병사가 되어 왜구에게 맞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좡족을 이끈 좡족의 여장군 ‘와’가 병사의 협동성을 기르기 위한 훈련 방법으로 세 명의 병사들의 다리를 서로 묶고 함께 움직이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 풍습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비록 많이 사라졌지만 몇몇 지방에서는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좡족의 풍습 중 하나로 이를 뽑아서 땅에다 심는 행사를 들 수 있다. 좡족의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그의 이 중 하나를 뽑고 이를 성인이 되었다는 표시로 삼는 것이다. 과거의 좡족은 뺀 이가 나중에 식물로 자란다고 믿었다. 그래서 윗니를 뺀 경우라면 지붕 위로 던져서 아래로 자라도록 했고, 아랫니를 뺐다면 땅에다 심어서 위로 자라도록 했다.
  이 풍습에도 전설이 얽혀 있는데, 과거 좡족의 뛰어난 무당이 천둥을 일으키는 사악한 신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아들과 딸에게 천둥신이 물을 마시면 힘을 회복할 것이니 절대로 물을 주지 말라고 일렀지만, 아들과 딸은 천둥신을 불쌍히 여겨 물을 조금씩 주었다. 힘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생활하수로 버리는 더러운 물만 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신 천둥신은 힘을 회복하여 감옥을 부수고 나와 버렸다. 천둥신은 이 둘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자신의 이를 뽑아주며 이것을 땅에 심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준다. 이 말을 듣고 아들과 딸은 이를 땅에다 심었더니 거대한 조롱박이 자라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천둥신은 갇혀 있던 것에 대한 화풀이로 큰 비를 내려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였는데, 둘은 조롱박을 타고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뒤에 이 둘은 부부가 되어 자식을 낳았으며 좡족의 선조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또한 좡족은 공통적으로 음력으로 새해 첫 날에는 동물을 죽이지 않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젊은 여성이 소고기나 개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곳도 있다. 아이를 출산한지 3일 동안, 지역에 따라서는 7일 동안 손님을 받지 않으며, 아이를 낳은 산모는 한 달 동안 다른 집을 방문하는 것이 금지된다. 


 8. 좡족의 미래에 대해서 묻다.

 계림시 전경의 모습. 도시에 사는 좡족은 한화와 현대화의 영향으로 한족과 거의 구분이 안 된다.  광서좡족자치구에 위치한 발전소의 모습. 산업의 발달로 시골에 사는 좡족 젊은이의 도시 및 공업지대로의 이주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해준 좡족 소녀에게 좡족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좡족의 소녀는 좡족은 최다 숫자를 가진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소녀의 자신 있는 대답과는 달리 오늘날의 좡족은 한화, 현대화되어 민족색을 잃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이들의 생활 자체가 과거의 전통적인 생활에서 거리가 있으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의 전통 자체도 이미 예전부터 한화가 진행되어, 한족과 같은 1층집에 사는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좡족 자신들도 좡족 문자보다는 한자를 더 많이 쓰고 있다. 종교에서도 한족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아 집안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거나 중국 불교, 도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 생활을 해 왔다.
  한화뿐만 아니라 공산화와 현대화도 좡족의 민족색을 흩트리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연애나 결혼방식도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은 많이 사라지고 당사자들의 자유연애에 의한 결혼이 주류를 차지게 되었다. 장례 방식도 특히 도시에 사는 좡족은 중국 당국의 지시로 전통적으로 행하던 토장 대신 화장을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의복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현대화, 서구화되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좡족의 민족색을 희석시키거나 아예 없앨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2000년 기준으로 좡족의 다른 민족과의 통혼율은 12.66%로, 55개 소수민족 중 31번째를 기록하여 상당히 낮은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2000년 기준 인구의 8.79%만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좡족의 낮은 도시화의 덕분이었다. 좡족의 젊은이들이 일자리와 새로운 삶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다른 민족과의 연애 및 결혼의 가능성은 높아져가고 있고, 도시에 사는 좡족은 현대화와 서구화, 한화의 영향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 들어 광서좡족자치구에 대한 산업개발은 농촌지역의 좡족들의 도시 이주 및 한화, 현대화를 촉진시킬 것으로 보인다. 광서좡족자치구는 홍수하(紅水河)의 풍부한 수력을 이용한 수력발전과 망간, 주석, 안티몬, 알루미늄, 석탄 등 풍부하게 매장된 광물자원을 이용한 철강, 자동차, 농기계 생산 등의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게다가 이 지역은 바다를 통해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잇는 경제적 요인데다가 개발이 뒤쳐져 있는 중국 서부의 내륙지방까지 개발의 효과가 파급될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광서좡족자치구를 비롯한 베이부(北部)만 주변 지역의 개발을 '12차 5개년 개발계획(2011-2015년)' 기간의 중점사업으로 선정하여 산업발전을 촉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광서좡족자치구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계획도 추진 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개발 움직임은 좡족의 민족성 보존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될 가능성이 높다.


 글을 맺으며

  좡족은 소수민족 중에서 중국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며, 광서좡족자치구뿐만 아니라 운남성, 광동성 등 넓은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민족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금죽채, 그 중에서도 한 좡족 소녀의 집을 둘러본 것만으로, 그리고 관련 자료를 읽은 것만으로는 좡족에 대한 이해가 주마간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뼈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필자가 직접 찾아가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족한 이 글이, 우리나라의 중국 소수민족 연구에 있어 조그마한 참고자료라도 된다면 그것으로 필자는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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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정재남 저, 『중국 소수민족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다바타히사오(田畑久夫) 외 저,  원정식․이연주 역, 『중국소수민족 입문』 (현학사, 2006)

Liang Tingwang (1986). Zhuangzu fengsu ji (Customs of the Zhuang). Beijing: Central Minorities Institute.

Ma Yin, ed. (1989). Chinas Minority Nationalities, 371-379. Beijing: Foreign Languages Press.

Song Enchang, ed. (1980). Yunnan shaoshu minzu shehui diaocha yanjiu (Social researches on Yunnan's minorities). Vol. 2. Kunming: Yunnan Peoples Press.

Gu Youzhi, and Lu Julie (1985). "Zhuangzu yuanshi zongjiao de fengjianhua" (The feudal transformation of early Zhuang religion). In Zhongguo shaoshu minzu zongjiao (Religions of China's national minorities), edited by Song Enchang


참고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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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mf.org/omf/us/peoples_and_places/people_groups/zhuang_of_china
http://www.guilintourist.com
http://www.gxtravel.com
http://edu.sina.com.cn
http://kr1.chinabroadcast.cn
http://www.everyculture.com
http://www.joshuaproject.net

<민족연구> 제 33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