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현장

HOME > 민족자료 > 민족현장

중국 운남의 소수민족 현황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정남 작성일작성일 09-01-09 수정일수정일 70-01-01 조회6,308회

본문

중국 雲南의 소수민족 개황

                                    김재원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원)


Ⅰ. 개괄

운남성(雲南省)은 중국 서남 내륙지역의 운귀고원(雲貴高原)에 위치한 성이다. 동쪽으로 광서 장족 자치구와 귀주성이 있고 북쪽으로는 사천성과 서장 자치구, 서쪽과 남쪽은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운남성의 인구는 약 4천만 명 정도인데, 그중 소수민족들이 1천 4백만이 넘을 정도로 소수민족의 비중이 큰 지역이다. 중국에는 한족을 제외하면 55개의 공식적인 소수민족이 있는데, 운남성에 51개의 소수민족이 있으며 이중 15개 민족은 운남성에만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 기준은 중국 정부의 자의적인 것으로, 각 소수민족의 하부 민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집단들도 독자적인 민족으로 봐야할 만큼 개성이 강한 경우도 많고, 하부 민족끼리의 이질성이 매우 심한 경우도 많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 나시족의 일파로 분류되면서도 그들과 다른 모계중심사회를 가지고 있는 모수(摩梭)족을 들 수 있으며, 후자의 예는 하부민족 간에 언어가 매우 다른 민족들인 야오족․티베트족․먀오족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한 개 성에서 5천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성에서는 공식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운남성에서 가이드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선족은 수백 명 정도에 불과하므로 운남성에서는 공식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1. 운남성의 소수민족 현황

 운남성에서는 5천명 이상의 인구를 가져 공식적인 소수민족으로 분류되는 소수민족이 25개 있다. 그 명칭과 수는 아래와 같다.

 
 이족(彝), 바이족(白), 좡족(壯), 하니족(哈尼), 타이족(傣), 먀오족(苗), 회족(回), 리수족(傈僳), 라후족(拉祜), 와족(佤), 나시족(纳西), 야오족(瑶), 징포족(景颇), 티베트족(藏), 부랑족(布朗), 부이족(布依), 아창족(阿昌), 푸미족(普米), 누족(怒), 몽골족(蒙古), 지노족(基诺), 더앙족(德昻), 수이족(水), 만주족(滿), 두롱족(獨龍)의 25개 민족이 운남성의 공식적인 소수민족들이다. 이 중 가장 숫자가 많은 것은 이족으로 470만 5,658명이 운남성에 살고 있으며 가장 숫자가 적은 두롱족은 5,884명이 운남성에 거주하고 있다.(2000년 인구조사 기준) 이들의 민족 명칭은 중국 정부가 각 민족의 자칭을 존중해주거나 모욕적인 의미가 없으면 기존의 중국인들이 부르던 명칭을 공식적인 것으로 채용하는 등의 방식을 결정된 것이므로 기존의 국제적 명칭과 다른 경우도 있다. 징포족(景颇)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미얀마에서는 카친족이라고 불려 국제적으로는 ‘카친족’이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이다. 하니족 역시 미얀마나 타이북부에서는 ‘아카족’이라고 불린다. 
 이들이 모여 사는 정도와 그 인구 비중에 따라 자치주 또는 자치현을 만들어 이들에게 자치권을 주고 있는데, 더앙족․수이족처럼 수가 적거나 몽골족․만주족처럼 집단거주하지 않고 분산되어 다른 민족과 섞여 살아 한 개 주나 현에 일정 인구 이상이 거주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치주나 자치현을 만들지 못한다. 



 2. 언어학적으로 본 운남성의 소수민족

운남성의 소수민족들을 언어를 기준으로 분류해보면 알타이 어족 몽골 어군으로 몽골족이 있고, 퉁구스 어군으로 만주족이 존재한다. 한(漢)․장(藏)어족, 즉 중국․티베트 어족에 속하는 민족이 가장 많은데, 한(漢)어군에 속하는 것이 회족이며, 티베트․미얀마 어군에 속하는 것이 이족, 바이족, 하니족, 리수족, 라후족, 나시족, 징포족, 티베트족, 아창족, 푸미족, 누족, 지노족, 두롱족이며, 먀오․야오 어군에 속하는 것이 먀오족과 야오족이다. 캄․타이 어군에 속하는 것이 좡족, 타이족, 부이족, 수이족이 있다. 오스트로아시아 어족에 속하는 몬․크메르 어군의 민족이 와족, 부랑족, 더앙족이다. 


 
 티베트․미얀마 어군에서도 특히 이족․바이족․하니족․리수족․라후족․나시족․아창족․지노족․징포족 등은 언어가 유사점이 많아 이어계의 집단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는 이들이 고대 유목민족으로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강(羌)족이 남하하면서 나누어진,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으로서 운남성 일대를 지배하던 남조왕국(737~902)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푸미족도 운남성에 들어온 시기가 13세기 정도로 이들보다는 많이 느린 편이지만 역시 티베트 지방에서 온 강족의 후예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누족과 두롱족 역시 티베트계 민족으로 유사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먀오족과 야오족은 학자에 따라 오스트로아시아 어족의 몬․크메르 어군에 넣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정도로 이들 어족에 속하는 민족과 유사성이 많은데, 오랜 세월 한․장 어족 집단과 생활하여 이들과의 유사성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먀오족과 야오족은 선조가 같은 민족으로 간주되고 있다. 후한 시대에 등장하는 ‘무릉만’이라는 집단의 후예로, 수나라․당나라의 세력이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한족에 동화된 집단이 야오족이고 도망하여 남쪽으로 간 집단이 먀오족이라는 것이다.
 캄․타이 어군에 속하는 민족들은 장강 이남에 거주하던 고대 ‘백월(白越)’이라는 집단의 후예라고 하는데 대체로 고대 중국 남부의 연해 지역에 거주하던 집단이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로아시아 어족 중 중국령에 거주하는 민족 집단은 모두 몬․크메르 어족에 속한다. 와족․부랑족․더앙족 외에도 인구가 5천명이 안 되어 공식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쿰인’도 이 어족에 속한다. 이들은 운남성과 인접한 라오스․타이 북부․미얀마 동부의 선주민족이었는데, 타이족의 통치를 겪어 캄․타이 어군의 민족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Ⅱ. 운남성의 민족들


1. 이족(彝族, Yi)

 이족(彝族)은 중국, 베트남, 태국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중국에서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776만 2,272명으로 6번째로 많은 수를 기록한 민족이다. 운남성의 초웅(楚雄) 이족 자치주, 홍하(紅河) 하니족 이족 자치주, 서천성의 량산(凉山) 이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귀주성, 호남성 등에 넓게 분포하며 미얀마, 베트남 북부, 타이 북부 등에도 산다. 특히 운남성과 서천성의 이족이 주류이며 운남의 이족은 타민족과 섞여 산데 비해 서천의 이족은 산악지대에서 폐쇄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들 간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운남의 이족 여성은 바지를 입는데 서천의 이족 여성은 치마를 입는 등 특히 복식에서 차이가 크다. 이족은 지역에 따라 스스로를 수십 개의 다른 명칭으로 불렀고, 한족에게는 ‘오랑캐’를 의미하는 라라(羅羅), 이런(夷人), 이자(夷家) 등 경멸하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이를 이(彝)로 고쳐 민족명칭으로 하였다. 운남성의 이족은 2000년 조사에서 이족의 운남성 인구는 470만 5,658명으로 조사되었다.
 이족의 언어는 한․장 어족의 티베트․미얀마 어군에 속하며, 여섯 가지 방언이 있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천 년 전에 독자적인 음절문자인 찬문(爨文)이 만들어졌으며 ‘비머(Bimaw)’라는 무당에 의해 량산 자치주 등에서 찬문이 전승되고 있다.
 이족의 선조의 발상지는 황하 상류 유역이었지만 점차 남하하여 운남성에까지 이르렀다. 이족은 한나라 때의 서남이(西南夷), 삼국시대 제갈량이 남정하여 맹획을 사로잡던 남만(南蠻)이라고 총칭되던 집단의 주요 세력이었다. 당나라 때 운남성 동부의 오번(烏蕃)이라는 집단과 서부의 백번(白蠻)이라는 집단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 오번의 일부가 세운 것이 남조 왕국이다. 남조 왕국의 지배 세력인 오번은 오늘날 흑이(黑彝)의 선조가 되고 백번은 백이(白彝)가 선조가 되는데, 흑이가 백이 및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는 노예 사회를 만들어 유지하였다. 특히 사천성의 이족은 중국 공산화 이전까지도 노예제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어 신분제를 가졌다. 이 지역에서 백이 집단은 춰너(초고), 아자, 샤시 세 집단으로 구분되어, 최상층인 ‘춰너’는 이동의 자유가 없지만 자신의 집과 가정을 소유할 권리를 가지고 경지와 농기구도 가질 수 있었고, ‘아자’는 노예주의 관내에 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샤시’ 계층은 가내 노예로 신체의 자유가 전혀 없었다. 노예제 사회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흑이와 백이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산간에서 메밀, 귀리, 보리, 옥수수, 감자 등으로 재배하고 염소나 돼지 등 가축을 사육한다. 무덥고 비옥한 계곡지대에서는 주로 벼농사를 한다. 주식은 티베트족과 비슷한 참파를 먹는다. 담배와 차를 생산하는 이들도 많다. 중국에서 가장 큰 석림군(石林群)으로서 관광지로 꼽히는 스린(石林)도 운남성 루난(路南) 이족 자치현 내에 있어 이 지역 이족에게 수입원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족의 집은 목조이며 방은 토방형식이다. 방에는 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신목(神木)을 숭배하는 신수 신앙 등 애니미즘에 토대한 자연숭배와 조상 숭배가 이족들의 종교의 중심이다. 이족은 어디나 신이 있다고 여기지만 그중 가장 숭상하는 것은 산신이다. 이는 목축․농업 등 그들의 생활공간이 산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높은 산은 신성한 존재이며 산신은 마을의 수호신이다. 조상들이 남겨놓은 물건들은 모두 영혼이 깃들었다고 보면서 그 물건들을 ‘지뤄(吉羅)’라고 부르는데 이는 ‘복’이라는 뜻이다. 또한 부락마다 상징으로서의 ‘지뤄’를 두는데 낡은 보습, 한 쌍의 기러기, 돈 무늬가 있는 뱀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운남성의 이족들은 한인의 영향으로 불교와 도교를 많이 받아들였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어느 정도 전파되어 있다. 
 결혼제도가 독특한데, 이족 남성은 양친의 형제자매의 아이 중의 이성(異姓)을 가진 여성을 아내 후보로 맞는 관습이 있다. 즉, 외사촌누이와 결혼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를 ‘교차 사촌혼’이라고 한다. 이족 사회에는 부계중심인데다, 같은 씨족끼리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어 어머니의 형제는 반드시 다른 씨족에 속하게 되므로 외사촌은 일족이 아닌 타인으로 보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근친상간과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다. 이에 비해 아버지와 동성(同姓)의 형제자매 사이의 평행 사촌혼은 금지되어 있다.
 장례는 화장이 전통적인 의식이었으나 명․청나라 때 한족의 영향을 받아 지금은 토장이 더 일반적이다. 다만 상여가 나갈 때 죽은 사람의 옷을 태우는 형태로 화장의 전통이 남아 있다. 원래는 화장을 한 조상의 뼈를 나무상자에 담아 바위틈에 모셨는데 이후 영혼을 상징하는 옷 조각으로 대신해 조상의 영혼을 집 안의 선반에 모신다. 
 이족은 씨름을 즐기는 민족으로 유명하며 다른 민족의 사람과도 씨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들의 씨름은 우리의 씨름보다는 레슬링과 비슷하며 상대의 두 어깨를 모두 땅에 붙이면 이기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발로 부뚜막을 밟거나 가로타는 것은 불길하고 집주인을 멸시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며, 머리카락이 영혼 또는 영혼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므로 함부로 만지지 못하며 이를 어긴 사람은 술상을 차려 사과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축을 잡아서 빌거나 손을 잘라야 한다.

2. 바이족(白, Bai)


바이족(白族)은 2000년 인구조사에서 185만 8,063 명을 기록한 소수민족이다. 운남성 대리(大理) 바이족 자치주에 약 80%가 거주하고 있다. 곤명(昆明)과 려강(麗江)지역, 란평(蘭坪)지역과 서천성(四川省)의 경계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스스로도 자신을 바이라고 부르며 이는 ‘하얀 사람(白人)’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흰옷을 즐겨 입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이들은 송나라 시대 대리국(937~1252)의 중핵을 이룬 민족이다. 운남성의 바이족은 2000년 150만 5,644명으로 조사되었다.
 바이어는 한․장 어족 티베트․미얀마 어군인데, 오랫동안 한족과 접촉이 있어 그 어휘의 상당수가 한어에서 온 것이며, 바이족 다수가 한어를 말할 줄 안다. 고유문자는 없으며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였다. 10세기에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여 만든 ‘바이원(白文)’이라는 바이 문자를 사용하였지만 명나라 시대 이후 쇠퇴해버렸다. 현재 백족은 서남민족 가운데 가장 한화(漢化)가 이루어진 민족 중 하나라고 한다.
 이들의 거주지는 운남성과 귀주성의 평야지대인데다 강을 끼고 있고 기후도 온화하여 1년에 이모작을 하고 있다. 벼농사를 주로 하며 밀, 콩, 기장, 목화, 사탕수수, 담배 등도 재배한다. 또한 삼림이 잘 발달되어 있어 목재와 약초 등도 풍부하다. 또한 염색 기술이 우수하여 염색제품이 특산품이며 지역의 질 좋은 대리석을 이용한 대리석 가공품도 생산한다. 손님이 왔을 때는 여덟 접시에 팔괘를 상징하는 음식들을 담아서 만드는 토팔완(土八碗)과  쓴 맛․단 맛․복잡한 맛(回味)으로 세 잔의 차를 대접하는 삼도차(三道茶)을 내어 환대한다. 마지막 차는 꿀․생강 등을 넣어서 만드는 것이다. 이 삼도차는 운남성의 또 다른 특산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바이족의 집은 대문을 약간 비뚤어지게 만드는데, 이는 이 지방의 바람이 강하여 그 압력을 덜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집의 동․서․남쪽은 다 방들이 있고 북쪽은 하얀 칠을 한 조벽(照壁)이 있어 남쪽의 햇빛을 반사해 집을 밝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조벽의 맞은 편 방에 집안 어른이 산다.
 종교에서는 민족 고유의 ‘본주(本主)’ 신앙과 불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애니미즘도 많이 남아있다. 한족의 영향으로 도교가 널리 보급되고, 근대 이후 기독교도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본주’는 바이족들의 부락신 비슷한 것으로 마을의 수호신이다, 여러 부류가 있으며 지역마다 차이가 보인다. 남조국이나 대리국 등 옛날 이 지역에 있던 왕국의 왕이나 관료들을 본주신으로 모시거나 효자․열녀, 또한 한화의 영향으로 한(漢)족 관리나 장군을 본주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본주신을 모시기 위해 마을마다 신당을 세우고 흙이나 나무로 본주상을 만들어 모셔두고 본주신의 시종들과 자손들의 상도 만들어 노는다. 평소에는 본주신에게 보호를 빌고 정기적으로 본주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본주신앙과 관련하여, 귀신숭배도 보편적으로, 바이족은 해와 달, 나무, 바위 등 모든 사물에 귀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긴다. 이들 귀신이 재앙을 내리지 않고 복을 내릴 것을 빌기 위하여 여러 제사를 지낸다. 또한 불교와 도교가 성행하며 특히 바이족은 전통적으로 불교를 많이 믿어, 불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결혼식에는 반드시 대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어 빨간 칠을 한 후 사용하는데, 빨간 색깔이 부유와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혼식에는 신부를 꼬집으면서 축복을 하는데 강하게 꼬집을수록 더 큰 축복을 하는 거라고 믿기 때문에 하객은 신부를 인정사정없이 꼬집으며 신부는 아무리 아파도 웃음으로 이를 받아준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신부가 신방으로 들어가서 베개 쟁탈전을 하는데, 베개를 차지한 사람이 나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에 서로 먼저 뛰어 들어가 베개를 차지하려고 한다. 
 일부일처제가 보통이지만 드물게 일부다처제도 용인되고 있다. 남성만 재산 상속권을 가지고 결혼도 부모가 결정하는 등의 관습은 중국 혁명 이후 사라지고 있다.
  장례는 매장을 하는데, 풍수지리설을 믿어 조상의 묘지 자리가 자손의 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부모가 돌아가시면 풍수가를 불러 좋은 자리를 선택하려고 애를 쓴다.
 매년 3월 달에 하는 ‘3월가’라는 축제는 주요 무역로인 차마고도인 대리의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축제이다. 이 축제 기간에 대리 지역에서는 큰 장이 서고 말타기 경주를 하는 등의 축제를 가진다.

3. 좡족(壯族, Zhuang)




좡족은 중국 최대 소수민족으로 2000년 인구 조사에서 1,617만 8,811명을 기록하였다. ‘좡’이라는 호칭은 그들의 조상이 스스로를 부르던 이름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한족, 야오족, 먀오족 등 다른 민족과 섞여 살고 있는데, 운남성, 광동성, 귀주성, 호남성 등에도 거주하고 있지만 그 인구의 90%가 광시 좡족 자치구에 집중되어 있다. 운남성에서는 주로 문산(文山) 좡족묘족자치주에 많고 그 외에도 소통(昭通)、곡청(曲靖)、초웅(楚雄)、홍하(红河), 대리(大理) 등지에 살고 있으며, 2000년에 144만 4021명을 기록하였다.
 좡족은 송나라 이후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명 말기 이후 한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한족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좡어는 한․장 어족의 캄․타이 어군에 속하는데, 북부방언과 남부 방언으로 크게 구분된다. 당․송나라 때 한자를 차용하여 방괴송자(方塊宋字)라는 문자를 만들었지만 사용이 불편해서 종교 교본이나 노래책 정도에만 쓰였다.
 좡족은 일찍부터 수리 관개를 이용한 벼농사를 하였고 재배 기술도 뛰어나다. 찹쌀을 좋아하고, 3월 3일의 조상 제사 등에는 찹쌀을 ‘크람’이라는 나뭇잎으로 싸서 붉은색 물을 들이게 하여 붉은 밥을 짓는 관습이 있다. 예로부터 금속기술, 은세공, 목공, 방직공예 등이 뛰어났으며 특히 좡족의 여성이 목화실과 오색의 비단실로 짠 좡진(壯錦)이 유명하다. 산가(山歌)와 연극이 성행하며, 동고(銅鼓)를 연주하며 춤추는 풍습도 있다.
 전통적인 가옥은 2층집으로 위층은 생활공간, 아래층은 외양간과 저장고로 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족과 같은 1층집에 사는 좡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통이 넓은 바지에 수놓은 허리띠와 신을 신는 등 전통적인 복장이 있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입고 평소에는 한족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좡족 여성이 빈랑(betel) 열매를 씹는 풍습이 광서 지방의 서남쪽을 중심으로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를 손님 접대를 위해 내놓기도 한다.
 좡족은 15세가 되어야 성인으로 인정받아 연애 혹은 결혼을 할 수 있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면 부모로부터 붉은 색 끈을 얻어 그 여자의 어깨에 걸쳐 놓는데, 여자도 남자가 마음에 들면 그 끈을 잡고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끈을 버리고 가버린다. 결혼식 날이면 신랑은 남자 2명, 여자 2명을 거느리고 신부 집으로 가는데, 이들 일행이 신부 집 대문으로 들어가면 하객들이 이들에게 물을 뿌려 주며 행복을 빌어준다. 좡족의 사회는 일부일처제 사회인데, 결혼 후에 아내가 남편 집에 머물지 않고 결혼 다음날 부모에게 돌아와 함께 살며 명절이나 농번기에만 남편에게 찾아가는 특이한 관습이 있다. 좡족 아내는 결혼 후 2~3년이 지나야 남편과 함께 계속 살 수 있다. 그러나 공산화 및 현대화와 함께 이 관습도 사라져가고 있다.
 좡족의 종교는 조상숭배와 자연숭배를 기초로 하며, 대승불교와 도교도 받아들였다. 가장 숭배하는 것은 부락신과 토지신이다. 마을마다 이들을 위한 신당이 만들어져 있고 마을 어귀의 나무아래에는 돌 두 개를 놓아 부락신의 우상으로 삼고 있다. 음력섣달 그믐날에 부락신을 위한 제사를 하는데, 이날 저녁 제물로 썼던 고기와 죽을, 아이가 있는 며느리 방 앞에 놓아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고, 또한 죽을 가축에게 먹여 가축의 건강을 기원한다.
 용제사도 좡족들이 공통적으로 지내는 제사의식이다. 해매다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 풍작과 건강을 기원한다. ‘화왕성모(花王聖母)’라는 우리의 삼신할매와 유사한 노파신은 아이들의 수호신인데, 좡족 여성들은 아기를 낳으면 산모의 침대 머리 쪽 벽에 들에서 꺾어온 꽃묶음을 걸어 놓아 신주로 삼는다. 아이는 자란 뒤 해마다 설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이 꽃묶음에 절한다.
 사람이 죽으면 몸을 씻어주고 관에 넣을 때 손, 눈, 혀 밑 등에 돈을 놓아 저승길 노자로 쓰게 한다. 묘지에는 상징적으로 집을 지어놓고 사망자가 쓰던 도구들을 순장품으로 놓아둔다. 한족의 영향으로 집집마다 대청 가운데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명절 때마다 향을 올리며, 성씨를 단위로 사당을 세워 사당 안에 역대 조상들의 신주들을 모셔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운남에 사는 좡족은 가까운 조상 3대만 집에 신주로 모시고 그 외에는 밭에 모셔 곡식이 잘 되기를 기원한다.
 불교와 도교도 좡족의 고유신앙과 결합하여 관제묘, 대왕묘, 대신묘 등 이와 관련된 시설이 많이 있다. 무당은 자신들의 경전이 있는데 이것은 한문이나 좡족의 옛 문자로 쓴 것이며 좡족의 신화전설이 그 내용이다. 무당이 좡족의 민간신앙과 문화의 전승자 역할을 한다.
 19세기에 기독교도 들어왔지만 도시 지역에 영향을 끼쳤을 뿐 그다지 전파되지는 못했다.






4. 하니족(哈尼, Hani)


하니(哈尼)족은 중국․베트남 및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90% 이상이 운남성에 거주한다. 이들은 주로 애뢰(哀牢)산과 무량(無量)산 사이의 계곡 지대에 살고 있는데, 특히 운남성 홍하(紅河) 하니족 이족 자치주의 홍하현, 원양(元陽)현, 록춘(綠春)현 등 애뢰산 일대에 많이 거주하며, 사모(思茅)지구 푸이(普洱)현, 묵강(墨江)현, 진원(鎭沅)현, 강성(江城)현 옥계(玉溪)지구 원강(元江)현 등에도 많이 거주하여 자치주를 이루고 있다. 중국 내 총인구는 143만 9,673명(2000년 조사)이다. 운남성의 하니족은 2000년 142만 4,990명이었다. 
 하니족의 언어는 한․장 어족 티베트․미얀마 어군이다. 하니어에는 세 가지 방언과 약간의 토착어가 있다. 원래는 문자가 없었지만 중국정부가 이들을 위해 1957년 라틴어를 본 따서 문자를 만들었다.
 예전에는 화전 경작으로 옥수수나 콩 등을 재배했지만 현재는 산비탈에 밭을 만들어 벼농사와 차농사를 하고 있다. 하니족 거주지의 기후는 아열대이며 땅이 비옥해 쌀․기장․목화․땅콩․인디고․차 등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이중 이들의 주식은 쌀인데, 붉은 색을 띈 것이 특징이다. 운남성의 특산물로 유명한 푸얼(普洱)차도 시수앙반나의 하니족 거주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 또한 하니족 거주 지역은 주석, 구리, 철, 니켈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삼림자원도 풍부하다. 
 하니족의 집은 언덕 경사진 곳에 주로 건축되는데 대나무, 진흙, 돌, 나무 등으로 2~3층으로 만들어진다. 이들 집에 화로가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는데, 집안에 피워놓은 불은 꺼지지 않도록 하며 화로도 고기를 굽는 곳, 밥을 짓는 곳 등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한다. 전통적은 옷은 어두운 푸른색 직물로 만들고 남자는 짧은 재킷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으며 희거나 검은 터번을 걸친다. 여자의 옷은 그들이 속한 부족에 따라 달라진다.
 하니족은 물소를 매우 아끼는데, 이는 하늘의 신이 하니족의 힘든 생활을 보고 불쌍히 여겨 물소를 내려 보내  하니족의 농사일을 돕도록 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소가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에 대한 관심이 친자식에 대한 관심에 버금가며 날씨가 추우면 자신의 이불을 가져다가 덮어주기도 한다. 새끼를 낳은 지 3일이 되는 날에 찹쌀로 밥을 지어 그 밥으로 집안 식구와 물소가 함께 나누어 먹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하니족은 다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조상을 숭배한다. 홍하의 하니족은 여신인 ‘아오마’를 천신으로 모시고, ‘용수아마아차’라는 나무를 신령한 나무로 생각하여 집집마다 이 나무를 심어 수호신으로 숭배한다. 촌락입구에는 ‘룽바먼(龍巴門)’이라는 마을의 대문을 세운다. 이 대문은 신의 상징으로 여겨져 귀중하게 다루어져 1년에 2번 있는 룽바먼 교체 때도 반드시 제사를 지내면서 바꾸어야 한다. 대문의 왼쪽에는 일남일녀의 나체상을 세워 인구의 번성을 기원하고 오른쪽에는 대장장이 상을 세워 대장장이에 대한 존경을 나타낸다. 이는 하니족의 생활에서 수공업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외에 불교도 유입되었고 근대에 와서 기독교도 들어왔지만 믿는 사람은 적다.
 중국 혁명 이전의 하니족 사회는 일부다처제 사회로 남편은 아내가 아들을 못 낳으면 비록 아내를 버리고 재혼할 수는 없었지만 첩을 들일 수 있었으며 결혼은 부모에 의해 결정되었다. 결혼식 날에 신부가 눈물을 많이 흘려야 복을 받는다고 믿어 신부는 속으로 행복하다고 여기든 불행하다고 여기든 시집을 갈 때 아주 서럽게 대성통곡을 한다. 결혼식 2~3일 후 아내는 부모 집으로 돌아와 같이 살며 모내기할 때 남편에게 다시 돌아갔다. 하니족에게는 아버지의 이름의 마지막 부분을 아들 이름의 첫 부분으로 삼는 부자연명제의 관습이 있다.
 가정에서 무당을 청하여 굿을 하거나, 마을 밖에서 들짐승을 보았거나, 나뭇가지가 몸에 떨어졌을 때에는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룽’행사를 해야 한다. 쌍둥이나 손가락 또는 발가락이 6개인 아기를 낳는 것을 마을에 큰 재난을 가져올 불길한 것으로 여겨 이런 경우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며칠 동안 일하러 나가 않고 집에서 ‘룽’행사를 한다. 촌장의 명령이 있다면 그 아이를 죽이고 부모를 마을에서 내쫓고 그 집을 불사른 후 룽바먼을 새로 세운다. 이 외에도 애를 낳은 집에 다른 사람이 찾아온다거나 집 안에 피워놓은 불에 옷이나 신발을 말리면 안 되는 등의 금기가 있다.
 
5. 타이족(傣, Dai)


 타이족은 주로 운남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0년 조사에서 그 전체 수가 115만 8,989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들은 시수앙반나(西梔版納) 타이족 자치주, 덕굉(德宏) 타이족징포족 자치주, 림창지구 경마(耿馬)현, 맹련(孟連)현, 림창(臨滄)현, 와 30여 개의 현에 거주하고 있다. 옥계지구의 원강(元江)현, 신평(新平), 홍하의 원양(元阳)현、금평(金平)현, 하구(河口)현, 초웅의 대요(大姚)현, 사모지구 경곡(景谷)、푸이(普洱)、사모(思茅)、강성(江城)현, 서맹(西盟)현, 보산지구 룡릉(龍陵)현 등 30개 현에 거주하고 있다. 운남성의 타이족 수는  2000년 조사에서 114만 2,139명을 기록하였다.
 지역에 따라, 시수앙반나 타이족 자치주에 거주하는 타이루, 덕굉 타이족징포족 자치주에 거주하는 타이타우, 림창 지구의 경마 타이족 자치현이나 사모 지구 경곡현 등에 거주하는 타이누, 사모 지구 맹련현에 거주하는 타이폼, 원강 하니족 이족 자치현과 신평현에 거주하는 타이야 등의 하부민족이 있다. 이중 타이루는 13세기 이후 시수앙반나 분지를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가진 왕국을 세웠던 민족이다. ‘반나’는 ‘천마지기 땅’이란 뜻이고 ‘시수앙’은 열둘이란 뜻으로 이는 16세기 말 미얀마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모으기 위해 설치된 행정단위가 모두 12개의 반나였던 것에서 기원한 말이라고 한다. 이외에, 옛날에 타이족이 땅을 열두 개로 나누어 농사를 짓던 제도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타이어는 한․장 어족의 캄․타이 어군에 속하는데 세 가지 방언이 있다. 인도의 바리문(巴利文)을 본뜬 표음문자도 가지고 있었는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커서 1954년에 개정하여 현재는 시수앙반나와 덕굉의 두 가지 종류도 통일시켰다. 
 타이족은 예로부터 분지나 하천․계곡의 평야에서 벼농사를 해왔다. 특히 타이족의 주요 거주지역인 시수앙반나 지역은 아열대에 강수량이 풍부하고 비옥한 토지이다. 쌀․사탕수수․커피․고무․삼․장뇌 등을 많이 재배하며 과일도 많이 재배한다. 시수앙반나 지역은 푸얼차의 본고장이기도 하며 부근의 삼림은 목재와 약초를 풍부하게 제공해준다. 또한 영주에게 물건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던 장인들의 덕분으로 타이루는 방직․제지․도자기 제조 등의 생산 기술이 예로부터 우수하다.
 쌀이 주식으로 덕굉 쪽의 타이족은 푸석푸석한 쌀을 즐겨먹고 시수앙반나의 타이족은 끈기 있는 쌀을 즐겨먹는다. 맵고 신 음식을 매우 즐기며 소고기․닭고기․오리고기․생선․새우․배추․당근․죽순․콩을 좋아한다. 술과 빈랑 열매도 좋아한다. 남자가 11세에서 12세가 되면 몸통이나 다리에 문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은 대나무로 짓는 것이 보통이다. 1층도 있고 2층도 있는데 2층집의 경우 아래층은 가축을 위한 공간이고 위층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타이족에게 있어 집은 부유함의 상징으로, 나무 기둥이 많을수록 그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이족 가족은 칸막이도 없이 한 개의 침실에서 함께 자는데, 자신들의 침실을 타인이 들여다보면 복이 나간다고 생각하므로 매우 싫어한다. 운남성에서 이들이 주로 사는 곳은 아열대 지방이므로 모기나 파리 등을 막기 위해 잠자리에 모기장을 쳐 놓는데, 가족 구성원의 등급에 따라 모기장의 색깔이 다르다. 연장자들은 검은색, 그 다음 어른들은 빨간색, 어린 아이들의 모기장은 하얀색이다.
 타이족은 보편적으로 소승불교를 신봉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조상신, 논농사 귀신, 밭귀신, 대장장이 귀신, 술귀신 등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타이족은 ‘듀라만’이라는 부락신을 모시는데, ‘듀라는’ ‘신(神)’이라는 의미이고 ‘만’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듀라만은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과 이들에게 죽은 원수가 있는데 각각 부락을 보호하는 역할과 마을의 안정을 파괴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듀라만을 모시는 당집이 마을 중심에 있는데 이 당집은 물론 주위의 나무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이다. 또한 집안에서는 조상신을 가정의 수호신으로 모신다. 타이족은 옛날 유적에서 나온 구리도끼와 돌도끼를 주워 집에 두는데, 이렇게 하면 벼락을 맞지 않는다고 믿는다. 또한 아이들과 노인들은 구리조각 또는 알루미늄 몇 개를 실이나 나뭇잎으로 감아 목걸이나 손목걸이로 하고 다니는데, 이것이 귀신과 부정을 막는 부적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병에 걸리면 혼이 빠져나간 것이라고 생각해 제물을 마련하고 병자의 옷을 삶아 절구에 찌면서 혼을 부르는 주문을 한다.
 14세기 이래 소승 불교가 전해져 타이족은 거의 소승불교를 신봉하며 이를 통해 미얀마나 라오스에 거주하는 타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연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시수앙반나 지역에서는 절이 학교같은 역할을 하여, 읽는 법, 쓰는 법 그리고 불경을 공부시키기 위해 아들을 절에 들여보내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타이족 사람들은 절의 생계를 부양하는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
 장례방법은 매장인데 높은 지위의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묘자리가 엄격히 구분되고 있으며, 승려의 경우는 화장을 하고 그 재를 항아리에 담아 절 뒤에 묻는다.
 타이족은 독자적인 달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달력은 계절을 여름, 겨울, 봄의 셋으로 나누는데, 신년은 타이력 6월 1일이고, 이는 서력으로 4월 15일 정도에 해당한다. 신년인 6월 6일부터 7월 7일까지 한 달 동안 물 뿌리기 축제를 한다. 이 행사는 원래 하천에서 길러온 물로 불상을 씻으면서 사람에게도 뿌리는 것으로, 이 물을 맞으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타이족의 결혼은 반드시 사회적․경제적으로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끼리만 이루어지도록 제한된다. 일부다처제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흔한 일이며 평범한 타이족은 일부일처의 가부장 가정을 꾸린다. 결혼 후 남편이 처가에 들어와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6. 먀오족(苗, Maio)


먀오족(苗族)의 먀오(苗)는 묘족 자신이 아닌 중국인이 쓰던 호칭이다. 2000년 조사에서 그 인구가 894만 116명으로 집계되었다. 먀오족은 호북성, 호남성, 사천성, 귀주성, 운남성, 광서 좡족 자치구 등 중국 남부에 주로 거주하며, 특히 귀주성에 인구의 50%가 거주한다. 또한 많은 먀오족들이 중국 국경을 건너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타이 등에 살고 있다. 운남성의 묘족 수는 2000년 조사에서 104만 3,535명을 기록하였다. 먀오족은 운남성 전체에 두루 분포하며, 문산(文山)지구의 광남(廣南)현, 마관(馬關)현, 홍하(紅河)지구의 금평(金平)현, 병변(屏边)현에 특히 많아 5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등 문산지구와 홍하지구에 특히 많이 거주한다. 이들은 옛날 황하의 중하류에 거주한 동이족의 후예라는 설이 있으며, 먀오족은 그들의 조상신으로 ‘치우’를 숭배한다고 한다.
 먀오족의 언어는 한장(漢藏)어족의 먀오․야오 어군에 속한다. 먀오어는 호남서부방언, 귀주동부방언, 사천․귀주․운남 방언 등 여러 방언 갈래가 있으며 다른 방언구역에 속한다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한편 다른 민족과 섞여 사는 경우가 많아 다른 민족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주로 농업을 하며 이전에는 산비탈의 화전농업을 주로 했지만 현재는 산비탈을 개간하거나 평지에다 하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평지에서는 논을 이용해 잉어 등을 양식하기도 하며, 산비탈에서는 옥수수․밭벼 등을 주로 수확한다.
 집은 나무로 만들며 2층이 보통이다. 산비탈에는 다리를 세운 가옥이라는 뜻인 ‘댜오자오러우'라는 가옥을 짓기도 하는데, 아래쪽에는 긴 기둥으로 받치고 위쪽은 짧은 기둥으로 받쳐 집의 바닥을 수평상태로 만들어 집을 지어, 밑쪽의 남는 공간이 1층이 되는 2층집의 구조가 된다. '댜오자오러우’는 먀오족 뿐 아니라 부이족 등 다른 민족에게서도 발견된다.
 먀오족 사회는 하나의 촌락이나 촌락 두셋을 묶어 소관(小款), 수십 호나 수백 호를 묶어 대관(大款)이라고 하여 각각 통합된 사회를 형성하여 향규(鄕規)라고 불리는 자치규약을 가지고 있었다. 먀오족의 우두머리는 치안, 전쟁, 제례 등을 통솔하였는데, 향규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의 종교는 자연숭배, 귀신숭배, 조상숭배가 주가 되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 한족의 종교를 믿는 자도, 기독교를 믿는 자들도 있다. 혼의 존재를 믿어 병에 걸리는 것은 혼이 귀신에게 잡혀갔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영혼불멸을 믿어 사람이 죽으면 혼이 하늘에 올라간다고 믿는다. 사람 뿐 아니라 세상만물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 큰 바위, 큰 나무, 동굴 등을 신으로 숭배한다. 특히 단풍나무를 귀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단풍나무 뿐 아니라 그 주위의 나무까지 함부로 베지 못하고 단풍나무를 벤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있어 무당은 자기민족의 역사와 신화, 구전 가요를 섭렵한 지식인과 가수를 겸한다. 종교행사를 주최하고 병 치료, 복 빌기 등을 하며 어떤 무당은 한약으로 병 치료를 할 줄도 안다. 무당은 먀오족 사회에서 특권계층은 아니지만 이런 이유로 사회적 위망이 높다. 조상숭배는 어느 지역에 사는 먀오족이든 공통적인 것이다. 그들은 평상시 식사 때도 먼저 조상에게 올리는데, 특히 술과 고기를 먹을 때는 꼭 밥, 고기, 술 등을 땅에 조금씩 흘려놓아 조상이 먼저 맛보게 한다. 조상의 신주는 부뚜막 끝에 모시는데 간혹 한족의 영향으로 집 가운데 신주를 모시는 집도 있다.
 먀오족의 가족은 일반적으로 작은 규모이고 일부일처제이며 나이든 부모는 막내아들에 의해 부양되는 것이 보통이다. 미혼 자녀는 연애할 자유가 있어 명절 같이 특별한 날에 서로 만나고 사랑의 증표를 나눌 수 있다. 서로 노래를 부르면서 상대방과 교류를 하는데, 남자가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면 양산을 씌워주며, 여자도 남자가 마음에 들면 노래를 함께 부르지만 마음에 안 들면 양산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 이렇듯 연애는 자유이지만, 결혼은 반드시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전통적인 문화이다. 심지어는 부모들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약혼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여자를 납치해와 결혼할 것을 요구하여 여자의 동의를 얻으면 축하연을 성대하게 개최하고, 여자가 거절하면 놓아주는 우리의 보쌈과 비슷한 풍습도 있다. 이 경우 보통은 서로 짜고 잡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손님이 오면 남자가 대문까지 가서 손님을 맞고 여자들은 먀오족 노래를 부르면서 들어오는 손님을 접대한다. 손님을 위해 닭․오리․거위 등을 잡아서 대접하는데, 제일 맛있다고 여기는 내장 부위는 모두 손님에게 내어 준다. 손님에게 있어서는, 묘족 집에서 화로를 가로타서 지나거나 발로 차면 집주인을 모욕하는 행위이며 집안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도 실례이다. 길을 가는 부부 사이를 지나가면 실례가 된다. 또한, 먀오족은 개를 먹지 않는 않으며 개를 때리지 않고 욕도 하지 않는다.

7. 회족(回, Hui)


 회족은 회회족(回回族)의 줄임말이다. 회족은 13세기 이후 중국 영내로 이주해 온 투르크․이란․아랍 등 이슬람교를 믿는 외래 민족의 후손으로 한족․몽골족․위구르 족 등과 오랫동안 함께 살며 융합하여 형성된 민족이다. 회교라는 말의 기원이 된 위구르족은 회족과는 약간의 혈연적 연관성은 있기는 하지만 전혀 별개의 민족인데, 위구르족은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하며 알타이어족 투르크 어군의 언어를 사용하는 투르크계 민족인데 비해 회족은 중국 각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한족과의 혼혈이 많고 문화적․언어적으로 한화(漢化)가 된 민족이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 다만,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점은 공통점으로 남아있다. 중국 내 인구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981만 6,805명을 기록하였다. 이들의 거주지는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어, 녕하, 감숙, 하남, 신강, 청해, 운남, 산동, 하북, 요녕, 안휘 등 여러 성에 살고 있다. 이중 3분의 1은 도시에 살고 나머지는 농촌에 살고 있다. 회족은 크게 서북쪽에 사는 서북회민, 동쪽에 사는 내지 회민으로 나눌 수 있다. 내지 회민 쪽이 한화(漢化)된 정도가 크며 특히 운남성의 회족의 경우 일부는 이슬람교를 버리고 돼지고기를 먹기도 한다.
 운남성에서는 2000년에 64만 3,238명을 기록하였는데, 곡정(曲靖)지구 심전(尋甸)현과 대리(大理)지구 위산(巍山)현에 자치현을 형성하고 있으며 운남 전체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회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 이슬람문명권과 접촉을 시작한 당나라 시대부터인데, 운남성에 회족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몽골족이 대리국을 멸망시키고 회족을 관원이나 병사로서 파견하여 운남성을 지키게 하면서부터이다. 운남성의 회족은 명나라 영락제 때 대선단을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항해한 정화(鄭和) 같은 유능한 인재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19세기 중반 회족은 태평천국의 난을 틈타서 ‘두문수(杜文秀)’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대리에 수도를 둔 평남국(平南國)을 세워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거의 20년이나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두문수가 ‘술탄 술라이만(Sultan Suleiman)’이라고 자칭하며 평남국의 공문서를 아랍어로 쓰기도 하는 등 이 나라는 중국에 세워진 회족의 이슬람 국가였다.
 회족은 일상회화로 한(漢)어를 쓰며 용모도 한족과 거의 구별할 수 없다. 이슬람교를 일관되게 믿는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인데 이 때문에 돼지고기를 즐기는 한족과 마찰이 있기도 하다. ‘청진사(淸眞寺)’가 이들의 거주 중심지에 있는데, 이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뜻하는 말이다. 청진사는 종교적 역할 외에도, 회족에게 있어 서로 모여 의논을 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므로 청진사에 도교나 불교처럼 신의 우상을 만들어두지 않으며 몸을 정결히 하기 위한 목욕실을 두고 있다. 이슬람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짐승의 피, 이미 죽은 시체 및 술을 먹지 않고 남성 대부분이 백색이나 흑색의 테 없는 모자를 쓰고 있다. ‘청진(淸眞)’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식당은 회족들의 식당으로 이 식당에서는 돼지․닭․오리․말․당나귀 등의 고기를 내놓지 않으며 소고기와 양고기를 위주로 요리를 내놓는다. 종교지도자인 이맘이 의식이나 종교비용 징수를 주관하는데, 이들이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고 토지를 매입하고 높은 지대를 받아 민중을 착취하는 일도 있었다. 명대와 청대에는 이들이 회족 사회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자기의 지위를 세습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회족에 대해 중국 정부는 경계심을 가지고 대해왔는데, 특히 운남성에서는 1975년 이슬람 명절의 회복을 요구하는 무슬림 1,600명을 민족반란의 진압이라는 명목으로 대량 학살한 샤덴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공산화 이전에는 일부다처제였지만 이후는 중국의 결혼법을 준수하여 일부일처제가 대부분이다. 결혼은 보통 겨울에 많이 하는데, 회족 어린이들이 신부를 꼬집어주어 축복을 해주고 그 대가로 신랑 집에서 음식을 얻어먹는다. 결혼식 때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하면 신부 집에서는 대문을 잠그고 못 들어오게 막는데, 신랑을 대변하는 한 사람이 온갖 칭찬과 아부를 해야 문을 열어준다. 말을 잘 하지 못하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8. 리수족(傈僳, Lisu)


리수족은 중국을 비롯해 미얀마, 타이, 인도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주에 살고 있는 민족이다. ‘리수’는 리수족 자신의 호칭으로서 ‘리’는 고귀함을 뜻하고 ‘수’는 사람 또는 일족을 의미한다. 중국의 리수족 인구는 2000년에 63만 4,912명으로 조사되었다. 그 중 대다수가 운남성 노강(怒江) 리수족 자치주의 벽강(碧江), 복공(福貢), 공산(貢山) 로수(瀘水) 등의 현과 적경(迪慶)지구 유서(維西)현에 살고 있다. 이외 여강(麗江), 보산(保山) 등의 지역과 사천성의 서창(西昌), 염변(鹽邊) 등지에 살고 있다. 운남성에 거주하는 리수족의 수는 2000년 조사에서 60만 9,768명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한․장어족의 티베트․미얀마 어군인데, 오랜 세월 동안 중국, 태국 등 다른 언어․문화의 영향을 받아 리수족 사이에서도 서로 큰 차이가 나게 되어 상호간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렵다. 그들의 역사는 노래의 형태를 빌린 구전으로 전수되며 오늘날에는 이런 노래가 매우 길어 한번 부르는데 1주일 이상은 걸린다고 한다.
 리수족에게는 두 가지 문자가 있었는데, 첫째는 500자 정도의 음절 문자로 일부지역에서만 사용된 것이고, 둘째는 기독교 선교사인 프레이저(James O. Fraser)가 라틴문자를 바탕으로 만든 프레이저 문자인데 이 문자는 완전히 보급되지는 않았으며, 1957년에 중국 정부가 라틴 문자를 기초로 한 리수 문자를 새로 만들어주어 이가 보급되었다.
 리수족의 거주지는 산악지대와 계곡지대로 기후가 선선하며 매년 강수량이 2,500mm 정도로 많은 편이다. 이들의 땅은 그다지 농사에 유리한 입지가 아닌데다가 지진이나 전쟁이 잦은 지역이어서 그들은 수렵이나 교역에 의존했으며 운송인․상단 호위 등의 일을 하는 이도 많았다.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사냥으로 고기를 얻었는데 이들은 뛰어난 사냥꾼으로 유명했으며 활 쏘는 기술이 뛰어났다. 그들의 활쏘기 경쟁 방법이 과녁에 활을 쏘는 평범한 것이 아니고, 칼을 땅에 꽂아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활을 쏘아 그 칼의 칼날 부분에 화살이 반으로 갈라지면 이기는 것으로 하는 방법을 채택할 정도였다. 교역과 더불어 19세기의 아편 유입도 그들에게 수입원이 되었으며 지금도 아편 거래가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고 있다. 현재는 옥수수․쌀․메밀․밀․콩․고구마 등을 재배하고 환금작물로서 옻․모시․사탕수수 등도 재배한다. 현재 이들의 주식은 옥수수와 메밀이다. 한편, 리수족은 소․개․말․고양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들의 전통가옥은 두 종류가 있는데, 목재를 이용해 정방형으로 짓고 널빤지로 천장을 올린 집과 목재로 짓되 대나무로 벽을 만드는 집이 있다. 집의 중앙에는 큰 화로를 설치한다.
 이들의 종교는 샤머니즘적인 것이 주로, 종교 직능자인 니파가 귀신에게 비는 의식을 주도한다. 또한 각 씨족들은 호랑이, 곰, 원숭이, 물고기, 유자나무, 참대 등 20여 종의 토템을 가지고 이들을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고 신비화하는 토템신앙이 있다. 이들 토템의 이름으로 자기 씨족의 이름을 삼아 혈연관계를 구분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부터 스코틀랜드의 프레이저(James O. Fraser) 등 서구의 선교사들이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자 노력하여 상당수의 리수족을 개종시켰으며 특히 미얀마에 거주하는 리수족을 많이 개종시켰다. 오늘날에는 중국 내에서 약 30만 명의 리수족이 카톨릭을 비롯한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한다.
 일부다처제 사회이며 자녀는 결혼하면 반드시 부모를 떠나 독립하되, 막내아들이나 독자라면 부모를 돌보기 위해 남으며 후일 재산을 상속받는다. 딸은 상속권이 없지만 남편을 부모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여 상속할 수는 있다. 결혼은 부모가 결정한다. 
장례는 매장으로 하며 매장할 때 생전에 쓰던 물건들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있다. 노인이 죽으면 2~3일 동안 온 마을이 일을 쉬면서 술과 고기 등을 가지고 가서 애도를 표한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준다.
 리수족은 정직을 중요하게 여겨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 떨어져 있더라도 꼭 소리를 질러서 주인을 찾아보고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물건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고 간다. 이들에게 있어 집의 앞이나 뒤쪽에서 큰 소리로 외치거나 집안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은 실례이며, 저녁에 출입할 때는 꼭 문을 닫아줘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 다리를 가로타고 지나거나 화로를 가로타고 지나거나 제사를 지낼 때 함부로 들여다보면 실례가 된다.
 일생에 두 번 이름을 짓는데, 태어날 때와 결혼할 때가 그것이다. 태어날 때 지은 이름은 혼의 이름이라고 여겨 어른이 된 뒤에는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고 죽은 후 무당이 제사에서만 부를 수 있다.
 
9. 라후족(拉祜, Lahu)


라후족은 중국 내에 45만 3,705명이 살고 있으며(2000년), 운남성에 거의 대부분인 약 45만이 살고 있으며 미얀마에도 15만 정도가 살고 있다. 태국에서도 6대 고산 민족 중 하나로 10만 정도가 살고 있다. 라오스에도 만 명 정도가 있으며 베트남에도 산다. 운남성에서는 2000년에 44만 7,631명을 기록하였다. 특히 운남성의 란창(瀾滄) 라후족 자치현과 맹련(孟連) 타이족라후족와족 자치현 진원(鎭沅)이족하니족라후족자치현 등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라후나’(拉祜納, 검은 라후), ‘라후시’(拉祜西L, 황색 라후), ‘쿠쭝’(苦總, 산의 백성) 모두 세 가지 하부민족집단이 있다. ‘라’는 호랑이를 뜻하며, ‘라후’는 호랑이를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정도로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언어는 한․장 어족 티베트․미얀마어군에 속한다. 란창(瀾滄)강을 경계로 서부의 라후나와 동부의 라후시 두 방언으로 구분되는데, 인구의 70%가 라후나를 사용한다. 타이어나 한어를 말할 수 있는 인구도 많다. 문자는 고유문자가 없고 단지 나무에 칼자국을 내거나 대나무를 조각을 묶어 소식을 전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라후 문자는 라틴 문자를 기초로 1957년에 만들어졌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타이족의 세력 하에 놓여 있으며 타이족의 지배하에 화전 경작과 수렵으로 생업을 하며 ‘문’(사냥꾼)이라고도 불렸다. 라후족이 거주하는 땅은 란창 강을 끼고 있는 데다 기름진 땅이라 벼농사 외에도 옥수수․메밀․차․담배 등도 많이 재배하며 울창한 삼림도 있어 목재와 약초가 풍부하다. 또한 그들의 거주 지역 부근에는 철․구리․납․알루미늄․석탄․ 은․텅스텐․운모 등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이들의 가옥은 타이족의 가옥과 유사하다.
  종교는 다신교적 형태로, 천신으로 ‘어샤(Exia)’를 최고신으로 모시며 촌락의 신, 가정의 신 등에게 제사를 지낸다. 일이 있을 때는 무당인 모바(魔巴)를 불러 귀신을 쫓는 의식을 맡긴다. 불교가 17세기 후반에 한족과 바이족을 통해 소개되어 널리 퍼졌고 19세기부터 미얀마를 통해 들어온 기독교도 전파되어 오늘날 3만 5천에서 5만 정도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한다.
 라후족의 남자가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나무뿌리로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어 여자에게 선물을 하는데, 여자도 그가 마음에 든다면 오색 허리띠를 만들어 선물로 준다. 약혼을 하려면 남자가 여자 집에 약혼식을 하러 3번을 찾아 가야 한다. 첫 번째는 차 한 봉지, 담배 한 묶음, 술 한 병을, 두 번째는 차를 끓이는 다기(茶器) 2세트와 담배 두 묶음, 술 12 병, 세 번째는 손으로 짠 천 한 필과 곡식, 푸른 천 한 자를 예물로 가지고 가야 승낙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라후족의 결혼식은 잔칫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을사람들이 와서 그 모닥불을 돌면서 춤추고 노래를 하는 형식으로 한다. 모닥불을 돌면서 복을 빌어주면 두 사람이 불같은 열정으로 사랑을 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라후족 사회는 일부일처제가 전통이다. 지역에 따라 결혼에 있어 부모의 결정권 없이 본인들 자유의사로 하는 지역도 있고 모계 중심 사회가 유지되는 곳도 있다.
 장례 방식은 전통적으로 화장인데 지역에 따라 돌무덤에 매장하는 전통을 가진 곳도 있다. 장례식에는 죽은 이가 생전에 쓰던 물건을 가지고 가는 여성에 의해 진행된다.

10. 와족(佤, Va)


와족은 운남성의 서남부에 주로 거주하며 미얀마에도 산다. 중국 내에서 그들의 인구는 2000년 조사 기준으로 39만 6,610명이다. 미얀마에는 약 33만 명이 산다고 알려져 있다. 운남성에서는 2000년 조사에서 38만 3,023명을 기록하였다. 사모(思茅)지구의 서맹(西盟) 와족 자치현과 림창(臨滄) 지구의 창원(滄源)현, 쌍강(双江)현, 경마(耿馬)현 등에 밀집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을 지배하던 타이족이 이들을 ‘카와’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예, 예속민을 뜻한다. 사는 지역에 따라 자신을 ‘부라오’나 ‘바라오’, 또는 ‘아와’, ‘라’ 등 다르게 칭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들 모두를 와족이라는 명칭으로 통일시켜 부른다. 언어는 오스트로아시아 어족 몬․크메르 어군에 속하며 4가지 방언이 있다. 문자는 원래 없었지만 1957년부터 중국 정부가 만들어 주어 이를 쓰고 있다. 그 이전에는 강냉이 알의 개수나 매듭, 칼자국 등으로 숫자가 일어난 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들이 사는 지역은 아열대 기후와 비옥한 토지에 강우량도 많아 벼․옥수수․기장․메밀․감자․ 목화․삼․담배․사탕수수를 많이 재배하고 아열대 식물인 바나나․파인애플․망고․파파야․오렌지 등도 재배한다. 또 빈랑 열매를 씹거나 술을 마시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와족은 검은색 옷을 위주로 하고 붉은 색으로 장식을 한다. 남녀 모두 머리를 길게 기르는데, 은으로 만든 장신구를 몸에 걸치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귀에 구멍을 뚫은 후 대나무를 찔러 넣어 점점 그 구멍을 크게 만들어 큰 귀걸이를 달고 다닌다. 남녀 모두 술과 담배를 좋아한다. 특히 손님이 오면 술을 대접하는 것이 예의인데, 술잔이 각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대나무 통에 술을 담아 와서 주인과 손님이 나누어 마신다.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주인은 대나무 통 하나로 대접을 하고 통을 돌릴 때는 반드시 손으로 자신의 입이 닿았던 부분을 닦고 건네준다. 
 와족의 촌락은 언덕 꼭대기나 경사에 만들어진다. 한 가정이 새 집을 짓는다면 다른 이웃들이 와서 일손을 제공해주고 목재나 짚 등을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어 보통 집짓기는 하루 만에 끝난다. 기둥을 세운 후 거기에 집을 짓되 가축을 둘 만한 공간을 충분히 남겨두며 짓는다. 
 와족 중에서도 서맹 와족 자치현과 림창 지구의 와족이 큰 줄기를 이루는데, 서맹의 와족은 화전농업 위주로 벼나 옥수수를 재배하며 종교는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 신앙을 가진다. 림창 지구의 와족은 화전 농업을 점차 안 하고 있으며 산비탈에 경지를 조성하여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다. 와족 특히 서맹의 와족은 촌락 내에 크고 작은 두 개의 목고(木鼓)를 가지는데, 중요한 축제 때 두드린다. 씨 뿌리기 전에 소를 잡아 신에게 제사하고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루며, 이때 목고가 중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며 무당이 이를 진행한다. 또한 소승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아 불교 사원도 많이 있다. 근대 이후 기독교도 들어왔으며 선교사들이 문자까지 만들어 내어 그것을 성경 번역에 이용해 선교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7만 5천의 와족이 기독교를 믿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장례식을 특히 중시하여 혼을 부르는 무속행사가 성행한다. 와족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산사람을 보호해준다고 여겨 죽은 사람을 위해 명당자리를 선택해 주고 제사를 지내며 죽은 후에도 생전처럼 생활할 수 있도록 그가 쓰던 도구와 장신구를 무덤에 넣어준다. 어떤 지역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첫 한 달 동안 참대관을 사망자의 입에 꽂아 놓고 매일 음식을 흘려 넣어 그 영혼이 먹도록 하는 곳도 있다.
 와족의 사회는 일부일처제이다. 부계 중심이고 재산의 상속은 막내아들에게 하며 딸들은 상속권이 없다. 남자가 16세가 되면 여자 집을 찾아다녀도 되며 딸이 있는 와족들은 오히려 젊은 남자들이 자기 집을 자주 들락거리면 딸이 인기가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한다. 남자가 찾아오면 설령 늦은 밤이라도 부모가 자리를 피해줄 정도로 자유연애 분위기인 민족이다. 남자와 여자는 혼인 전 성관계도 자유로운 편으로, 빈랑 열매나 담배 잎 같은 것을 정표로 준 이후라면 동침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이런 연애의 자유는 결혼이후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결혼식은 부모들이 주관한다. 단,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는 결혼을 할 수 없다. 또한 와족에게는 이족과 비슷한 교차 사촌혼이 남아있다. 이혼은 거의 없는데, 악몽을 꾸고 나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 호랑이 꿈, 다리가 무너지는 꿈, 나무가 부러지는 꿈, 남자가 새 옷을 입는 꿈은 흉조라고 하며 둘의 이혼 사유가 된다. 단, 삼림, 바나나 나무, 강물, 과일을 먹는 꿈은 길조라고 생각한다.
 와족의 앞에서 지신의 머리나 귀를 만진다거나 그 집 딸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는 청혼의 표시로 받아들여지므로 정말로 마음이 있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를 행해서는 안 된다.

11. 나시족(纳西, Naxi)

 나시족은 2000년 조사에서 30만 8,839명을 기록하였다. 이들은 주로 운남성의 려강(麗江) 나시족 자치현과 그 주변에 살고 있으며 서천성의 염원(鹽源), 염변(鹽邊), 목리(木里)등의 현과 티벳의 망강현(茫康縣)에도 살고 있다. 이들은 평균 해발 2,700m가 넘는 고산 지대나 계곡에 주로 산다. 민족명칭인 ‘나시’는 민족자칭으로 ‘나(納)’는 ‘검은색’을 의미하며 ‘시(西)’는 ‘당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외의 자칭 중 하나로 ‘나환(納桓)’이 있는데 이는 ‘검은 사람’, 또는 ‘검은 부족’이란 뜻이다. 이는 이 지역의 햇볕이 강해 그들이 피부가 검게 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운남성의 나시족 인구는 2000년 조사에서 29만 5,464명을 기록하였다.
 나시족은 이족과 마찬가지로 오번(烏蕃)계 자손으로 보이며, 목(木)씨 토사(土司)의 지배아래 한문화를 받아들여 그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지배 계층의 성인 목씨도 명나라 주원장이 하사한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허(和) 씨가 많은데 이는 목씨 지배계층이 지어준 것이다. 
 나시어는 한․장 어족, 티베트․미얀마 어군에 속하는데, 진사(金沙)강을 경계로 동서 방언으로 구별되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문자는 의례용 경전인 ‘동파경전(東巴經典)’에 쓰이는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와 표음문자인 구파(哥巴)문자가 전해지지만, 이는 서부 방언지역에만 있는 것들이지 동부 방언지역에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문자들은 무당들만 사용하였으며, 특히 1200~1300자 정도의 동파문자로 기록된 ‘동파경전’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나시족들은 한족과 오랫동안 접촉하여 그 영향을 받아 한문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한어 보급률이 70%를 넘을 정도로 한어에 능통하다.
 고대 중국에서 나시족은 합격자를 배출하기도 하는 등 학구열이 높은 민족으로 유명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중국에